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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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역사를 바꾼 노동자 투쟁-YH 노동자의 투쟁
매년 연말이면 그 해의 10대 뉴스를 신문들이 선정합니다. 1979년 국내신문의 10대 뉴스의 맨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뉴스는 박정희가 김재규에 총을 맞은 사건 10.26 사태입니다. 그 다음으로 전두환이 벌인 군사쿠데타 12.12, 그 다음으로 10월의 소위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박정희가 발동한 부산의 계엄령과 마산의 위수령, 그리고 네 번째로는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에 대한 법원의 직무정지 가처분과 국회에서의 의원직 제명이 뒤를 잇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뉴스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YH 노동자들의 투쟁과 신민당사 농성입니다(동아일보 10대 뉴스). 이 다섯가지의 뉴스는 사실은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는 역사의 과정이었습니다. 79년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공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한국사회의 기존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중요한 전기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유신체제의 몰락과 함께 격동의 80년대를 열어 젖혔습니다. 80년대, 정치적으로는 전두환.노태우의 군사독재정권이 이어졌지만 사회적으로는 훨씬 대중적이고 광범위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양축을 중심으로 한 폭발적인 사회변혁운동이 터져 나온 80년대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격동의 80년대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의 결과로부터 나타났고 그 일련의 사건의 첫 번째 발화점이 바로 YH 노동자들의 투쟁이었음을 역사는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물줄기를 돌리고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게 한 사람들은 불과 180여명의 YH 여성노동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70년대의 수많은 민주노조의 투쟁을 기억해야 하겠지만 YH 노동자들의 투쟁을 오늘 이 시점에서 각별한 의미에서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 때문입니다. 굳이 역사의 결과를 놓고 YH 투쟁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꿰맞추어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릇 역사속에서 벌어지는 우연이 사실은 새로운 역사에 길을 내주기 위한 필연이었음을 확인할 때가 많습니다. YH 투쟁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역사를 위한 필연이었습니다. 오늘 김경숙 열사와 YH 노동자 180명을 기억하면서, 오늘 나의 일상의 투쟁이 새로운 역사를 위한 필연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1979년 8월 11일, 오늘은 YH무역의 노동자들이 농성을 벌이던 신민당사에 경찰의 강제진압작전이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한 날입니다. YH무역의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강제진압 이틀 전인 8월 9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장인 장용호 이름의 영어 이니셜을 딴 YH무역의 노동자 180명이 회사 측의 부당한 폐업공고에 반대해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회사 운영의 정상화와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습니다. YH무역은 1966년 자본금 100만 원, 종업원 10명으로 설립한 작은 가발 제조업체였으나, 가발 경기의 호황과 정부의 수출 지원책에 힘입어 불과 4년만인 1970년에는 수출실적 100만불, 종업원 4,000여 명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하여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1970년 9월, 장용호는 동서를 사장으로 앉혀 국내경영을 전담시키고 자신은 회장의 신분을 가진 채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상당액의 외화를 도피시킨 그는 YH제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용 인터내셔널 상사>를 설립하고 호텔, 백화점 등을 경영하는 등 양쪽으로 부를 쌓아 올렸습니다. 이후 무리한 사세확장과 부정행위로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한 YH무역은 감원이 행해졌고 은행 빚이 늘어났으며 75년부터 급격한 하향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가발산업의 후퇴와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해 회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YH무역은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줄이고, 이어 1979년 4월 일방적으로 폐업을 선언한 뒤, 다시 8월 6일 2차 폐업을 공고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사부실의 근본적인 원인은 장용호가 부당한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회사이익의 상당부분을 외국으로 빼돌린 것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외국으로 빼돌린 재산이 15억원이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설립당시의 자본금이 100만원이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금액인 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에 YH무역 노동자들은 폐업 철회와 임금 청산, 고용 승계를 위한 농성을 시작하는 한편, 회사 측과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주), 관계기관에 회사 정상화를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급기야 회사가 기숙사·식당까지 폐쇄하자 결국 노동자들은 정치투쟁으로 전환하고, 8월 9일 180명의 노동자가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습니다. YH 노동자들의 투쟁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마지막 투쟁이었습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먼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신체제라는 독재의 폭력이 10년내내 계속되던, 소위 박정희 정권이 틈만나면 되뇌이던 ‘대망의 70년대’, 권력과 자본은 60년대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에 대해서는 가혹한 착취를,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잔혹한 탄압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유신독재정권의 삼엄한 압제를 뛰어 넘어 수 많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내면서 60년대와는 다른 민주노조운동을 힘차게 전개하였습니다. 유신독재는 1972년 10월 17일 소위 10월 유신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는 이를 통해 영구집권체제를 갖추고 파쇼적인 통제와 강압정치를 펼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재야 지식인과 언론인, 종교인, 야당 정치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치열하게 전개된 학생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은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이런 운동의 결과로 민주화에 대한 국민 의식이 높아지고 민주화운동의 대중적 토대가 점차적으로 넓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박정권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긴급조치(9호까지 발동됨)와 물리적인 탄압 등을 통해 강압적인 통치방식을 70년대 내내 완강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불안과는 달리 표면적으로 한국경제는 70년대에 고도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어찌 보면 박정권이 유지된 것은 경제성장이라는 외적으로 드러난 성과에 기인한 바가 컸습니다. 지금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이야기하고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를 거론하는 중요한 근거는 바로 이러한 경제성장에 있습니다. 특히 1970년대 이룩한 외형적인 성과는 이러한 논의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70년대 초반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의 팽배와 제1차 석유파동으로 60년대부터 형성되어 온 개발독재에 뿌리를 둔 한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는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박정희 정권은 초법적인 경제관련 입법과 조치(8.3조치에 의한 사채동결, 자본에 대한 엄청난 특혜금융, 법인세의 대폭인하, 기업공개촉진법 제정, 환율인상,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한 노동기본권 박탈, 저축장려운동, 국민투자기금법 제정 등)를 통하여 자본의 위기를 해소해 줌으로서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전략을 밀고 나갔습니다. 그것은 유신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물질적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권력의 필사적인 승부수였습니다. 그리하여 70년대의 중반을 넘어서는 1976년 이후에는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연평균 10%대를 휠씬 넘었습니다. 하지만 초법적인 조치를 통한 고도성장의 신화는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수탈을 통한 저임금.저곡가를 기반으로 한 자본축적이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한국경제의 불균형성장을 초래 하였습니다. 이는 산업발전의 불균형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빈부격차를 빚어내는 원인이었으며 이로 인해 민중들은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정권의 전폭적인 특혜에 의해 형성된 독점재벌은 한국경제를 전면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지만 이들 독점자본이 선진국의 독점자본에 예속되어 있었음으로 인하여 한국경제는 해외의존심화와 국내독점의 심화라는 두 개의 모순을 배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후 한국경제의 오래된 모순으로 자리하게 되면서 한국경제의 자립을 막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상황은 한국의 민중들과 노동자들을 매우 심각한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70년대에 들어와 경제성장과 함께 임금노동자 수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1970년 378만 6천명이었던 임금노동자는 1979년에는 648만 5천명이 되었습니다. 산업별로는 제조업 노동자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그 중에서도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기인하여 이 분야의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대공장 노동자의 비중이 급격히 증대하였습니다. 여성노동자의 숫자도 꾸준히 증가하여 1976년에는 전체노동자의 49.4%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70년대는 농촌의 해체로 인하여 노동력의 도시 이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흔히 닭장집, 벌통집 등이 생겨난 것이 바로 1970년대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조건은 고도성장과는 무관하였습니다. 이는 한국경제의 성장이 바로 이러한 노동자들에 대한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노동력의 수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70년대 고도성장의 기간을 거쳤음에도 전산업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1980년의 통계로 최저생계비의 44.6%에 불과했습니다. 노동생산성은 매년 실질임금상승률을 크게 웃돌았지만 이윤은 자본에게만 돌아 갔습니다. 노동시간 또한 세계최장의 노동시간을 기록하였습니다. 1970년대 전산업의 주당 노동시간은 대략 51.6시간이었습니다(제조업의 경우는 53.1시간, 2008년 우리나라의 평균노동시간은 47.1시간). 이러한 장시간 노동은 필연적으로 산업재해의 증가로 나타났습니다. 1970년 37,752명이던 산업재해의 숫자는 1979년 130,307명으로 3배 이상 늘어났습니다(2007년 4일이상 치료를 요하는 산업재해자 90,147명). 직업병 환자수도 급격히 늘어나 1970년 780명에서 1979년에는 4,063명으로 5배 이상이 되었습니다. 산업재해에 대한 판정이 철저하게 친자본적이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노동자의 산업재해가 이 보다 훨씬 더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노동현장에서 노동 기본권을 전면적으로 봉쇄한 것입니다. 1971년 12월에 제정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근로자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미리 주무관청에 조정을 신청’하도록 함으로서 노동기본권의 핵심권리들을 사실상 봉쇄하였습니다. 나아가 1973년과 1974년 두차례에 걸친 노동법 개정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을 사실상 노사협의회 활동으로 제한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행정조치를 통하여 노사관계는 노동문제가 아닌 경제문제로 다루어졌습니다. 여기에다 권력은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를 위한 중요한 기제로서 공장새마을운동을 들고 나왔습니다. 공장새마을운동은 노사간 협조를 바탕으로 한 생산성향상운동에 중점을 두고 노사관계를 봉건적, 권위적, 온정적인 협조관계나 가족관계로 만들어 가려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이런 정권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본은 노동현장에서의 군대식 통제와 여성사업장에서의 남성관리자들에 의한 폭력적인 공장운영을 스스럼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구조속에서 때때로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권력과 자본이 하나가 되어 잔혹한 탄압과 폭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이처럼 70년대 노동자들은 유신체제라는 사회의 억압적인 통제체제를 한 손으로 버티고 또 한 손으로는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저임금과 세계최장의 노동시간, 그리고 열악한 작업환경과 산업재해, 노동인권에 대한 무시가 판치는 노동현장을 버텨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70년대의 노동운동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넘어 노동자도 인간임을 선언하는 눈물로 얼룩진 처절하고도 길고 긴 싸움의 여정이었습니다.
이 처절한 싸움의 여정의 시작은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의 평화상가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이었으며 그 끝은 1979년 오늘 YH 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이었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운동의 활성화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전태일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청계피복노동조합은 평화시장내 600여개 사업장의 노동자 67,000여명을 조직했으며 대폭적인 임금인상과 획기적인 노동조건 개선을 이루어내는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다른 산업분야의 노동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1970년 165건(합법적인 노동쟁의는 90건)이던 노동쟁의가 이듬해에는 1,656건(합법적인 노동쟁의는 109건)으로 늘어났습니다. 학생들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대학마다 노동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지식인들과 종교인들도 시국성명을 발표하였고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여 이 법의 적용범위를 16인 이상 업체까지로 확대하였습니다. 박정희는 이듬해인 1971년의 연두교서에서 과거에는 전혀 거론하지 않던 노동문제를 일곱 번째 과제로 언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각성을 급속도로 확산시키면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적인 토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요한 지원세력이자 사회적인 토대는 여러갈래로 형성되었습니다. 먼저학생운동의 영역에서는 그동안의 정치적 민주화에 매몰되었던 경향성이 극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전태일 분신에 대한 지원 시위를 시작으로 하여 이후 각종의 노동문제에 참여하고 지원하였습니다. 학생들은 노동야학, 교회내에서의 노동운동 지원,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참여 등을 통하여 노동운동에 대한 참여의 폭을 넓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70년대의 노동문제에 대한 학생운동의 관심은 대중적이기 보다는 일부 소수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80년대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가장 중요한 견인차가 학생운동이었던 것에 비추어 70년대 노동운동에서는 그 역할을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담당하였습니다(8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에 대해서는 오늘 여덟 번째 참고).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문제에 대한 연구와 지원활동을 펼쳐 나간 주요한 조직은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서강대학교 산업문제연구소, 그리고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이었습니다. 이들 단체들은 주로 노동교육을 통해 노동자의 자각을 고취시키는 한편 노동운동가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런 지식인들의 활동은 지식인사회에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70년대 노동운동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해 나간 주체들은 종교인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종교단체로는 도시산업선교회(산선, 권력과 자본을 이를 도산이라고 불러 기업을 도산시키는 집단으로 불온시 하였습니다)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가노청)를 들 수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이 두 단체는 1970년대 들어 전국의 공단을 중심으로 노조결성투쟁과 노조민주화투쟁을 진행하였습니다. 서구자본주의의 발전을 뒷받침 해온 기독교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들 단체들은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와 반공이데올로기의 이념적 테두리 안에 있었습니다. 비록 이념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 단체들의 활동을 통하여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와 사회의 모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런 기본권을 포기하고 권력에 협조하는 한국노총에 대해서도 저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권력과 자본, 그리고 한국노총은 순수한 노동자의 생존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활동의 성격을 가졌던 이들 단체들에 대해서 마저 불순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70년대 종교계의 노동운동을 위한 지원활동은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확산, 그리고 민주노조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87년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되고 민주노조운동의 반자본주의적 이념지향성이 높아지면서 종교계의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줄어드는 것은 바로 앞에 언급한 기독교의 본질적인 이념과의 충돌이 존재하는 측면도 있다 할 것입니다(물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전태일의 죽음과 이어진 사회적 토대의 형성과 함께 70년대 노동운동은 양적인 팽창이 이루어졌습니다. 1970년 46만 9천여명이던 조합원수는 1979년에 109만 4천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노조수도 1970년 17개 산별노조에 418개의 지부에서 1979년 17개 산별노조에 553개의 지부로 늘어났습니다. 합법적인 쟁의건수도 매년 증가하여 1979년에는 1,697건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통계를 보면서 우리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점차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통계치만 놓고 보면 커져가는 경제규모와 노동자수의 증가에 따른 자연적인 성장이 아닌가 하는 판단도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유신독재의 폭압을 뚫고 끊임없이 투쟁해 온 노동자들과 민주노조운동의 역할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장이 70년대 노동운동의 형식적인 총본산인 한국노총의 반동적인 행태를 감안하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노총은 노동기본권을 박탈한 유신독재에 적극 협조하면서 노동대중의 절박한 생존권 요구와 노조활동에 대한 기본권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였습니다. 한국노총은 산별노조체제라는 구조속에서 지부의 교섭권과 체결권이 없다는 이유로 노동자의 생존권을 억누르면서 자본과의 야합을 밥먹듯이 자행했고 민주노조에 대해서는 자본의 앞잡이로 나서 노조를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민주노조활동을 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산별중앙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동종의 산별자본가들에게 제공하는 일도 비일비재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성장을 이루어 낸 70년대 노동운동, 바로 그 뒤에는 지칠줄 모르고 끊임없이 싸워 온 민주노조가 있었습니다.
권력과 자본에 대한 종속을 거부하고 한국노총의 반노동자적 행태에 저항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은 뿌리를 내려 갔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 시작은 전태일의 분신이었습니다. 이어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시도,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옥상농성, 1971년 아시아자동차노동자들의 노조결성투쟁, 노조 결성에 나섰던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에 대한 테러사건(드라이버에 찔려 죽음을 당합니다) 등이 일어나면서 전국의 노동자들의 노조결성 투쟁이 확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피어린 투쟁을 통하여 70년대 초.중반에 향후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표적인 민주노조들이 탄생하였습니다. 바로 청계피복, 반도상사, YH무역, 콘트롤데이타노조 등입니다. 아울러 기존의 어용노조를 뒤집어 엎는 투쟁이 곳곳에서 진행되어 한국모방(후에 원풍모방), 동일방직노조등이 민주노조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들 노조의 투쟁을 통하여 많은 노조들이 민주노조로 바뀌어 나갔으며 이들 노조들은 서로 연대하며 지원하고 협조하는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들 민주노조들은 조합내에 소모임을 구성하고 조직력을 강화하는 한편 노조내 민주주의 실현, 조합원에 대한 교육활동 등을 활발히 추진해 나갔습니다. 어용 산별노조의 지부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이들 노조들은 임금인상투쟁과 노동조건 개선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냄으로서 조합원들의 지지와 신뢰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내려가는 민주노조운동에 대하여 권력과 자본, 그리고 어용 한국노총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왔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 70년대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대표적인 70년대의 민주노조 투쟁으로는 동아일보, 한국일보 기자들의 노조결성 투쟁(1974년), 원풍모방노조의 노조민주화투쟁(1974년), 반도상사노조의 노조결성투쟁과 임투(1974년),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 사수투쟁(1977년), 동일방직노조의 민주노조 사수투쟁(1976-1978년) 등이 있습니다. 이런 민주노조의 투쟁은 권력과 자본의 탄압을 폭로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서 사회전반에 대한 노동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조운동은 비록 그것이 생존권과 관련된 경제투쟁(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경제투쟁에 머물렀던 것을 한계로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운동의 조건에서 이를 한계로 지적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로 보이지는 않습니다)으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 그 투쟁의 속성이 유신체제에 기댄 권력과 자본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종래의 지식인과 학생중심의 민주화운동의 폭을 넓히고 심화시키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YH 투쟁이 유신체제의 붕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YH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러한 70년대의 민주노조의 투쟁의 과정속에서 나타난 싸움이었습니다. YH무역 노동조합은 사용주가 감원과 75년 3월 건조반의 작업거부투쟁의 성과를 이어 같은 해 5월 24일 회사측의 방해를 뚫고 결성되었습니다. YH 노조는 결성 이후 회사측의 전면적인 탄압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사측은 민주노조를 뒤엎고 어용노조를 세우기 위한 공작을 펼치는가 하면 최순영 지부장(나중에 부천시 의원과 민주노동당 의원을 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을 비롯한 간부들을 해고와 전출시킴으로서 아예 노조를 말살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해책동을 딛고 YH 노조는 조직을 강화하고 조합원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단단한 민주노조를 만들어 갔습니다. 민주노조를 기반으로 YH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상여금 지급 등의 성과를 만들어 냈고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해 나갔습니다. 78년까지 노조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78년의 석유파동과 사측의 부정과 비리로 인하여 회사가 어려워지자 사측은 감원을 하고(말하자면 정리해고를 하고) 이듬해인 79년 마침내 일방적으로 폐업을 단행하였습니다.
사측은 7월의 폐업공고에 이어 8월 7일 기숙사 폐쇄와 퇴직금 수령안내 공고를 하였습니다. YH 노동자들은 즉각적으로 회사의 점거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회사의 점거농성만으로 문제가 풀리지 않자 8월 9일 전격적으로 당시 마포구 도화동에 있던 신민당사 농성을 시작하였습니다.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한 보수야당 신민당은 처음에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으나 문제의 본질이 단순한 노사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본이 유신체제를 등에 업고 자행한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며 노동자들의 투쟁이 곧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보수야당의 정치적 고려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노동운동사상 처음 벌어진 정당점거 농성은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YH 투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79년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78년에 발생한 2차 석유파동으로 한국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접어들었고 민중의 생활고와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70년대 내내 이어져 온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점차적으로 대중적 기반이 확장되어 79년 3월에는 전체 민주화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결성되었으며 학원가의 반유신 시위는 점점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5월에는 가톨릭 농민회 회원인 오원춘의 납치사건(안동농민 오원춘이 정부가 준 불량씨앗 감자에 대하여 피해보상을 요구하여 피해보상을 받아내자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하여 15일간 고문과 폭행한 사건. 나중에 가톨릭 안동교구가 문제를 제기하자 정부는 그가 다방 종업원과 바람이 나서 도망간 것이라며 오히려 그를 허위사실 유포죄로 구속. 가톨릭이 이에 대하여 항의하자 교구신부 정호경을 구속. 가톨릭은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구하며 정부와 전면적으로 대립. 김수환 추기경은 주일미사에서 이를 전면적으로 비판하였고 가톨릭의 전 교구는 시국미사와 항의시위. 이에 정부는 문정현.함세웅 신부를 추가로 구속. 이런 상황이 8월까지 진행됨)으로 가톨릭과 유신정권의 전면적인 대결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유신체제는 겉으로는 여전히 견고해 보였지만 분노한 민중 앞에 유신체제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터진 YH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권으로서는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유신정권은 즉각 강경진압을 결정하였고 드디어 101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1979년 8월 11일 오늘 새벽 2시 고가사다리차와 물탱크차를 동원하여 신민당사에 대한 경찰투입을 감행합니다. YH의 여성노동자들은 깨진 유리병을 들고 저항했지만 군화발과 곤봉아래 풀잎처럼 쓰러져 갔습니다. 진압작전은 23분만에 완료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노조의 상집위원이었던 김경숙이 사망하였습니다. 스물 한 살의 나이였습니다. 열세살 나이로 ‘공순이’가 되었고 75년 YH에 입사하여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김경숙은 그렇게 죽었습니다. 최순영의 회고에 의하면 김경숙은 진주난봉가가 18번으로 유난히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합니다. 경찰투입 몇 시간전에 있었던 마지막 총회에서 투쟁결의문을 읽었던 사람도 김경숙이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공식적으로 추락사로 발표하였지만 구타의 흔적과 시신의 상태 등으로 인하여 경찰 폭력에 의한 타살 가능성이 수차례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김경숙 열사의 사인은 정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후 노조간부들은 전원 구속되었고 농성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문동환. 인명진 목사를 포함하여 연대.지원단위의 8명도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투쟁은 강제진압으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신민당의 국회의원들은 이후 18일간 농성을 전개함으로서 YH 투쟁은 정치권의 최대이슈가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모든 민주화운동세력들이 각 부문에 걸쳐 폭력 진압과 강제 연행에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이를 통해 민주화운동이 굳게 결합하는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에 골몰하던 유신정권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무 정지 가처분을 결정하였고 이어서 외신과의 인터뷰를 빌미로 의원직에서도 제명하였습니다. 유신반대투쟁은 전국을 뒤덮기 시작하고 특히 부산과 마산에서의 반유신투쟁(소위 부마사태라고 부릅니다)이 대규모로 폭발하였습니다. 유신정권은 10월,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고자 했지만 민중의 분노앞에 유신정권이 10월 26일 먼저 무릎을 꿇게 됩니다. YH무역의 연약한 여성 노동자들이 생존권 투쟁이라는 의미를 넘어 18년 군사독재를 끝장내고 한국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열어 젖히는 투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시인 고은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1970년 전태일이 죽었다
1979년 YH 김경숙(金京淑)이
마포 신민당사 4층 농성장에서 떨어져 죽었다
죽음으로 열고
죽음으로 닫혔다
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
가봐라
30년이 지난 2009년 8월, 우리는 그날의 신민당사 진압 장면을 다시 평택에서 보고 있습니다. 투쟁의 요구내용도 싸움의 방식도 똑 같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똑 같은 장면을 또 보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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