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정치세력화 그 여정의 시작 지금도 가슴 싸해지는 이름 국민승리21
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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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길고 긴 정치세력화 그 여정의 시작
지금도 가슴 싸해지는 이름 국민승리21
그냥 다른 글 쓰듯이 있는 사실을 쭉 써내려 가면 되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왠지 이번 글은 잘 써질 것 같지가 않습니다. 워낙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어서 자신의 얘기를 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지 고생한 이야기나 자기 변호를 할 것 같습니다. 또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거론하는 것도 불가피한데 그들의 생각을 듣지도 않고 이야기함으로서 왜곡하는 부분도 생기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하여튼 객관적인 기술에 대한 자신도 없는데다(그래서 주관적인 입장이 될 것도 같습니다. 하긴 다른 글도 주관적이긴 마찬가지였지만 말입니다) 최근에 분당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좀 거시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초에 건너뛸까도 생각했지만 더 지나면 잊어버릴 것 같아 한번 써 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한데는 또 한 이유가 있는데 최근에 다시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김창우, 후마니타스), <한국민주주의와 노동자.민중정치>(김세균, 도서출판 현장에서 미래를)를 읽으면서 자칫 최소한의 기록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굴절되거나 왜곡된 문건, 혹은 특정한 정파의 시각을 객관화와 일반화로 포장한 문건만이 역사에 기록으로 남겠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7년 오늘, 9월 7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 회의장 양편에 ‘희망창조’, ‘국민승리’라고 쓰여진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장내에는 약 2,000여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날 사회를 맡은 것은 저였습니다. 당시 저는 민주노총의 정치위원장이자 국민승리21의 추진위 운영위원이면서 조직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집회에서 연설도 하고 사회를 보기도 했지만 15대 대통령 후보 선출과 국민승리21 준비위원회 발족을 위한 이날 대회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 갈 길도 험난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도 온갖 우여곡절과 설움을 겪었던 저로서는 감회가 솔직히 컸습니다. 이날 대회사는 전국연합 이창복 의장이 하였습니다.
“....중층화된 모순들이 대충돌하는 역사의 격랑을 지나가고 있습니다....우리가 스스로 시대의 희망을 창조해야 합니다.....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실현할 국민후보를 내세워 15대 대통령 선거에 전력투구할 것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국민후보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등 민중의 희망이요, 민족통일의 등대이며 진보정치의 개척자입니다....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국민승리의 역사를 개척하고자 하는 이들, 수 십 년간 지속된 지배질서의 종식과 민주적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사람들, 분단과 냉전을 종식시키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 진정한 노동해방과 농민해방 국민승리를 기원하는 모든 사람들, 정의가 물결처럼 살아 숨 쉬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 이곳으로 달려와 함께 합시다.”
경과보고와 회칙통과를 거쳐 이제 추진위에서 준비위로 발족하는 국민승리21의 위원장선출이 있었습니다. 준비위원장으로 권영길, 이창복, 고영구(변호사)가 선출되었습니다. 국민승리21(준)의 사업계획을 통과시킨 후 국민후보 선출에 관한 건이 상정되었습니다. 8월 18일 국민승리21건설과 국민후보 추진을 위한 선언자대회에서 구성된 국민후보 추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고영구 변호사가 단상에 올라 왔습니다.
“국민후보 추천위원회는 지난 9월 1일 회의를 통하여 지난 총파업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국민후보로 추천하기로 하였습니다”
발표 직전 엄숙하고 조용하던 회의장에 갑작스럽게 환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모두 일어나 '권영길'을 연호하는 가운데 권영길 위원장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특유의 꾹 다문 굳은 표정, 긴장과 흥분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50년간의 부패정치, 지역정치를 청산하고 진정한 민주. 평화. 평등의 정치를 실현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는 이 역사적인 자리에서, 가진 자들의 대통령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대통령이 되기 위해 동지들의 결정을 엄숙히 받아 들이겠습니다.....우리가 만들려는 사회는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사회,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경제, 국민 모두가 일하는 사회, 국민 모두가 분배받는 사회, 이것이 바로 제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루려는 사회입니다.....우리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정치를 실현하면, 우리 모두가 노동의 진정한 기쁨을 알게 되면, 우리 모두가 분배 정의를 위해 앞장서면 바로 이러한 사회는 우리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저는 동지 여러분이, 아니 국민 여러분이 제게 부여한 이 신성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저의 모든 것을 바쳐, 제 모든 신명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우리의 굳은 믿음과 강철 같은 단결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
김영수(전문노련 조흥시스템 노조)의 결의문 낭독을 끝으로 대회는 끝이 났습니다. 마침내 진보진영의 새로운 정치가, 노동자 중심의 노동정치가, 그러나 숱한 실패의 역사를 거쳐 온 계급의 정치가 다시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진보정치운동에 있어서 처음으로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을 중심에 세우고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대장정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노동자들을 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차는 다음 정거장이 어딘 지도 모른 채 그렇게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출발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5월 29일 정치위원장을 맡고 3개월 남짓 동안 맨 땅에 헤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저의 마음은 참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우리 진보정치 운동의 전사(前史)는 생략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서인노, 인민노련을 통해 시작된 노동정치, 계급정치에 대한 고민도 민중의당, 한겨레민주당, 민중당, 사노맹 그리고 한국사회주의노동당(한사로)과 한국노동당의 진보정치를 위한 그 험난한 여정의 이야기들은 천천히 하기로 하겠습니다. 민중당의 붕괴와 이어진 진보정당추진위(진정추), 민중정치연합(민정연), 사추위 그리고 진보정치연합처럼 당 건설을 중심에 놓고 진보정치운동의 맥을 안간힘을 다해 이어 오던 정치조직에 대한 이야기나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노운협), 전국노동운동단체연합(전국노련)처럼 노동자 정치운동의 영역을 확장해 가던 노동정치조직에 대한 이야기도 다음에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정치, 노동자 정치를 위한 무수한 도전과 시련, 그리고 그 속에서 맛보아야 했던 숱한 실패가 국민승리21의 토대였으며 오늘 우리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뿌리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잊지 말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후 비약적으로 성장, 발전해 온 민주노조운동은 95년 11월 민주노총 건설을 통하여 비로소 민주노조운동의 단일한 전국적 구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개된 민주노조운동은 권력과 자본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통하여 사업장의 경제투쟁의 영역을 넘어 계급성과 사회변혁성을 토대로 권력과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과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정치운동으로 그 의미를 확장해 왔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노동자.민중권력의 창출과 우리 사회의 변혁과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한국민주주의와 노동자.민중정치, 김세균, 도서출판 현장에서 미래를)이라 정의할 때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의 투쟁은 일면 노동자의 새로운 정치운동이자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의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이 노동자.민중의 권력창출을 본질적인 목표로 둔 본격적인 정치투쟁이었는가 생각해 보면 이는 또한 일면으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면적인 과정이라고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전노협의 투쟁이 정치투쟁으로 확장된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정치투쟁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평가 또한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노협이 주도하던 민주노조 운동에 대하여 그 변혁성과 치열한 정치투쟁에 대하여 평가합니다. 이 평가는 일면 진실이기도 하지만 일면 자의적이고 과도한 평가입니다. 물론 이렇게 전노협의 정치투쟁의 의미를 축소 평가하는 것은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 특히 계급적 관점과 변혁적 사상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 중의 하나가 민주노총의 개량적 성격으로의 변화와 현재의 한국노동운동의 추락이 바로 전노협 정신 계승의 실패로부터 기인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한국노동운동의 계급적 부활을 고민해야 되는 지금의 조건에서, 전노협의 변혁성과 계급성, 그리고 치열했던 정치투쟁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신중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매우 몰계급적이고 개량적인 입장이라고 비판받기 십상입니다.
전노협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조운동의 전체적인 이념과 노선에 대한 논쟁, 그리고 민주노총 건설에 대한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평가는 다음에 이야기 합시다. 그러나 오늘 적어도 국민승리21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전노협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총 이전의 노동운동에서의 정치세력화와 정치투쟁에 대한 평가는 불가피합니다. 경제적 요구에 근거한 전투적 조합주의, 주객관적 정세와 결합하면서 전화된 정치투쟁, 구체적인 정치적 요구나 사회변혁을 위한 계급적 요구에 근거하지 않고 선언적인 구호에 그친 정치투쟁, 노동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 사업의 부재 혹은 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신중한 태도. 전노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주노조운동을 정치투쟁 혹은 정치세력화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때 그 투쟁의 본질적 의미를 새겨보아야 할 평가입니다.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이 본격적이고 전면적인 정치투쟁이나 사회변혁투쟁을 실천적으로 진행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자 당시 노동자의 현실적인 조건에서 출발한 민주노동운동의 경제투쟁에 뿌리를 둔 전투성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 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하는 것은 이 시기 전노협이 보인 정치투쟁의 형태나 정치조직운동에 대한 입장, 그리고 보수야당에 대한 태도나 주요한 정치적 격변기에 나타난 탈계급적 정치방침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전노협은 정치운동 조직과 분명하게 거리를 두려고 했습니다. 전노협은 민중당의 창당과정에서 정치조직운동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전노협의 간부의 참여는 개인참여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정치세력화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90년 4월 전노협 4차 중앙위). 물론 이 같은 입장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혼재되어 있는 대중조직의 조건이라는 측면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전노협의 정치활동에 대한 소극적 인식이 그 기반에 있다 할 것입니다. 전노협은 사노맹에 대해서 철저하게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하였고 이후 여러차례 조직되는 각종 정치조직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사회변혁을 위한 사회주의 정당운동의 과정에서 독일의 노동조합이 보였던, 투쟁적이기는 했으나 개량적인 조합주의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합니다. 혹은 반대로 전노협이 대중운동이 정치활동에 간여하거나 주체로 나서는 것이 계급운동의 관점에서 매우 개량적이라고 보아서 그랬다면,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일체의 정치조직 운동을 배격하고 노동자 중심의 정치투쟁, 노동조합을 통한 총파업 투쟁으로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생각한 프랑스의 조합주의(생디칼리즘)를 떠 올리게도 합니다. 그것이 어떤 사상적 배경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든 전노협이 정치적인 세력화와 정치투쟁에 한 발을 빼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아울러 민주노조운동의 과정에서 맞닥뜨린 중요한 정치적 시기마다 전노협이 결정한 몇 차례의 정치방침도 이런 입장이 견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0 91년 지방선거에 대한 입장
민자당 심판을 위한 대중투쟁과 노동탄압 폭로의 선전장으로서 선거공간을 활용하면서 역량이 되는 지역에서 지노협 차원에서 후보를 출마시키고 지원한다.
0 92년 총선방침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의 요구를 정치쟁점화 하는 일을 최우선 목표로 하고 후보전술로서는 노동자 또는 민주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선거연합을 구성하되 반민자당 전선의 구축을 전제로 하고, 선거연합 구성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민중진영과의 선거연합을 선차적으로 하고 부차적으로 야당과의 연합을 시도한다.
0 92년 대선방침
민주노조 진영의 통일과 발전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성과있는 활동을 전개한다. 합법선거 공간에서 노동법을 비롯한 각종 노동현안을 정치쟁점화하고 이를 위해 투쟁한다.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이 가졌던 정치투쟁과 사회변혁 투쟁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의 방침에서 변혁성과 계급성을 중심적인 이념으로 갖고 있다는 전노협이 신자유주의 지배의 동맹자인 야당과의 선거연합을 주요 방침 중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 방침 어디에도 노동자.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지도 않고 노동자 계급을 정치적인 세력기반으로 구축한다는 계획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방침은 중요한 정치적 시기에 노동자의 당면요구를 쟁점화한다는 방침은 있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변혁적 요구를 걸고 있지도 않습니다.
전노협은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 ‘노동해방’이라는 구호와 이념적 방향을 설정한 것과 별도로 노동자의 계급에 기반한 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투쟁하였습니다. 파쇼적 지배와 신자유주의의 엄혹한 통제는 이런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와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비타협적 전투성을 바탕으로 한 경제투쟁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총자본과의 전면전의 양상을 보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계급투쟁과 정치투쟁의 성격으로 전화되었습니다. 전노협의 투쟁이 이런 투쟁의 모습으로 전화되었다고 해서 전노협의 활동 그 자체가 구체적인 정치투쟁이나 혁명적인 활동으로 나아갔다고 평가하는 것은 조합주의(생디칼리즘)에 근거한 평가입니다.
전노협이 주요 투쟁과제로 ‘민자당 해체’나 ‘재벌해체’를 상정했다고 해서 이 평가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평가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전노협의 투쟁과 활동에서 이를 관철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과 대중투쟁이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대부분 전노협의 투쟁과제는 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한 연대전선의 구축과 공동투쟁을 통해 전개되었고 정치적 요구는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정치적 요구 그 자체를 위해 대중조직으로서 구체적인 실천투쟁을 조직해 갔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투쟁과정에서 단 한 번도 정치적 요구, 혹은 반자본주의적 사회변혁 그 자체에 근거한 총파업을 벌인 적은 없었습니다. 전노협의 변혁성과 계급성이 곧 치열한 정치투쟁으로 평가되거나 정치세력화의 과정으로 확대 해석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전노협의 활동은 비타협적 투쟁을 바탕으로 한 전투적 조합주의라는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활동이 비록 그 출발이 경제투쟁에 있었다 하더라도 자연적으로 연대성, 계급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변혁투쟁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변증법적인 결합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런 전노협 투쟁의 성격을 노동자 정치운동의 전면적인 확대로 해석하는 것 또한 대중조직인 노조활동을 지나치게 확장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노동조합운동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생디칼리즘을, 한편으로는 경제적 조합주의를 경계하면서 레닌과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노동대중의 자발성은 사회(민주)주의 의식, 사회주의 정치로 나아갈 수 없으며 경제주의에 머무르기 쉽다. 따라서 그러한 의식 및 정치는 노동계급의 전위인 (사회주의)당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하며, 이 당이야 말로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중심 핵이다.”(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 표현을 조금 바꿨음
“노동계급 운동의 자생적인 발전은 그것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속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자생적인 노동계급 운동은 (노동)조합주의이기 때문이다.....그리고 (노동)조합주의는 부르주아에 의한 노동자의 이데올로기적 예속화를 의미한다”(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조합투쟁은 노동운동의 직접적인 이해를 포함하지만 사회변혁(사회주의) 투쟁은 미래의 이해를 포함한다.....노동조합은 단지 다양한 집단의 이해와 노동운동발전의 한 단계만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당과 노동조합과의 관계는 전체에 대한 부분의 관계이며.....당과 노동조합의 동등한 권위 주장은.....노동조합주의 그 자체의 본질과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노동조합의 역할을 오해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전노협은 90년에서 91년의 민중당을 중심으로 진행된 진보정당운동에도, 그리고 92년의 민중후보운동에도 시종일관 조합주의적인 관점을 유지하였습니다. 대중운동의 측면에서도 가장 폭발적인 고양기였던 이 시기에 전노협은 구체적인 정치투쟁의 실천을 만드는 일에도,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세력화하려는 시도도, 대중운동의 한계를 넘어 사회변혁을 본질적으로 이룰 당 건설운동에도 소극적이었습니다. 변혁운동의 이념적 잣대에 비추어 보면 조합주의에 근거한 개량적인 입장이거나 아니면 생디칼리즘에 근거한 비과학적인 좌편향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이 때, 계급성과 변혁성을 지향했던 비타협적 전투성을 기반으로 하여 전노협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전면적인 실천에 나섰다면 한국의 계급정치운동은 상당한 정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런 전노협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신중한 입장 혹은 개량적 입장은 97년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노협을 조직적으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금속연맹이 보인 소극적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95년 민주노총의 창립 이전 민주노조운동의 노동자 정치운동은 매우 제한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울러 선진노동자나 진보적 지식인, 정치운동의 활동가들이 주도해 왔던 정치운동 또한 민중당의 실패와 92년 민중후보 운동 이후의 분열로 인하여 이렇다 할 정치 세력화를 만들어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둘러 싼 조건은 사업장의 노사관계를 넘어 노자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회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변혁을 끌어내지 않고는 권력과 자본의 전면적인 공세를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으로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권력과 자본은 88년 말 노태우의 ‘민생치안에 관한 특별지시’를 시작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과 탄압을 전면적으로 퍼부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임.단투를 매개로 한 연대투쟁과 노동운동탄압저지를 위한 격렬한 가두투쟁등으로 맞섰고 노동법 개정투쟁 또한 치열하게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은 본질적으로 사업장을 기반으로 공동투쟁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고 정치투쟁의 성격을 갖는 투쟁은 산발적이고 일시적인 투쟁의 성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 선 93년부터 권력과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통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체제의 구축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고통분담론, 세계화, 국가경쟁력 강화 등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한 노동운동의 분할, 고립전략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자본의 전면적인 사회통제를 획책하는 신자유주의적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업장의 공동투쟁을 통한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투쟁이나 노동 기본권 투쟁은 이러한 권력과 자본의 지배하에 포위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민주노조운동은 조직적으로는 강력한 노동운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민주노조 총단결운동을 통해 ILO 기본조약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 공대위)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해 나갔고 투쟁의 방향과 과제로서 사회개혁적 요구를 직접적으로 제기하고 사회개혁투쟁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개혁투쟁 또한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의 조건속에서는 구체적인 실천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투쟁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의 의지를 거세하고 체제내속에서 개량적인 요구를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변혁성을 탈각시킨 투쟁이라는 비판이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또 한 측면에서 이 투쟁은 노동운동의 역할을 스스로 확장하고 정치적인 활동의 장을 공식화 시켰다는 점에서, 대중조직이 사회변혁의 실천적인 과제로서 구체화된 요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비록 초보적인 활동의 수준이지만 이 요구자체를 위해 대중동력을 기반으로 한 실천을 만들어 갔다는 점에서 평가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투쟁의 성과와 한계는 그 자체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의 출발이기도 하였습니다.
민주노총은 창립과 함께 민주노조 총단결의 조직형태의 완료로서의 산별체제의 구축과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한 전면적이고 본격적인 대응을 위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중요한 2대 과제로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관련하여 창립 이후 2개월이 지난 1996년 1월 26일에 열린 2차 중앙위원회에서 중앙정치위원장을 선임하여(배석범 수석부위원장) 정치사업에 대한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대중조직으로서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정치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96년 1년 동안 정치위원회는 사실상 이렇다 할 정치사업을 추진하지 못하였습니다. 각 연맹별, 지역본부별 정치위원회 구성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부 연맹과 지역본부에서 정치담당자 정도를 선정한 정도였습니다. 대중적 기반에 근거한 조직적 체계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업은 더욱 지지부진 하였습니다. 96년 총선과 관련 노동자후보에 대한 지원사업과 총선과정에서 노동자 정치활동선언, 그리고 정책요구사항에 대한 정책토론회등을 개최하였지만 대중적인 사업으로 전개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마저도 96년 6월 이후에는 현안사안에 쫒기며 정치위원회 활동은 전면 중단되었고 정치사업은 사실상 휴면상태로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의 정치활동은 대중조직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사업에 나섰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가질 수는 있었지만 정치세력화가 구체적인 대중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정치위원회라는 조직적 체계조차 수립하지 못하였다는 점, 정치활동이나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해 이념적 방향 조차 수립하지 못했다는 점, 선거중심활동에 그치면서 대중적 정치 투쟁은 부재했다는 점 등에 비추어 정치세력화의 의미있는 출발로 보기조차 어렵다 할 것입니다.
이런 민주노조운동의 정치활동 혹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 낸 것은96-97의 민주노총 총파업이었습니다. 노동법 개정투쟁은 그야말로 정치적 요구 그 자체를 바탕으로 진행된 총파업이었습니다. 이는 우리 노동운동사에 몇 개 안되는 본격적인 정치파업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총파업의 의의와 한계는 따로 다시 이야기하더라도 이 총파업이 조합원의 정치의식을 각성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자간의 대립의 본질과 국가권력의 본질을 확인시킴으로서 노동운동의 사회변혁운동으로의 확장을 인식하도록 하였으며 정치세력화에 대한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고양시킨 것 만큼은 분명하였습니다.
따라서 97년에 전개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활동은 바로 이러한 87년 이후 성장해 온 민주노조운동의 대중적 기반과 투쟁력, 그리고 총파업을 통해 강화된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각성과 역량의 결집에 기반하여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점이 97부터 본격화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이전의 진보정치 운동의 과정이나 조직적 기반과는 명백히 다른 지점이라 할 것입니다.
총파업 투쟁이 종료되고 97년 3월 14일 민주노총정치위원회는 97년 1차 정치위원회를 개최하여 97년 정치사업 방침(안)을 수립하고 이를 3월 27일 임시대의원대회에 상정하였습니다. 이는 이후 진행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사업의 최초의 기본방침이었습니다. 대의원대회에서 결정된 정치방침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가 적극 참여하고 각계 각층의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세력이 함께 하는,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실현하고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은 98년 지자체선거 대거 진출 - 98-99 정당 건설 - 2000년 국회 원내 진출을 목표로 하는 정치세력화 사업을 힘차게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대중 조직이 정당건설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나섰다는 의미있는 결정에 걸맞는 분위기와 열정은 대의원대회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당위성에 근거한 매우 추상적인 동의이거나 나쁠 건 없다는 소극성, 혹은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등이 적당히 버무려진 결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 방침의 결정은 사실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역량을 기반으로 정치세력화를 전면화 했다는 점과 이후 진행되는 모든 정치세력화 사업의 근거로 작동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3월 27일의 임시대의원대회 결정을 근거로 정치위원회는 적극적인 사업에 나섰습니다. 그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던 연맹별, 지역본부별 정치위원회 구성을 독려하여 일정한 조직적 기반을 구축하였고 정치설문조사, 연맹 순회 간담회, 정치위원회 수련회 등을 개최하였습니다. 일정한 관심과 논의들이 모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주요한 관심은 97년 대선에 노동운동이 독자적인 후보를 낼 것인가로 집약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난 이는 정치세력화 추진에 있어 오히려 그 본질적 의미를 흐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민주노총 정치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주체들, 배석범 정치위원장을 비롯한 정치위원회는 선거에 대한 대응을 지나치게 중심에 놓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5월 7일에는 ‘정치세력화와 대선’이라는 주제로 연맹과 지역본부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토론회(기조 발제 : 이근원 전문노련 조직국장, 토론자 : 박희석 민철노련 정책실장, 이수봉 현총련 사무차장)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토론회에서는 국민후보론, 민중후보론, 범야권 단일후보론 등의 논쟁과 정당건설 경로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정치위원회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정당건설과 국민후보를 통한 97대선 적극참여, 정치실천단 조직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자정치세력화와 97 대선방침(안)’을 5월 29일 7차 중앙위원회에 제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안건은 격론 끝에 좀 더 많은 토론과 의견수렴이 필요한 바 차기 중앙위에서 다시 심의하는 것으로 유보되었습니다.
이날 중앙위에서는 그동안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을 둘러싸고 잠복하고 있었던 논의들, 비단 대중조직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근본적인 논의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적극참여와 신중론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그 속내는 훨씬 복잡하였습니다. 이제 97년 정치세력화를 놓고 벌였던 초기 논쟁의 주요 지점들을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저의 1997년 다이어리에 남아 있는 발언 기록입니다.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보다 자신있는 추진이 필요하다. 정치방침의 구체적인 결정이 그래서 필요하다. 더 이상 방침결정을 미루지 말자.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국민후보 운동이 적절하다.”(충북본부, 배창호)
“임.단투의 전선구축이 곧 정치세력화의 과정이다.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방침이전에 투쟁을 통해 실천하는 가운데 정치방침은 나중에 결정하자.”(김명희, 민철노련)
“민주노총의 독자후보인 노동자후보나 민중후보는 조합원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사회개혁투쟁에서 제시된 12대 요구사항을 가지고 막판에 정책연합을 할 수는 있다고 본다. 우선 시급한 것은 조합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다. 설문조사하자.”(언론노련, 이형모)
“정치세력화는 중장기 목표속에서서 진행되어야 한다. 노동조합의 당면과제인 산별노조건설과 미조직사업장의 조직화가 더 중요하다. 천천히 가자. 중장기적으로 바라보자.”(병원노련, 김유미)
“그동안의 정치세력화의 실패는 대중적 기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화는 다른 시도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데 이의는 없지만 그렇다고 방침결정을 또 미루면 사업집행을 할 수 없다. 김대중으로 정권이 교체되면 노동자에게 무엇이 달라지는가? 정치세력화는 현실을 돌파하려는 의지의 문제이다.”(전문노련, 이근원)
“정치세력화와 대선참여에 동의하나 다음과 같은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정치세력화와 노동조합의 대중투쟁을 별도로 사고하는 현재의 정치위원회의 사업 추진방식의 문제, 정당건설경로를 달리하는 세력. 민중후보운동을 고민하는 세력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성급하게 민주노총 중심으로만 사고하지 말고 모든 세력이 함께 갈 수 있도록 열어야 한다. 아울러 전국연합이 김대중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 여지를 미리 닫지 말자.”(전문노련, 고영주)
“대선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대중의 동력을 최대한 구축해야 한다. 가능한가? 후보는 조합원을 결집하기 위하여 필요하기는 하다. 그런데 어떤 후보여야 하는지는 판단이 안 선다. 국민후보, 범야권후보, 민중후보에 대하여 내부논의중이다. 아직 조직내부의 합치된 견해가 없다.”(금속연맹, 심상정)
“가장 시급한 것은 조직내의 합의를 이루는 일이다. 이 작업을 우선 빨리 시작해 달라. 이를 위해서는 지도부의 지도력이 중요하다. 여론수렴도 필요하지만 방침 없이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대전충남본부, 이용길)
이날 5월 29일의 중앙위원회는 사업계획 토론에 앞서 정치위원장을 새롭게 선임하였습니다. 당시 전문노련 위원장을 맡고 있던 저에게 정치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온 것은 중앙위원회가 열리기 약 일주일 전 이었습니다. 권영길 위원장은 저에게 현재의 정치사업의 부진을 해결하고 복잡한 논쟁의 지형속에서 의견을 모아 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실적으로 현직 연맹위원장이 다른 일도 아닌 산 넘어 산일 수 밖에 없는 정치위원장을 맡는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저는 그 활동이 지지부진 했지만 총파업 이후 다시 재개된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서 여전히 노개위 위원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능하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뜻밖에 전문노련 중집은 현재의 조건에서 정치세력화의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연맹위원장의 정치위원장 겸직을 강력하게 권고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저의 등을 떠민 것은 조직쟁의국장 이근원이었습니다. 십수년간 노동자 정치운동을 해왔던, 전문노련에 들어 온 것은 잠시 운동을 쉬고자 해서 들어 왔다고 이야기 했던 이근원은 뜻밖에 대중운동의 공간에서 자신이 그동안 열정을 바쳤던 정치운동의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정치위원장을 수락하면서 정치활동과 관련된 이근원과의 길고 긴 동행도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위원장을 수락하면서 제가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은 하나였습니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루어야 한다. 과거처럼 선거가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는 관행이 또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선거 후에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행군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대중적 토대를 반드시 구축해야 한다. 그것은 노동자 대중, 민주노총의 조합원이 대중적으로 결의하고 참여함으로서 대선의 결과와 관계없이 다시 일어서 전진할 수 있는 노동자의 정치부대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나섰는데도 또 실패를 반복한다면 언제 다시 노동의 정치를 만들 수 있을까?
정치위원장으로서 중앙위를 마치고 나서 암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우선은 주문한 대로 의견수렴을 거쳐 6월 중앙위에 제출할 안건을 다시 정리해야 했습니다. 안건을 다시 정리하는데는 만만치 않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정치방침이 대중투쟁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선거중심으로 접근한 부분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확실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개혁정당 건설로 비판받을 수 밖에 없는 당 건설의 기조와 경로도 수정이 불가피했습니다. 국민후보라는 말이 주는 개량적 이미지를 보완하여 민중후보의 변혁성을 한편으로 담고 한편으로는 각계 각층의 정치세력을 통합하는 의미로서의 국민후보의 확장된 의미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쉬운 문제가 아닌 것이 민주노총내에는 기존의 정치방침에 대한 지지와 선호가 훨씬 더 컸던 것이 현실이었고 외부의 정치세력과의 연대라는 측면에서도 민주노총이 사회의 민주적 개혁이라는 정도의 수준을 넘는, 즉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본질적인 혁파를 중심에 놓는 정치방침을 결정하는 것은 민주노총내의 일부세력만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행보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정치방침하에서 소위 좌파 정치그룹이 계속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조건은 큰 흐름을 형성하는데 매우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정치세력화에 대한 유보나 반대 혹은 김대중 지지의사를 노골적으로 갖고 있는 민주노총내의 세력을 설득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정치방침을 조율하는 문제와 함께 당면한 사업은 민중.민주세력을 결합하여 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대선대응기구를 만들어 가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민주노총 밖에서는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과 대선대응을 위하여 몇가지 갈래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92년 대선에서 민주대연합 방침에 의거 김대중을 지지했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97년 2월 22일에 열린 6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방침을 결정하였습니다.
1. 민족민주운동세력의 힘을 결집시켜 민주개혁과 자주적 평화통일을 추진해 나가는 책임있는 정치세력으로 거듭나고자 민족민주진영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위해 노력한다.
2. 민족민주운동진영의 단결과 민주적인 정권교체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3. 전국연합은 민주노총 등 민주주의와 사회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제 세력들과의 합의를 바탕으로 ‘우리후보’방침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상호모순적인 결정이었고 이는 전국연합의 내부논쟁을 봉합한 결정에 불과했습니다. 이 당시 전국연합의 다수는 범야권단일후보를 통한 정권교체에 무게를 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조건 속에서 87년, 92년으로 이어져 온 야당에 대한 비판적지지를 또 다시 정치방침으로 결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또 연합내부의 일부 그룹을 중심으로 그동안의 정치노선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민족.민주그룹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흐름이 형성되면서 연합의 정치방침은 이를 봉합하느라 매우 중의적(重意的)인 의미를 담는 정치방침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방침에 대하여 일부는 우리후보가 최종적 범야권 단일후보라고 해석하였고 일부는 독자후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연합내부의 어정쩡한 태도는 그 후에도 1년내내 계속되었고 나중에는 전국연합의 갈등으로 확대되어 갑니다. 6월 14일 대의원대회에서 전국연합은 우리 후보는 곧 국민후보라는 입장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어쨌든 전국연합은 표면적으로는 민주노총과의 합의를 통한 우리후보 운동을 결정함으로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운동에 참여하는 한 주체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현재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선 민중후보운동과 이를 통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즉각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민주노총내의 일부 그룹과 한국노동청년연대(한청련), 그리고 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민교협)의 일부와 노동이론정책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활동가와 지식인 그룹이 주도하였습니다. 이들은 보수정권과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저항을 분명히 하는 투쟁을 조직해 나가고 이를 기반으로 대선과 정치세력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매우 개량적인 정치방침이므로 같이 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었습니다. 이 흐름은 8월경에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준)(정치연대)’로 발전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진보정치연합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독자후보로서의 국민후보운동을 사실상 최초로 제안한 그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보수정치의 통제를 벗어난 모든 정치.사회운동세력과 시민.종교세력들이 앞장서는 국민후보를 주창하고 이를 발판으로 정당건설에 나서는 정치세력화의 과정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그룹은 노동자중심이라는 대중적 기반을 부정하지 않되 민주개혁이라는 그림속에서 선거와 의회정치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추진과는 다소의 차이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진보정치연합은 한때 노회찬 등 일부인사가 민주당으로의 방향전환을 추진하기도 했다는 약점과 대중적인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중당 이후 진보정치운동의 맥을 이어 온 세력이고 또 그만큼 경험과 정치활동가들을 축적하고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진보정치연합은 7월 6일 대의원대회에서 공식적으로 국민후보운동을 민주.진보세력과 함께 전개해 나간다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외에 지식인을 중심으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대체적으로 후보와 관련해서는 범야권 단일후보론과 독자후보론으로 나뉘고 있었고 정치세력화와 관련해서도 적극참여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 갈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이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고 대선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영남노동운동연구소를 중심으로 정치조직화를 위한 최소한의 물적 기초를 갖고 있지 못한 조건에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추진은 산별조직화의 진전이 일정한 정도 이루어진 뒤로 미루어야 한다는 비판적 견해가 제출되기도 하였습니다(임영일, 연대와 실천, 97년 5월호). 이는 민주노총의 최대 연맹인 금속연맹의 입장과 일정한 정도 궤를 같이 하는 의견이기도 하였습니다.
내부를 통합할 정치방침의 수립과 민중민주세력의 결집을 통한 정치세력화의 초동주체 형성이 당장에 해결해야 될 과제였습니다. 중앙위의 토론과 복잡한 안팎의 사정을 고려한 고민속에서 6월 9일 정치위원회에 민주노총정치위원회 사업계획(초안)이 토론자료로 제출되었습니다. 초안은 제가 제출하였습니다. 위에 열거한 조건 때문에 기존의 정치방침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부를 수정하고(‘대중적 합의’라는 문구를 삽입하고 ‘국민후보’를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후보’로 바꾸는 등) 정치방침에 비어 있거나 내용상 대중투쟁과 유리된 부분을 ‘정치방침 수립의 전제가 되어야 하는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보완하여 제출하였습니다. 이 초안은 정치위원회의 토론과 조직별 순회간담회를 거쳐 일부가 수정되었지만 사실상 원안대로 6월 19일 8차 중앙위원회와 7월 24일 6차 대의원대회를 거쳐 확정됩니다. 이 초안은 이후에 진행되는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의 기본이념과 사업방침이 되었는 바 그 내용을 한 번쯤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 방침수립을 위한 전제(요약)
o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대선논의는 정치세력화라는 장기 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전술적 지점에 불과하다.
o 노동자정치세력화는 97 임.단투승리와 노동운동탄압분쇄, 노동법개정 투쟁이라는 노동운동의 당면과제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산별노조 건설을 추동하고 신자유주의의 지배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안모색이라는 관점을 견지하여야 한다.
o 대중사업과 정치사업을 분리하여 민주노총은 대중투쟁 사업에 전념하고 정치위원회는 이런 투쟁을 기반으로 대중에 기반한 정치세력화를 조직하고 밖으로는 민중민주세력과 정치세력화의 틀을 추진한다.
o 모든 정치방침은 민주노총의 공식 회의기구를 통해 결정한다.
o 민주노총은 노동자정치세력화와 관련된 장기적인 방침이든 대선방침이든 민주노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모든 민중민주세력과 연대한다는 열려진 인식속에서 사업을 추진한다.
2. 정치방침(요약)
o 민주노총은 자주적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96년말 총파업투쟁을 통해 형성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는 한편 노동운동의 당면한 투쟁과 과제를 수행하여 노동자의 정치적 지위 향상을 위해 새로운 정당건설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강력히 추진한다.
o 민주노총은 대중적 합의를 바탕으로 노동자가 적극 참여하고 각계 각층의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세력이 함께 하는,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실현하고 노동자의 이익과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은 98년 지자체선거 대거 진출 - 98-99 정당 건설 - 2000년 국회 원내 진출을 목표로 하는 정치세력화 사업을 힘차게 전개해 나간다.
o 민주노총은 전국연합등 민족민주진영과 각계 민주세력과의 합의를 바탕으로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새로운 정당건설의 조직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하여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후보를 만들어 낸다. 이 후보와 관련해서는 민주노총이 제시하는 민주개혁의 상과 내용에 동의하는 전제 위에 모든 정치세력을 포함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o 민주노총은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후보를 만들어 민주개혁세력과 공동으로 선거대책기구이자 향후 정당건설의 기초가 될 새로운 정치조직 구성의 논의를 제안한다. 민주노총은 대중적 합의를 기반으로 조직의 인적 물적 역량을 최대한 집중하여 다양한 정치사업을 전개한다.
o 공동선거대책기구에서 후보를 결정할 때에는 그 이전에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이에 관한 민주노총의 입장을 결정한다.
이러한 방침에 대하여 소위 좌파 정치를 주장하는 그룹들은 일정하게 민주노총의 정치방침 변경에 대하여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평가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입장은 여전히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탈변혁적, 탈계급적이라는 점과 1기 민주노총 지도부가 내세웠던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개량적인 운동이라는 점, 정치세력화를 지나치게 선거주의, 합법주의, 의회주의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비판이 있었지만 민주노총은 이런 방침을 통하여 일정하게 조직내부의 이견을 조율하고 본격적으로 정치사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민주노총 정치위원회는 내부적으로 조합원 정치의식 설문조사, 조직별 순회간담회, 정치교육, 정치실천단 조직화, 정치토론회 등을 추진해 나가면서 정당건설의 토대 구축과 대선대응을 위한 공동대책기구의 구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습니다.
공동대책기구를 위한 논의의 시작은 6월 14일 국민후보운동을 위한 실무 모임을 구성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주요 단위는 민주노총,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을 중심으로 시민사회.환경운동.문화예술단체 등이었습니다. 이어 6월 26일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대표단 연석회의에서 공식적으로 공동선거대책기구 구성을 결의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후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은 공동선거 대책기구에 모든 민중.민주운동 세력이 총집결할 수 있도록 간담회와 설명회, 토론회, 사회각계의 원로회의등을 개최해 나갔습니다. 이런 사업들을 통해 국민후보운동 추진기구라는 이름으로 활동이 시작되었고 7월 25일에는 마포구 도화동의 삼창플라자라는 건물에 사무실을 마련하였고 각 조직이 파견한 실무자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민주노총 정치위원회는 대의원대회의 결의(인적, 물적 역량의 지원)에 근거하여 공동선거대책기구에 상근할 실무역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만만치 않았습니다. 개별적으로 연맹과의 간담회 등을 통해 대의원대회에서의 상근파견 원칙을 확인하고 파견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노동조합 일이라는 것이 한 사람이 빠지면 티가 확 나는 것 일진데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실무역량은 전국연합과 진보정치연합에서 파견한 활동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향후 이 운동이 현장의 노동계급대중과 유리되고 노동자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어렵게 할 지 모르겠다는 걱정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이후 활동의 과정에서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민주노총은 초기에 단 3명의 상근자만을 파견하였습니다. 전문노련의 이근원, 대학노련의 김은주, 그리고 서울본부의 김진억이 그들이었습니다.
국민후보운동 추진기구는 8월 4일 임시운영체계를 마련하고 그동안의 활동을 모두 모아서 8월 18일 ‘국민승리21 건설과 국민후보 추진을 위한 500인 선언대회’를 개최하고 이 자리에서 국민후보운동 추진기구의 명칭을 정식으로 ‘국민승리21 추진위’로 확정하는 한편 운영위원회와 집행체계를 공식화 하였습니다. 아울러 50명으로 구성된 국민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이 때 구성된 운영위원회와 집행체계를 살펴 보겠습니다.
공동대표 : 권영길, 이창복
운영위원장 : 이창복
운영위원 : 권영길, 이창복, 천영세(전국연합 공동의장), 고영구(변호사), 박순보(전교조), 장기표(신문명연구원), 김금수(한겨레 논설위원), 김진균(서울대 교수), 김영대(민주노총 사무총장), 김용태(민예총 사무총장), 조영건(4월혁명연구소 소장), 노회찬(진보정치연합 대표), 양경규(민주노총 정치위원장), 양재덕(전국연합 정치위원장), 유기흥(한청협 의장), 임종철(건약 회장), 최규엽(전국연합 정책위원장), 한충목(전국연합 사무처장), 배범식(민주노총 부위원장), 허영구(민주노총 부위원장), 정윤광(공노대 지도위원), 임성규(민주노총 서울본부장), 단병호(민주금속연맹 위원장), 조준호(자동차연맹 위원장), 이홍우(현총련 수석부위원장), 김국진(사무노련 위원장)
집행위원 : 한충목(총무팀장), 양재덕(조직팀장), 양경규(조직팀장), 노회찬(기획팀장), 임종철(홍보팀장), 최규엽(정책팀장), 유기흥(대변인)
노동자정치세력화와 97대선을 위한 준비체제는 이제 어느 정도 구축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견상 드러나는 준비와는 다르게 민주노총 조직내부의 상태는 좀처럼 분위기가 달구어 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정치위원장을 맡은 이후 이 시기까지 대략 40여개가 되는 산별연맹과 지역본부의 간담회는 물론 시협이나 지구협의회, 대공장 간담회, 그리고 순회 정치교육까지 거의 100회에 가까운 대중사업을 진행했지만 여전히 조직내의 분위기는 좀 처럼 잡히지 않고 있었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토대를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는 큰 고민거리 였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조직내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 특히 주요 조직의 지도부의 입장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은 이유가 컸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김대중을 통한 정권교체가 현 시기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라고 보는 견해가 조직내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니 일정한 정도 복무는 하겠지만 대선직전에는 최종적으로 야권 단일후보를 통한 정권교체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입장은 일정하게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권하에 있었던 조직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자동차연맹(위원장:조준호), 화학연맹(위원장:오길성), 전교조(위원장:정해숙), 현총련(의장:정갑득), 일부 지역본부(인천본부, 전북본부, 광주전남본부)에서 이런 경향성이 강했습니다. 또 하나의 경향성은 현재로서 민주노총이 본격적인 정치세력화에 나서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지금은 노동운동을 통한 당면과제의 해결 및 이를 통한 정치적 토대의 구축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견해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전노협의 활동의 전통이 남아 있는 조직들, 즉 민주금속연맹(위원장:단병호)과 일부 지역본부(대경본부, 부양본부, 경남본부), 그리고 병원노련(위원장:박문진) 등에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구조속에서 사업은 힘있게 진행되기 어려웠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부적으로는 정치위원회가 강력한 추진력으로 사업을 펼쳐 가면서 우선 정치세력화에 적극적인 조직들을 중심으로 민주노총 내부의 분위기를 잡아내고 밖으로는 민중민주세력의 총결집의 모양새를 만들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확인시켜 나가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치위원회의 실천력을 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정치위원회의 상근역량은 최철호 정치위원(전교조) 한 명 뿐이었습니다. 정치기획단을 꾸리고 매주 정치위원회를 진행하는 것으로 보완하였지만 제가 매고 있는 짐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전문노련 위원장으로서의 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당시 전문노련은 잘 나가는 연맹이었습니다. 조합원 약 3만 남짓에 불과한 연맹이었지만 당시 우리 연맹은 가장 역동적으로 사업을 벌려 나가던 연맹이었습니다. 그 만큼 연맹 위원장의 역할도 컸습니다. 당시 전문노련은 중앙 상근자가 8명에 상근하는 임원은 위원장밖에 없었습니다. 정치사업 때문에 연맹의 사업을 등한시 할 수도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더구나 연맹의 중심역량인 조직쟁의국장을 선거대책기구에 파견한 상황에서 연맹사업을 더 추슬러야 했습니다. 이 때 저의 하루 일정은 정말 매일 강행군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만큼 노동강도(?)에 시달린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다 전문노련의 3대 위원장으로서의 임기도 9월이면 끝나는 조건에서 차기 집행부 구성과 관련된 일도 정리해야 했습니다. 재출마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민주노총의 정치사업은 보다 강력한 추진력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꾸역꾸역 해나갔습니다.
이런 어려움속에서도 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또 하나의 사안은 소위 좌파 정치세력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향후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대선투쟁에 있어서 매우 관건적인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를 주도하는 그룹이나 공동선거대책기구의 분위기는 이 문제에 대하여 별로 심각하게 바라 보고 있지도 않았고 이 그룹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민주노총 조직내부의 흐름을 하나로 형성하는 데나 민중.민주세력 모두가 하나로 결집하여 정치세력화의 대장정을 출발함으로서 대선에서의 단일한 투쟁은 물론 이후 단일한 진보정당의 건설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더구나 일정하게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이념과 노선의 우편향을 우려하던 저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결합을 통하여 이런 흐름을 조율할 필요성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선 이들의 참여의 가능성을 열기 위하여 정치방침에서 연대의 대상을 확장시켜 놓았고 이들 그룹이 최소한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지나치게 우편향적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판단을 불식시키기 위해 정치방침의 전제라는 문건을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확실히 이런 일련의 일들이 전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그룹은 나름대로의 원칙과 방향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조직화작업을 해 나가면서도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변혁적, 계급적 관점에서 일부 진전된 부분이 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반드시 함께 하는 구도를 짜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이들과의 접촉에 나섰습니다. 당시 저는 지금과는 다르게 소위 좌파 블록으로부터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던 편이었습니다. 이는 그동안 제가 참여해 왔던 노개위의 활동과정에서의 평가도 한몫을 하고 있었고(물론 이들의 입장은 참가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총파업과정에서 전문노련이 보여 준 투쟁의 모습이나 정치위원장이 되고 나서 행한 몇 차례의 발언이나 입장도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 저는 어떤 정파적 활동에도 몸담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그나마 97년의 정치세력화 논의에서 얘기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듬해인 98년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세월이 지나 돌아보니 그랬던 것 같다는 것이지 정말 그랬었는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추측해 보는 겁니다.
정치위원장이 된 후 6월 22일 우선 노동이론 정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현장에서 미래를 이라는 월간지에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오해를 가능한 불식시키면서 함께 하자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어 7월 1일에는 단독으로 쳐들어가다시피 하여 오세철, 장임원, 김세균, 이종회 등이 참석한 지식인 연대와 간담회를 개최하여 공동선거대책기구의 합류를 적극적으로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급의 정치를 고민하는 여러분들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도 지금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나 현재의 선거대책기구의 구성으로 보면 이를 수정해 나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함께 힘을 보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노력하자. 계급의 정치, 노동의 정치가 되도록 해야 겠지만 이것만을 중심으로 출발해서는 넓은 연대를 구축하기 어려워 국민후보, 선거이야기도 할 수 밖에 없는 측면도 이해해 달라. 문제는 이 구조속에서 노동자 중심의 정치를 만들어 가는 것 아니겠는가? 대선은 과정이자 전술일 뿐이다. 좀 더 큰 전략을 같이 고민하자.”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들 그룹은 무엇보다도 지금 즉각적인 정치세력화를 추진해야 하고 그 중심에 민주노총이 서야 한다는데는 이견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영길 위원장에게 이들과의 접촉과 간담회를 적극 권유하였고 조직내에서도 이들 그룹과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한편 이들 그룹은 7월 19일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와 97대선방침 토론회를 시작으로 조직화 작업을 진행하여 8월 16일‘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준)(정치연대)‘를 발족하고 지역과 현장 순회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발족식에는 개인자격으로 오세철(대표), 장임원, 김영규, 김세균, 남구현 등이 함께 하였고 조직으로는 노진추, 노정연, 민의련, 전국노련, 진보민청, 한청연, 학생연대회의, 전학추본이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정치연대는 다음과 같은 정치방침을 채택합니다.
테제1 새로운 발걸음, 패배하지 않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룩하자
테제2 민주주의와 변혁운동의 중심으로서 노동자계급을 세우자
테제3 개량적인 노동운동을 극복하고 노동운동의 계급적 진전을 이룩하자
테제4 신자유주의 공세를 뚫고 스스로 세워내는 노동자.민중의 정치를 만들어 가자
테제5 대선투쟁은 노동자, 민중의 이해를 실현하는 투쟁의 공간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지형을 창출하자
테제6 노동자.민중의 이해에 기반한 정강정책을 갖고 자본과 정권에 맞서 사퇴하지 않는 노동자.민중후보운동을 전개하자
한편으로 정치연대와의 통합을 모색하면서 국민승리21은 조직의 정비와 대선준비를 위한 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9월 1일 국민후보추천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권영길 위원장을 국민후보로 추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권영길 후보에 대하여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국연합을 중심으로 이창복 의장을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민주노총 조직내부에서도 국민후보운동에는 동의하나 권영길 위원장이 후보가 될 때 민주노조운동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반대하는 흐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조건과 분위기로 권영길 위원장이 후보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회의결과에 대해 먼저 전국연합이 9월 4일 중앙위원회를 열어 추천위원회가 제안한 권영길 위원장의 국민후보추대에 동의하였고 민주노총은 지난 대의원대회에서의 결의, 즉 대선후보에 대해서는 대의원대회를 열어 최종 확정한다는 결의에 따라 9월 5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소집하였습니다.
9월 5일 대의원대회의 안건은 두 가지 였습니다. 1호 안건은 경제민주화와 고용안정쟁취를 위한 총력투쟁 건, 2호 안건은 국민승리21 추천 국민후보 승인 건이었습니다. 1호 안건을 처리하는데 약 4시간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하반기 총파업 투쟁을 결의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어서 권영길 위원장의 국민후보 승인 건이 상정되었습니다. 표결로 갈 경우 대략 6.5대 3.5 정도로 승인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토론에 앞서 권영길 위원장의 입장 발언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기 민주노총의 조직적 정비도 부족하고 하반기 총파업투쟁을 준비해야 하는 조건에서 후보로 출마하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조건에서 민중.민주운동의 절대적 과제인 정치세력화를 외면할 수 없는 조건은 본인의 책무이자 민주노총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동지 여러분들의 이해와 지지속에 힘차게 대선투쟁을 해나가기를 바라지만 최종적으로는 동지들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토론에 들어가도 발언이 없었습니다. 한 두 명이 지지 발언을 하였지만 좀처럼 반대의견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반대의견이 나오고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지만 회의는 곤혹스러운 침묵이 계속되었습니다. 반대의견을 재촉하던 권위원장은 정회를 선언했습니다.
정회 후 정치적 판단이 우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반대는 하지만 권영길 위원장이 출마한다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모호한 내용의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다른 소극적인 조직들, 김대중을 지지하는 그룹들 조차 이에 편승하여 적당한 줄타기가 가능한 발언이었습니다. 반대의 입장에 대하여 동의하는 부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차라리 대중적으로 토론하고 정확하게 결의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저로서는 앞으로가 걱정되기만 하였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누군가 만장일치로 결의하자는 제안이 튀어 나왔고 회의는 그렇게 철의 노동자 노래소리와 함께 만장일치의 결의로 권영길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승인하였습니다. 이날 회의에서는 민주노총이 모든 인적 물적 역량을 대선투쟁에 총력으로 집중한다는 결의(모금 목표:25억원)도 하였습니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오늘 9월 7일 국민승리21 준비위원회가 공개적으로 발족하게 된 것입니다. 이날 준비위 발족까지 결국 정치연대는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치연대가 발족된 이후 8월 18일 국민승리21 추진단위와 정치연대와의 공식적인 간담회가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원론적인 입장을 확인하는 수준이었습니다. 9월 1일에는 정치연대가 공문을 보내 왔습니다.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쟁취 등 투쟁하는 노동자.민중후보운동, 사퇴하지 않는 후보운동을 전제로 공동선거기구 구성을 논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9월 7일 발족식까지는 시간부족으로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였지만 이후 이 제안을 중심으로 정치연대와 협상을 진행하였고 10월 11일 합의문을 발표하고 결국 정치연대도 97대선투쟁에 힘을 합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국민승리21의 고난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중에 민주노동당으로 발전하고 의원 10명을 보유하는 정당으로 성장하기에는 이로부터 7년이 걸렸습니다. 그 때 제가 혹은 우리가 한 일이 잘한 일이었는지 못한 일이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분당까지 이른 지금의 상황속에서는 더욱 마음이 착잡하고 헷갈립니다. 오늘 정말 가슴 한 켠이 싸해집니다.
처음에 언급하기는 했지만 막상 쓰고 보니 자기중심으로 쓸 지 모른다는 처음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쓰다 보니 거론해야 될 지점이 한 두군데가 아니어서 길어 졌습니다. 일부 자료가 있었으나 주로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다소 틀리는 부분이 있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을 마감할 때 쯤 생각나는 부분이 새롭게 생겨나기도 해서 이야기를 다 못 한 것 같아 아쉬운 지점도 있습니다. 다음에 쓰지요.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두 번을 더 쓸려고 합니다. 국민승리 21의 활동과 97대선까지 한번 쓰고 이어서 97대선결과와 국민승리21에 대한 총괄적 평가, 국민승리21의 해산, 그리고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는 과정을 쓰려고 합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