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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규]쉬운 해고 시대에 권영길 단병호를 이어갈 노동자대표

응답하라 1988의 유행어를 인용해봤는데요. 본문 확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의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 양경규 인사드립니다. 

저 양경규는 비례대표 후보 중 유일한 민주노총 후보로, 당선권에 들어간다면 더 많은 노동자들이 "정당투표는 정의당!"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정당지지율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선두에 서겠습니다. 


저 양경규는 '베테랑법' 발의로 재벌과 맞짱뜨는 베테랑 국회의원이 되겠습니다!


저 양경규는 청년정치에 대한 청사진을 비롯해 모든 부문과 세대를 아우르며 노동의 희망과 시민의 꿈을 잇는 정의당의 자신감이 되겠습니다. 


* 정의당 선관위 공식 후보 연설 영상입니다.

(당 홈페이지에서 11명 후보 영상 모두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양경규 후보를 소개합니다~

(2분 30초짜리 짤막한 영상입니다. 영상을 보기 어려우신 분들은 아래를 보셔도 좋습니다)




그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서울의 용문고등학교를 거쳐 84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상공회의소에 입사하여 1987년 서울상공회의소 노조의 조합원으로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노동조합의 부위원장으로서 55일간의 파업에 참여했으며 1989년부터 91년까지 상공회의소 노동조합의 3대 위원장직을 맡았다. 3대 위원장에 당선될 당시 상대후보는 현재 새누리당의 권오을. 권오을을 누르고 당선된 위원장이었다. 


이 기간에 지금의 공공연맹의 전신인 전국전문기술노동조합연맹(전문노련)의 창립 작업에 참여했으며 부위원장으로 피선되어 역할을 한다.

 

91년부터 93년까지 상공회의소노조 4대 위원장으로 역할을 수행하면서 16일간의 파업투쟁을 하고 아울러 이 기간 동안 전문노련 부위원장직을 계속 맡으며 후에 민주노총의 맹아가 되는 ILO 공대위 서울지역 공동대표의 역할을 함께 수행했다.

 

상공회의소 4대위원장을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하였다가 이듬해인 1994년 6월 전문노련의 상근부위원장으로 활동을 하고 그 이듬해인 1995년 6월 전문노련의 4대 위원장으로 당선되어 이후 97년까지 위원장직을 맡았다. 한편 이 기간 동안에는 민주노총추진위, 그리고 민주노총준비위에서 서울지역 공동대표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는 1995년부터 97년까지 전문노련의 4대 위원장으로서 활동하면서 민주노총의 창립 당시에는 강령규약제정위원회 위원으로 일했고, 96년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민주노총이 대정부 위원회에 처음으로 참여한 대통령 자문위원회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에 민주노총 대표로 참여하고 96-97의 노동법 개정투쟁에서 전문노련 위원장으로서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의 중심을 만들면서 민주노총의 모든 조합원들과 함께 투쟁했다.

 

그 시기 97년 4월에는 민주노총의 정치위원장으로서의 역할도 맡게 되어 민주노총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구체적 실천을 총괄해 나갔다.

 

97년 6월에 전문노련의 위원장으로 재선되어 99년 6월까지의 5대위원장으로서의 임기를 시작하고 한편으로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본격화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으로서 모든 노력을 다했다. 97년 9월 국민승리21 창립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역할을 수행했고 이후 97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권영길 선대본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대통령선거에 임했다.




이듬해인 98년 2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두 차례나 등록하였으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정리해고 합의 파동에 따른 비대위 구성 등) 실제 선거전에 참여하지는 못한다. 정리해고 합의 파동 당시에는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에서 단병호 비대위원장과 함께 비대위 부위원장으로서의 활동을 통해 민주노총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그는 연맹의 활동에 주력하면서 전문노련을 전국공익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공익노련)으로 재창립하고 공공부문에 대한 대단결을 기치로 하여 공공통합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인 99년 3월 공익노련, 민철노련, 공공연맹이 통합하여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연맹(현재의 공공운수노조. 전 민주노총 공공연맹)을 창립하고 초대 공동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창립과 함께 지하철을 필두로 한 4.19 공공연맹 총파업을 수행하고 이에 따라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6개월여의 수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 중에 초대위원장으로서의 임기가 만료되었지만 수배생활은 계속되었고 그 6개월의 수배기간 동안 부모님 모두가 돌아가시는 아픔도 겪었다. 수배 중이라 두 분의 임종을 모두 지키지 못했다.

 

99년 9월 수배 중에 민주노총 부위원장으로 출마, 부위원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한다. 수배가 되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후에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았고 벌금형을 받았다.

 

2000년 말까지 수행한 민주노총의 부위원장으로서의 활동기간 중에는 민주노총 정치위원장과 교육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정치위원장으로서는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관련 민주노총의 조직적인 참여를 결의하는 대중사업을 전개해 나갔고 창당과 함께 민주노동당의 당 부대표직을 맡아 활동을 했다. 교육위원장으로서는 민주노총 노동대학을 설립하였고 초대 학장을 맡기도 했다. 2000년 여름에는 그 유명한 롯데호텔과 사회보험노조투쟁에 함께 했다.

 

2000년 12월 민주노총 부위원장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공공연맹의 3대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이 된다. 2001년 1월 임기가 시작되고 곧바로 공공연맹의 5-6월 총파업투쟁의 조직화에 나서고 대한항공조종사노조의 파업을 선봉으로 한 공공연맹 총파업을 6월에 수행했으며 이로 인해 다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수배생활을 하게 된다. 8월에 농성 중이던 명동성당에서 경찰에 출두한 이후 구속되어 그해 연말까지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또 석방되자마자 철도, 가스, 발전 공공3사의 파업(일명 철가발)을 조직하여 2002년 2.25에 파업에 들어가게 된다. 발전파업과 관련 4월 2일의 합의에 대한 책임문제로 인하여 민주노총 지도부와 함께 연맹위원장직을 사퇴했다.

 

그는 그 이 후로 2004년 말까지 약 2년 8개월 동안 반성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 기간 동안에는 주로 활동가로서 자기훈련을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부족했던 공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에 공공연맹의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현장교육에 주력하기도 했다.

 

2004년 12월 공공연맹 위원장선거에 출마 6대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공공산별노조 건설을 가장 우선적인 사업으로 하고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계급적 관점을 유지하기 위한 현장교육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하여 위원장직을 수행했다. 2005년 7월, 2001년 공공연맹 파업과 관련하여 구속되고 이후 석방된 후 불구속상태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유죄가 확정되자 서울상공회의소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고(당시 회장은 두산그룹 전 회장 박용성) 그 이후 현재까지 복직불가 대상자다.



이후 2005년 10월부터는 임원 비리사건으로 인하여 구성된 민주노총 비대위에 비대위원으로 참여한다. 2005년 12월에는 민주노총 비대위원으로서 반WTO 홍콩투쟁의 민주노총 투쟁단장 역할을 맡아 홍콩원정투쟁에 나섰다가 홍콩 내에서 최초의 입수투쟁과 삼보일배투쟁 등을 벌이고 홍콩에서 구속되었다. 홍콩 대주교의 보증으로 보석 상태로 풀려났지만 홍콩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서 함께 구속되었던 10여명의 노동자.농민과 함께 홍콩 내에서 단식투쟁(침사추이 맥도널드 앞에서 ㅠㅠ) 등을 포함한 국제연대투쟁을 벌이면서 투쟁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을 벌였다.





2달 정도 홍콩에서 구속 상태에 있다가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되어 풀려났다. 2006년 1월 귀국 후 산별노조운동에 박차를 가하여 2006년 11월 30일 공공산별노조를 결성했다. 아울러 공공과 운수분야를 포괄하는 공공운수 대산별을 건설하기 위하여 화물, 택시, 버스등과 함께 4개 연맹조직의 통합작업을 진행시켜 2007년 1월에 공공운수사회서비스연맹을 새롭게 창립시켰다. 창립을 성사시키고 연맹위원장직을 물러난다.


그는 2007년 1월 연맹위원장을 물러남과 동시에 바로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변화, 파격적인 상상력을 통한 조직의 혁신을 들고 출마했다. 밑으로부터의 변화와 공장의 담장을 넘어 지역운동, 부문운동과 연대하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후 그는 공공연맹의 교육위원으로서 다시 밑으로부터 운동의 중심을 세우기 위해 전국현장의 교육에 주력한다. 현장교육위원으로 노동현장의 간부와 조합원의 교육을 가장 중심적인 활동으로 해나갔으며 어떤 특별한 공직 없이 교육활동에 전념하던 중 새롭게 고민을 시작한 부문이 정치운동이었습니다.


노동자정치운동이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함께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노동자정치운동, 진보정당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는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당시 당의 분당에 반대했지만 결국 당이 분당되면서 일체의 당적을 갖지 않고 새로운 정치운동을 모색하다가 이어진 진보대통합의 실패와 통합진보당의 창당, 그리고 또 한 번의 분열을 보면서 구체적인 정치운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2011년 11월, 새로운 노동자정치운동을 시작하기 위한 전국순회를 시작하고 이 성과를 모아 2011년 12월에 새로운 노동정치를 위한 제안자 모임을 결성하고 이어 2012년 12월, 노동자정당 추진회의로 조직을 한 단계 성장시키고 그 대표를 맡아 분열된 진보정치를 통일시키고 노동자정치운동의 새로운 실천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해나갔다.

 

2013년 11월에는 노동운동 내의 여러 노동자정치세력을 묶어 노동.정치.연대를 창립하여 명실공히 노동자정치운동의 통일체이자 대표체를 만들고 이 단체의 상임대표를 맡았다. 이후 진보정당의 통합과 노동자정치운동의 새로운 실천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며 이 노력의 결과로 2015년 11월 22일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인 ‘통합’ 정의당을 출범시키는 데 의미 있는 기여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