[글모음]양경규의 "오늘"

전국농민운동의 조직화의 출발, 암태도 소작쟁의

양경규 2016. 2. 21. 23:20

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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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운동의 조직화의 출발, 암태도 소작쟁의

 

1924년 오늘은 암태도 소작쟁의가 본격적인 투쟁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된 날입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그 이전까지가 말하자면 협상과 조직화의 과정이었다면 이날부터 본격적인 농민들의 집단행동이 시작된 날입니다. 이날 암태도의 소작인들은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며 지주 문재철의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그동안의 소작투쟁에 방해와 탄압을 일삼던 문지주쪽 사람들과의 일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 결과 13명이 연행 구속된 날입니다.

 

암태도는 목포에서 25km, 뱃길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여의도의 5배 정도되는 섬입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9월부터 24년 9월까지 약 1년동안 전라남도 무안군(지금은 신안군) 암태도에서 벌어진 농민들의 피어린 투쟁이며 1920년대를 대표하는 소작쟁의입니다.

 

3.1운동으로 정치적, 사회적 각성을 한 농민들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일민족운동의 주체로서 본격적인 소작쟁의를 전개하게 됩니다. 소작쟁의가 벌어진 주요한 원인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농민의 토지상실, 고율의 소작료, 중간수탈의 심화, 지주와 일제의 결탁에 의한 폭압등을 들 수 있습니다. 1922년경에는 약30여개의 소작인 조합이 있었지만 1933년에는 1,301개로 증가하게 된 것을 보더라도 소작쟁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분산적으로 조직된 소작인 조합은 1920년 2월 7일에 조직된 조선노동공제회와 연결되었고, 노동공제회는 지부에 농민부, 소작인부를 두어 소작쟁의를 지원,지도 하였습니다.

 

암태도의 대표적인 지주는 문재철과 천후빈 두사람이었으나 천지주는 자진해서 그동안 소작료가 과다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4할로 소작료를 낮추었고 소작쟁의가 한참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암태도의 소작인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끝나고 암태도의 소작인들은 자발적으로 천지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문제는 지주 문재철이었습니다. 문지주는 소작료로 8할가까이를 뜯어 갔으며 이로인해 소작인들은 각종의 공과금을 제하고 나면 사실상 농사지은 것의 1할도 채 안되는 것이 몫으로 떨어졌습니다. 뿐만아니라 이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거나 지주에게 굽신거리지 않는 소작인에 대해서는 소작을 멋대로 떼어버리는 폭압을 행사하였고 일제는 이를 뒤에서 비호하고 있었습니다. 암태도의 소작쟁의가 항일 민중투쟁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작인들은 때마침 전국에서 불던 소작쟁의에 힘을 얻으면서 소작회(회장:서태석)를 결성하고 1923년 9월 정식으로 4할로 소작료를 인하할 것과 소작권 보호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주 문재철은 이를 철저히 묵살합니다. 암태도의 소작인이 거의 모두가 가입되었던 소작회는 본격적인 소작쟁의를 시작합니다. 소작인들의 단결을 위한 규율을 제정하고 조직내부를 철저하게 조직화해 나가는 한편 미동도 하지 않는 문지주에 맞서 추수를 거부하는 투쟁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일년동안 자식처럼 키워 온 벼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 농민들에게는 자식을 그냥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고통이 되면서 농민들의 단결력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에 소작인회 지도부는 추수거부투쟁이 대중적이지 못했다는 평가속에서 일단 추수를 하되 이를 공동으로 보관하는 방법으로 투쟁의 대중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아울러 암태도 소작인회는 암태도의 소작쟁의를 언론에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문지주의 만행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한편 문지주의 폭력에 맞서 동리별로 자경단을 구성하고 소작인의 보호와 단결의 구조를 확대해 나갑니다. 소작회는 이 투쟁의 정당성과 지지를 얻기 위하여 1924년 3월에는 소작인대회를 넘어 전체 면민들과 함께하는 면민대회를 개최하여 힘을 모아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문지주와 일제는 소작인에 대한 폭력과 위협을 수시로 행사하게 됩니다. 문지주와 일제는 소작료를 거두기 위해 소작인의 집에 집단적으로 쳐들어가 강제로 소작료를 갈취해가면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뿐만아니라 소작인중에 심성이 약한 사람들을 골라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회유하여 소작료를 납부하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소작인들의 단결을 허물어트리려 합니다. 일제 경찰은 목포에서 넘어와 섬 곳곳을 집단으로 행진하며 소작인들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1924년 4월 10일 열릴 예정이었던 전국노농대회에 암태도 소작인회는 대표를 파견하여 문지주와 일제의 만행을 알리려 하였으나 이를 알아챈 일제는 서태석 회장을 대전역에서 납치하여 목포경찰서에 구금하기도 하였습니다. 소작인회는 이 모든 폭력과 탄압에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맞섭니다. 절대로 저들에게 빌미를 주어 투쟁을 그르치지 않겠다는 철저한 자기규율을 지켜 나갔던 것입니다. 소작인들은 한편으로는 분노하였지만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투쟁의 양상은 예나 지금이나 참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던 차에 1924년 오늘 5월 22일 급기야 일제는 일본군대를 암태도에 들여 보내 섬 곳곳을 다니며 위협적인 총탄을 발사하게되고 소작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소작인회 지도부는 여기에서의 인내는 소작인들의 패배감을 불러 올 수 있다는 판단속에서 드디어 대중적인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문지주 문중의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문지주측 사람들과 전면전을 벌이게 됩니다. 즉시 출동한 경찰은 13명을 연행하고 구속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암태도의 피어린 소작쟁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암태도의 소작인들은 1차로 600여명의 소작인들이 배를 타고 목포로 건너가 3일간의 농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1차 투쟁에서 성과가 없자 소작인들은 다시 1차보다 더 많은 소작인들이 목포로 나가 경찰서와 재판소 앞에서 집단 단식투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암태도의 소작쟁의는 전국적인 이슈로 등장하고 어는 사이 소작쟁의의 상징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전국 곳곳에서 지원이 쇄도하였고 언론은 연일 암태도의 소작쟁의를 보도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내노라 하는 변호사들이, 해방후에 대법원장을 역임하는 김병로등의 변호사들이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목포로 내려오게 됩니다. 일제는 당황하기 시작하였고 전남도지사와 총독부가 나서면서 문지주는 사실상 항복을 하게 됩니다. 문지주와 합의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한다.

2. 지주는 소작인회에 2천원을 기부한다.

3.지금까지의 미납소작료는 3년에 걸쳐 무이자로 상환한다.

4. 구속자는 쌍방합의하에 고소를 취하한다.

5. 송덕비는 소작인회의 부담으로 복구한다.

 

구속된 13명은 모두 1심 혹은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서태석등 2인은 결국 실형을 살게 됩니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끈 서태석은 1911년부터 1919년 까지 면장을 지냈던 사람이었으나 면장질이 곧 일제에 협력하는 일임을 깨닫고 사임하고 농민운동에 뛰어든 사람입니다. 석방후에도 농민운동과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으며 수차례 옥고를 치르다 1943년에 고문후유증으로 암태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암태도의 소작쟁의는 작은 섬에서 출발하였으나 일제하 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22년까지 전국단위의 별도의 농민조직은 없었고 앞에 언급한 것처럼 노동공제회내에 부서로 존재하였으나 암태도 소작쟁의를 비롯한 전국의 소작쟁의의 영향으로 1924년 4월 전국노농총연맹이 결성되었고 1927년에는 농민운동의 발전에 따라 노농총연맹은 노동총연맹과 농민총연맹으로 각각 별도의 조직으로 독립하게 됩니다. 농민총동맹은 32개 산하단체 2만 4천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참고로 1920년부터 1940년까지 20년간 소작쟁의는 총 140,969건이 발생, 1년 평균 7,048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울러 농민운동은 30년대에 들어 비합법의 공간에서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변화, 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물리적인 반일투쟁, 계급투쟁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의 성격을 띄게 됩니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현대에 와서 일반에게 폭 넓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박순동의 논픽션 암태도(신동아 제5회 논픽션 최우수상)와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가 창비 79년 가을호부터 80년 여름호까지 연재되면서 부터입니다. 좀 더 관심을 갖고 암태도 소작쟁의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동지들은 한번쯤 읽어 보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 외 1990년 오늘은 남북 예멘이 통일된 날입니다. 남북 예멘은 같은 민족이면서 북쪽은 자본주의 체제를, 남쪽은 공산주의체제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와 비슷합니다. 남북은 양쪽 국력의 비례에 따라 통일국가의 권력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통일에 접근하였습니다. 이를 테면 대통령은 북예멘이 하고 부통령은 남예멘에서 맡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멘은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력 약화로 통일을 이룬지 4년 만에 남북 군대간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남측은 분리독립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내전은 2달만에 북측의 승리로 끝나고 1994년 7월 다시 남북예멘은 통일됩니다.

 

1960년 오늘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초중고 교사와 대학교수 300여명이 참가하여 한국교원노조연합회(위원장:조일문)가 창립됩니다. 그러나 정부는 교원노조가 국가공무원법과 교육공무원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하면서 5월 29일 해체를 천명합니다. 이에 전국각지의 교사들은 교원노조 사수를 위한 투쟁에 들어 갑니다. 4.19혁명으로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난 후 1960년 5월 7일 대구시내 중고교 및 초등학교 교원들의 노조결성으로 교원노조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교원노조 결성은 서울, 부산으로 급속히 확산 되었고 마침내 오늘 전국단위의 한국교원노조연합회를 창립하게 된 것입니다. 정부의 탄압에 맞서 교원노조는서울, 마산, 부산, 대구등지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는 한편 집단사표와 단식농성을 맞섰습니다. 8월 25일에는 경상도 지역 9,000여 조합원들이 사퇴를 결의하고 9월 26일부터는 교원노조 전국대표자 600명이 대구역에서 집단 단식농성에 들어갑니다. 이에 부산과 전주등 전국의 교사들이 함께 단식에 들어가고 서울에서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단식농성이 시작되었습니다. 9월 29일에는 대구 시내 중고교 학생 1만 4000명이 거리로 나와 “스승없이 학원없다!”고 외치며 지지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단식기간동안 졸도한 사람이 1,000명,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이 426명에 이르는 전국적인 대규모 투쟁이었습니다. 정부는 처음에 교원노조를 교원연합회 혹은 교원조합으로 하고 단결권은 인정하되 단체행동권은 금지한다는 타협책을 들이밀었으나 교원노조는 이를 거부하고 완강하게 투쟁을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4.19혁명으로 그야말로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정권은 해방이후 초기 노동운동사에 있어서 어용 대한노총의 청년 돌격대로 각목과 총을 들고 노동운동 파괴에 앞장섰던 우파정치인들인 유진산, 이철승등이 당의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으니 교원노조에 대하여 이런 입장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보수적인 우익 정권도 완강한 교원노조의 투쟁에 굴복하여 교사를 공무원에서 제외하도록 공무원법을 개정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법제화를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결국 투쟁은 해를 넘겨 계속되지만 5.16 군사쿠테타로 교원노조는 끝내 합법성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교원노조운동은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으로 다시 시작되고 30년전과 거의 똑 같은 투쟁의 과정을 거쳐 1999년 1월 9일 교원노조법이 국회를 통과하게 됨에 따라 합법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나 단체행동권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서 길고 길었던 합법성투쟁을 미완의 투쟁으로 남겨놓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