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양경규의 "오늘"

재키 로빈슨을 아시나요?

양경규 2016. 2. 21. 23:30

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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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재키 로빈슨을 아시나요?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신문을 보더라도, 책을 사 보더라도 관심있는 분야에 눈이 가기 마련입니다. 저는 기계, 전자, 주식 등과 관련된 지면은 거의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신문을 받아들면 이 지면부터 읽는 사람들도 읽겠지요. 그러나 인류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의 모든 분야의 진보가 결합된 것이라고 보면, 자신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분야에서도 매일매일 사람들이 일하고 고민하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도 인류의 역사를 바꾸기 위해 고통스러운 진보의 역사를 써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947년 4월 15일, 오늘 미국 프로야구 부루클린 다저스(박찬호가 뛰었던 L.A. 다저스의 전신, 부루클린은 당시 뉴욕의 위성도시였으나 행정구역 확장으로 나중에 뉴욕시로 편입됨, 1958년부터 연고지를 L.A로 옮겨 지금의 L.A. 다저스가 되었음)의 홈구장, 27,000명을 수용하는 에베츠 필드에 26,623명의 관중이 들어찼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날 관중들 중 흑인이 14,000명으로 유난히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흑인들만이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날의 경기는 거의 1년내내 치러지는 수많은 게임(현재 미프로야구는 팀당 162게임, 한국프로야구는 팀당 133게임) 중의 하나가 아니라 미국인 대부분이 관심을 갖고 지켜 본 경기였습니다. 바로 오늘, 미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한 흑인선수가 인종장벽을 뚫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였습니다. 흔히 재키 로빈슨이라 불리는 잭 루즈벨트 로빈슨(1919-1972)이라는 흑인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4월 15일, 노예해방을 선언했던 에이브라함 링컨이 암살된 날이기도 한 이날 우연처럼 한 흑인이 또 다른 해방을 선언하고 있었습니다.

 

1863년, 노예해방선언이 있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게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일부 주에서는 어느 정도 흑백간의 차별이 완화되었지만 남부의 주에 있어서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과 진입금지가 사회적 관습은 물론이고 합법적인 법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흑인의 90%가 남부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흑백차별은 사실상 전체 미국의 흑인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짐 크로우 법에 근거하여 일상에서의 흑백차별을 제도화하고 있었습니다. 짐 크로우법에 의하면 흑인이 백인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백인들과 같은 식당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즉 흑인과 백인은 같은 화장실도 쓸 수 없었으며 버스에서도 앞 좌석은 백인좌석, 뒷 좌석은 흑인좌석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학교 또한 흑백이 분리되어 있었고 도시의 건물들의 출입구도 흑인 출입구와 백인출입구가 따로 있었습니다. 군대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것은 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반하면 처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짐 크로우 법은 1890년대에 미 대법원이 내린 판결들로 그 합헌성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미 대법원은 1896년에 나온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통하여 철도회사가 백인 승객들이 타는 객차와 흑인 승객들의 객차를 분리하도록 한 것은 합법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은 흑인과 백인을 두 대의 다른 객차에 분리해 태우는 것은 “분리되긴 하지만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판결했습니다. 1899년, 대법원은 인종별로 다른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누군가의 권리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는 판결도 내렸습니다.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미국의 흑백차별의 벽은 좀처럼 낮아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라는 야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880년대에 잠깐 흑인선수가 메이저리거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흑인선수가 속한 팀이 메이저리그의 팀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메이저리그로 편입되면서 벌어진 일이었고 이내 그 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퇴출되어야 했습니다. 짐 크로우 법은 야구에서도 흑백차별규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즉 흑인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없으며 흑인은 흑인만의 리그에서 뛰어야 한다는 규정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야구는 재키 로빈슨이 데뷔하기 전까지는 흑인들만이 뛰는 니그로리그가 따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흑인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것은 미국사회에 큰 변화이자 충격이었습니다. 단순히 일부 사람(백인)들의 노력이나 재키 로빈슨의 야구실력으로만 이러한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들은 1909년, 최초의 흑인인권조직이자 이후 흑인 인권운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CCP)를 설립하였습니다. 당시의 흑인운동은 대중적인 토대를 기반으로 한 대중적인 투쟁방식의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흑인들은 정치적, 사회적 캠페인과 흑인의 정치적 진출 등을 통하여 조금씩 흑백차별을 제거해 나갔습니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흑인이 미국의 국민이며 국가를 위해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심어 놓은 계기로 작동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NACCP를 중심으로 한 흑인인권운동은 미국사회와 미국정부를 상대로 흑백차별의 폐지와 전쟁협력이라는 교섭을 통하여 미국흑인의 차별철폐를 상당한 정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흑인인권운동이 쟁취한 일정한 법적, 제도적 장치는 주 정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정치체제에서, 연방정부의 법령이 효력을 미치는 데는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흑인의 90%가 분포하고 있는 남부 주를 중심으로 여전히 흑인과 백인의 버스좌석은 분리되어 있었고 학교에서 같이 공부할 수 없었고 흑인이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문자해독시험을 따로 치루고 별도의 세금도 내야만 했습니다.

 

재키 로빈슨의 메리저리그 데뷔가 이루어진 1947년의 미국의 사회는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 그것은 단순히 스포츠라는 한 영역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그것이 미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야구, 미국인들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오락중의 하나이자 문화인 야구라는 영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미국사회에서 흑백차별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 사건이었습니다.

 

1919년 1월 31일,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매우 심했던 주 중의 하나인 조지아주에서 목화농장의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난 재키 로빈슨은 뛰어난 운동소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형 메튜 로빈슨 또한 베를린 올림픽에서 전설적인 육상선수로 회자되고 있는 흑인 제시 오웬스(1913-1980, 베를린 올림픽 100M, 200M, 멀리뛰기, 400M계주 4관왕, 52년후 서울올림픽에서 칼 루이스가 똑 같은 종목에서 4관왕)에 이어 2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였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형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운동선수로서 활동하며 미식축구, 농구, 야구, 테니스, 멀리뛰기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캘리포니아대학(UCLA)을 거쳐 샘 휴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945년부터 니그로리그에서 직업적인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메이저리그에서는 니그로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흑인들을 메이저리그에 받아들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제약과 당시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우리로 말하면 프로야구총재) 케네소 랜디스로 인하여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실제 보스턴 레드삭스는 보스턴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 흑인선수를 영입하기로 하고 테스트까지 실시했지만 이는 시의회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쑈에 불과했습니다. 재키 로빈슨도 이 테스트에 참여하였지만 굴욕감만 느끼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결국 보스턴 레드삭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함께 흑인을 가장 늦게 받아들인 구단이 되었습니다. 보스턴이 메이저리그에서 우승을 하지 못한 것은 밤비노의 저주(베이브 루스를 양키스구단에 팔아버려 걸린 저주, 레드삭스는 김병현이 몸담고 있던 2004년에야 75년만에 메이저리그에서 우승)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더 큰 저주는 인종차별의 저주가 아니었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946년 부루클린 다저스의 구단주 였던 브렌치 리키는 흑인을 메이저리그 선수로 쓰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동안 철저한 인종주의로 메이저리그를 이끌던 커미셔너의 죽음도 한 몫을 했겠고 유능한 흑인선수영입을 통해 구단을 키우겠다는 욕심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인종문제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갖고 있었던 브렌치 리키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뛰어 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재키 로빈슨을 앞에 앉혀 놓고 브렌치 리키는 지금부터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가를 설명하고 로빈슨을 일부러 검둥이라고 호칭하면서 당부의 말을 덧붙입니다.

 

“어이 검둥이! 모욕을 견뎌내는 것이 싸우는 것보다 더 용기있는 일 일수 있다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참을 것이라는 약속을 내게 해주게. 그것이 이 일을 의미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일세.”

 

군복무중 버스 안에서의 차별에 견디지 못하고 싸워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도 하고 인종차별을 일삼는 백인장교에 대들어 불명예제대의 위기를 겪어가면서까지 인종차별에 저항했던 로빈슨은 그 순간 자신이 현재 미국사회에서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수차례나 다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947년 4월 15일 오늘, 그는 환호와 야유, 걱정과 희망이 뒤 섞인 야구장, 아니 야구장이 아니라 미국의 인종차별의 싸움터에 몸을 드러냈습니다. 그가 이제부터 도전해야 할 것은 상대투수의 공을 치는 것, 상대타자의 타구를 막는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이라는 훨씬 더 어려운 공을 치고 막는 것 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팀의 선수들과 여러 가지 일상에서 같이 생활할 수 가 없었습니다. 식당에 가서도 따로 밥을 먹어야 했고 숙소도 다른 곳을 써야 했습니다. 경기장에 들어서면, 관중들의 검둥이라는 욕설과 심판들의 편파적인 판정, 상대선수들의 빈볼과 고의적인 슬라이딩 등 테러에 가까운 공격을 견뎌야 했습니다. 경기에 출전하면 총을 쏴 버리겠다는 협박편지를 받는 것은 그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팀의 선수들조차 그가 뛴다면 출전을 거부하겠다는 탄원서를 연명으로 구단주에게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재키 로빈슨을 격려하고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총으로 쏴 죽이겠다는 협박편지를 받고 고통스러워 하는 재키 로빈슨을 보며 동료들은 ‘그럼 우리 모두 로빈슨의 배번인 42번을 달고 나가자’면서 로빈슨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데뷔하던 그 해 5월, 신시내티 레즈와 원정경기를 치루던 날, 유난히 그 날 관중들은 그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한 번 봇물이 터진 군중심리는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2루수로 수비에 나선 재키 로빈슨에 대해 관중석은 모두 한 목소리로 ‘검둥이’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계속 그 자리에 서있다가는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경기장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유격수였던 피 위 리즈라는 백인선수가 자기 자리를 떠나 로빈슨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로빈슨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지구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다는 듯이 웃음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나눕니다. 관중석은 일순 조용해졌습니다. 흑백이 친구이며 하나가 아니냐는 메시지를 수천마디의 말보다 강렬하게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미국사회와 미국인들에게 유명한 장면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랬기에 제시 잭슨 목사의 아들인 제시 잭슨 주니어 하원의원은 이 장면을 빌어 어려움에 빠진 버락 오바마를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재키 로빈슨이라면 힐러리 클린턴은 피 위 리즈다”

 

재키 로빈슨은 부루클린 다저스에서 1956년까지 10시즌을 뛰었습니다. 그는 이 10시즌 동안 통산타율 0.311, 137개의 홈런, 1,518개의 안타, 734 타점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데뷔한 해에는 그 해 처음으로 제정된 내셔널리그(미국 프로야구는 지역에 프랜차이즈를 둔 30개팀이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라는 이름의 두 개 리그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양 리그의 우승팀이 대결하는 것이 월드시리즈입니다)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도 미국 프로야구의 신인상은 재키 로빈슨상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1949년에는 타율 0.342, 도루 1위, 안타와 타점에서 2위에 오르며 내셔널리그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가 뛴 10시즌 동안 부루클린 다저스는 6차례 리그 우승을 거두었고 1955년에는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뉴욕타임스가 붙여 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외로움과 온갖 정신적인 고통속에서 이루어낸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재키 로빈슨의 투쟁의 과정은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을 뚫어가는 길고 긴 흑인인권운동의 여정의 하나였습니다. 이는 야구가 미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볼 때 작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팀을 승리로 이끈 재키 로빈슨을 연호하며 경기장을 빠져 나가는 백인들의 모습은 미국사회의 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데뷔하자마자 묵묵히 고통을 인내하며 신인상을 수상한 그는  다음 해인 1948년, 많은 흑인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도전은 단순히 스포츠라는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했던 일은 미국사회 전체에 흑인과 유색인종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일이었으며 흑백차별정책에 대한 사회적 폐기를 당겨가는 일이었습니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미국 군대가 흑인의 입대제한을 완전히 없앤 시기보다 1년 빨랐습니다. 공립학교에서 백인학생과 흑인학생을 따로 교육하던 것을 금지시킨 것 보다 8년이나 빨랐습니다. 버스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조치는 로빈슨이 데뷔한 후로부터 1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1963년, 흑백차별을 완전히 폐기한 공민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재키 로빈슨의 도전과 전혀 무관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1972년 10월 24일, 오랜 기간 당뇨를 앓던 재키 로빈슨은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월드시리즈 시구를 마지막으로 미국인들에게 전설로 남았습니다. 1957년의 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1월 5일 은퇴한 그는 1962년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습니다. 은퇴 후에도 마틴 루터 킹목사의 흑인인권운동에 같이 참여하며 야구장에서 그가 이루고자 했던 일들을 보다 넓은 공간에서 쉬지 않고 해나갔습니다.

 

그의 데뷔 50주년이 되던 1997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의 배번 42번을 모든 구단의 영구결번(현재 미국프로야구에서 42번을 달고 있는 선수는 아직 1명이 남아 있습니다. 1995년 42번을 달고 양키스 선수가 된,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의 마무리투수 마리아노 리베라입니다)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모든 선수가 원한다면 42번의 배번을 달고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L.A. 다저스는 이날 모든 선수가 배번 42번을 달고 경기에 임했습니다. 로빈슨은 미국의 야구선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최초의 흑인 올스타, 최초의 흑인MVP, 최초의 흑인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더 기쁘고 영광스러워했을 것은 이런 기념행사나 기록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두고 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베이브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재키 로빈슨은 미국사회를 바꿔 놓았다.”

 

1919년 4월 15일, 오늘은 일제에 의한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날입니다. 일제치하에서 빚어진 수많은 야만적인 행위중에서도 이 학살 사건은 가장 극악무도한 행위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군대와 경찰은 3.1운동의 여파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계속 확산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광분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군경은 4월 15일 오늘, 며칠 동안 계속된 화성지역의 만세운동을 일망타진하겠다는 일념으로 화성지역 만세운동의 중심이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기독교 또는 천도교 신자였던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향남읍(당시 향남면) 제암리로 몰려 갔습니다. 그동안의 탄압이 너무 과도하여 주민들게 사과하겠다는 거짓말로 주민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도록 한 후 군경은 교회에 불을 지르고 교회에 총을 난사하였습니다. 교회에 모인 대부분의 주민이 사망했습니다. 일제는 29명을 학살했고 교회 뿐만 아니라 인근의 가옥에 모두 불을 질렀습니다. 이 사건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 캐나다의 선교사, 우리의 독립운동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 그의 3.1운동에 대한 보고서-끌 수 없는 불꽃-은 3.1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에 의해서 세계에 일본의 만행이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일제는 사안이 워낙 중대하여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책임자였던 아리타 도시오를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쇼를 연출하였지만 정당한 법집행이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제암리에는 3.1운동을 기리고 학살자들을 추모하는 제암리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습니다. 또한 제암리 학살현장의 유적은 1982년에 사적 제 2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 합니다. 4월 15일 하면 세월이 아주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억에 떠오르는 일이 있습니다. 38년 전인 1972년 그 해 봄, 고향 충청도 서천에서 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올라 온 촌놈인 저는 2학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서울은 익숙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해 봄 어린 저를 적잖이 두렵게 만든 것은 서울의 낯섬이 아니라 은연중에 유포되는 소문, 학교나 집 앞의 골목을 돌아다니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시절 어린 우리에게는 머리에 뿔이 나있다고 생각할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던 사람, 그 사람이 서울에서 4월 15일에 반드시 환갑잔치를 열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1912년 4월 15일 오늘, 바로 김일성이 태어난 날입니다.

 

지금에는 참 헛헛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 시절, 반공 이데올로기의 세례에 흠뻑 물들어 있던 우리들에게는 공포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박정희는 그 공포들을 모아 10월 유신을 단행합니다. 38년 동안 이상하게도 잊지 않고 4월 15일만 되면 언제나 생각이 납니다. 오늘, 김일성과 북한은 우리에게 누구이며 무엇인지, 분단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