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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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보비 샌즈의 죽음, 북아일랜드의 눈물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도심에 있는 영국대사관 옆길의 명칭은 보비 샌즈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보비샌즈가(街)입니다.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정부가 팔레비왕 시절에는 윈스턴처칠가로 불렸던 이 도로의 이름을 보비샌즈가로 바꾸자 영국정부는 이란 정부에 끊임없이 이 도로의 명칭변경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비 샌즈, 그가 누구이길래 이란은 그의 이름을 영국대사관 옆길에 붙여 놓았으며 영국은 무엇 때문에 그 이름이 붙은 도로의 명칭 변경을 요구한 것일까요?
보비 샌즈, 그는 북아일랜드의 독립과 아일랜드의 통일을 위해 영국과 싸우던 구교도(가톨릭계)의 게릴라 군사조직인 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전사로서 1977년 무기소지죄로 영국정부에 의해 1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습니다. 시를 좋아했던 그는 복역중에도 시를 발표하고 옥중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면서 북아일랜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가 지은 시는 감옥밖으로 유출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저항정신을 고취시켰습니다.
"한 마리의 종달새를 가둘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종달새의 노래까지는 가둘 수 없다."
보비 샌즈와 그의 동료들이 수감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정부는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는 취지에서, 북아일랜드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IRA 수감자들에 대하여 정치범의 지위를 박탈하고 일반형사범으로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보비 샌즈와 수감자들은 죄수복 입기를 거부하며 나체로 담요만 두른 채 생활하는 ‘담요투쟁’과 씻기를 거부하고 벽에 배설물을 처바르는 ‘불결투쟁’으로 맞섰습니다. 수감자들은 1980년 1차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영국 정부는 개선을 약속했다가 이를 번복했습니다.
수감중인 IRA의 책임자 였던 보비 샌즈는 1981년 3월 1일 전쟁포로로서의 대우를 요구하며 2차 단식투쟁에 들어갔습니다. 보비 샌즈의 단식투쟁을 시작으로 수감자 21명이 줄을 이어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단식투쟁은 북 아일랜드 전역을 긴장과 분노로 몰아 넣었습니다. 영국정부는 어떻게든 이들의 단식을 중단시키려 하였지만 이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북아일랜드의 구교도들은 때마침 사망한 하원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보궐선거에서 보비 샌즈를 하원의원으로 옥중당선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보비 샌즈는 하원의원이 되었지만 단식을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5월 5일 단식 66일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로도 9명의 IRA단원들이 단식투쟁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영국의 대처정부는 완강하게 버티며 이들의 죽음을 방치하였습니다. 북아일랜드와 전 유럽이 영국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분노하였지만 영국의 대처정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IRA의 단식투쟁은 눈물과 분노속에서 막을 내립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 1981년 10월 3일입니다. 단식투쟁에 들어 갔던 21명중 10명이 사망했습니다. 북아일랜드가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흘려 온 피눈물, 그 얼룩진 독립과 통일투쟁의 역사는 그렇게 또 한 페이지를 넘어 갔습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민족분쟁이 있습니다. 민족분쟁의 내용과 방식도 천차만별입니다. 강압적인 침략과 합병에 의해 사라진 민족국가를 다시 세우기 위한 분쟁이 있습니다. 당초에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로 건국되었으나 다수민족이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짓누르며 급기야는 아예 말살하려는 기도에 맞서 저항하는 민족들도 있습니다. 민족끼리 서로 다른 공동체, 서로 다른 국가를 구성하였지만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적의와 혐오 때문에 끊임없이 싸우는 민족분쟁도 있습니다. 여기에 종교, 언어의 차이가 더해지면 민족분쟁의 양상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민족간의 분쟁들을 한번 들여다 볼 생각입니다. 오늘 먼저 북아일랜드의 분쟁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지금의 분쟁은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지는 가톨릭계 주민(켈트계)과 프로테스탄계 주민(앵글로 색슨계), 영국정부간의 분쟁이지만 원래 이 분쟁은 아일랜드 전체와 영국정부간의 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시작으로 하여 1949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수립됨으로서 영국-아일랜드간의 분쟁은 종료되고 아일랜드 공화국에 포함되지 않은 아일랜드섬의 북쪽지방, 즉 북아일랜드에서만의 분쟁으로 변화하였습니다. 현재의 북아일랜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800년에 걸친 영국과 아일랜드의 분쟁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지도상으로는 24만 km인 섬나라 영국에 인접한 또 하나의 섬나라가 아일랜드(7만 km)입니다. 그중에서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북아일랜드는 1.4km에 불과합니다. 아일랜드는 기원전 5세기경 철기를 갖고 건너 온 켈트족이 자리를 내린 땅이었습니다. 켈트족은 동물이나 특정한 수목을 숭배하는 종교를 갖고 있었는데 432년에 건너왔다고 전해지는 패트릭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패트릭은 교회제도를 확립하는 등 아일랜드 전역을 가톨릭화하여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것은 세 잎 클로버, 샴록(Shamrock)인데 이는 성 패트릭이 샴록을 이용하여 가톨릭의 기본교리인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샴록은 현재 북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깃발의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 패트릭이 선종한 3월 17일에는 아일랜드나 북아일랜드, 그리고 아일랜드 이민이 많은 미국의 주요도시에서 어김없이 초록색 의상과 초록모자로 뒤덮히는 성 패트릭 축제가 열립니다.
앵글로 색슨족이 지배하던 영국이 아일랜드를 최초로 침공한 것은 1171년 이었습니다. 이후 영국은 아일랜드를 지배할 목적으로 얼스터지방(지금의 북아일랜드 지방)에 앵글로 색슨계인 신교도(프로테스탄트)를 대규모로 이주시키다가 마침내 1653년 크롬웰이 이끄는 영국군이 아일랜드를 정복함으로서 아일랜드 전역을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때부터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저항과 독립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798년에 아일랜드 공화국의 자치를 목적으로 한 민중봉기가 일어났으나 영국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이를 빌미로 하여 오히려 1801년 아일랜드를 영국에 완전병합하여 아일랜드를 직접통치하였습니다.
영국은 프로테스탄트의 대량이주로 인하여 가톨릭보다 오히려 신교도가 더 많이 살게 된 얼스터 지방에 대해서는 직물과 조선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아일랜드의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영국인 부재지주의 통제하에 농업에 대한 수탈정책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1800년대들어 아일랜드는 다니엘 오코널의 의회와 대중투쟁을 병행한 병합철회운동, 오브라이언의 청년아일랜드당 운동등을 중심으로 아일랜드 해방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이어 아일랜드공화주의 동맹(IRB)과 미국으로 이민간 아일랜드인에 의해 미국내에서 조직된 휘니안동맹의 1867년의더블린 봉기도 영국정부에 의해서 진압되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을 더욱 괴롭힌 것은 1840년대의 대기근이었습니다. 영국인 지주의 착취로 가뜩이나 빈곤한 농촌은 이 기근으로 완전히 황폐해졌고 아일랜드인들은 수십만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기근과 영국의 압제를 피해 미국과 오스트렐리아와 같은 새로운 대륙으로 이주를 시작하였습니다. 1841년부터 50년 동안 미국에 건너간 아일랜드 이민의 수는 320만명에 달했습니다. 반면 아일랜드의 인구는 820만명에서 470만명으로 줄었습니다. 미국이 수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이지만 그중에서도 유달리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많은 것은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아일랜드의 인구가 약 400만명인 것에 비해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숫자는 4,000만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하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다니엘 데이 루이스, 카메론 디아즈가 나온 이 영화는 바로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뉴욕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정통 뉴욕커와 아일랜드 이주민이 뉴욕의 파이브 포인츠를 무대로 격돌하는 내용인 이 영화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속에서 아일랜드인들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계는 미국에서 정치 경제 문화분야에서 매우 주도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역대 44명의 대통령중 15명이 아일랜드계입니다. 앤드류 잭슨, 우드로우 윌슨,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등이 바로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몇 차례에 걸친 봉기에 의한 독립운동이 실패하고 기근까지 겹치면서 1800년대 후반부터 아일랜드의 민족운동은 일정하게 방향을 선회합니다. 즉 영국지배를 인정하는 범위내에서자치권 획득투쟁과 영국인 지주가 뺏어간 토지소유권 반환투쟁, 소작료 인하투쟁(당시 아일랜드의 토지는 영국인이 95%, 아일랜드인이 5%를 소유) 등 아일랜드의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의회를 통해 점진적으로 아일랜드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자치를 넓혀가는 투쟁(Home Rule운동이라고 부릅니다)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런 토지 투쟁의 과정에서 찰스 C. 보이콧이라는 영국의 지주에 대항하여 아일랜드 농민들이 단합하여 불이익을 무릅쓰고 지주측과의 일체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투쟁을 벌여 승리하게 되는데 여기서 보이콧 전술이라는 말이 유래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을 통하여 아일랜드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구심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1905년그리피스의 주도하에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새로운 조직 신페인당(Sinn Fein, 켈트어로 ‘우리 스스로’라는 뜻)이 결성되었습니다. 신페인당을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치열한 투쟁을 통하여 절반의 성공이기는 하였지만 마침내 1914년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신교도가 많은 얼스터 지방을 중심으로 한 자치 반대운동과 때마침 터진 제1차대전을 빌미로 영국은 일방적으로 아일랜드 자치를 연기하였습니다.
영국정부의 일방적 연기에 분노한 아일랜드인들은 1916년 부활절에 더블린(아일랜드의 현재 수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요구내용도 자치권획득에서 완전한 독립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IRB가 조직한 1,800명의 아일랜드 의용군의 무장투쟁은 6개월간 지속되었으나 20,000명에 달하는 영국군의 무자비한 진압과 지도부의 구속으로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영국정부는 이 과정에서 16명을 총살형에 처하고 재판을 거쳐 약 2,000명을 투옥하였습니다. 부활절 봉기는 패배로 끝났지만 이 과정을 통하여 아일랜드의 민족감정은 깨트릴 수 없이 단단해졌고 독립투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을 이끌어 갔던 대표적인 사람은 에이먼 드 벌레라(1882-1975)와 마이클 콜린스(1890-1922)였습니다. 더블린 봉기와 이어진 무장투쟁의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은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에 뛰어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들은 더블린 봉기와 관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출옥 후 신페인당의 당수가 된 벌레라는 1918년의 영국총선에서 아일랜드지역에서의 신페인당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신페인당을 중심으로, 선거승리를 발판삼아 영국의회에 들어가지 않고 1919년 아일랜드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를 결코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영국은 아일랜드와 전면적인 전쟁을 선포합니다. 본격적인 아일랜드의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때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던 아일랜드의 정규군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IRA입니다. 약 2년여의 전쟁을 거쳐 양측은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벌레라는 아일랜드의 협상대표로 오랜 동지인 마이클 콜린스를 런던으로 보냈습니다. 여러차례의 협상 끝에 1921년 12월 마이클 콜린스는 당시 영국수상이었던 로이드 조지와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하여 아일랜드분쟁이라는 역사적 분쟁을 종결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조약의 내용은 아일랜드인들끼리 싸우게 되는 내전을 초래했음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지는 북아일랜드 분쟁의 시발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이클 콜린스는 협상에 임하면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국제여론이 아일랜드의 편이기는 하였지만 영국의 군사력을 아일랜드가 이겨낸다는 것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힘도 아일랜드에는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콜린스는 일단 전쟁을 종료하고 새로운 조건에서 다시 아일랜드의 완전 독립을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이런 판단속에서 마이클 콜린스는 이미 신교도가 60%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얼스터 지방(북아일랜드)은 일단 영국령으로 남겨 놓고 나머지 지역만 자치국으로 하는 타협안을 받아 들였습니다. 아일랜드 국민의회는 근소한 차로 이 타협안을 비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이 타협안을 놓고 심각하게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현실적인 타협안을 지지하는 세력과 아일랜드의 완전독립, 특히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원칙적 해결을 주장하는 세력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고 이는 곧 바로 아일랜드 내부의 내전으로 번졌습니다. 신페인당의 당수였던 벌레라는 즉각적으로 반대를 표명하였고 아일랜드 자유국으로부터 이탈하였습니다. IRA도 분열하여 협상안을 지지하는 세력은 아일랜드 자유국의 정부군으로 재편되었지만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IRA로 남았습니다. 내전은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아일랜드의 분열을 막기 위해 1922년 8월 단신으로 반대파와의 대화에 나섰던 마이클 콜린스는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IRA는 내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유지한 채로 남아 북아일랜드내에서 영국군등을 대상으로 한 게릴라전을 중심으로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IRA는 1930년대 들어 아일랜드 자유국에 의해 불법단체로 규정되어 사실상 활동의 근거를 잃어 버렸고 북아일랜드에서 아주 미미하게 그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신페인당도 여전히 아일랜드의 정당으로 남아 북아일랜드에서의 영국군 철수와 아일랜드의 완전독립을 주장하는 당 강령을 중심으로 활동해 나갔습니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1937년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선언하고 나라 이름을 에이레로 선포하였습니다. 영국은 유럽의 복잡한 정세속에 이를 관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일랜드는 2차대전후인 1949년 영연방마저 탈퇴하고 아일랜드 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이 나라가 지금의 아일랜드, 즉아일랜드 공화국입니다.
이제 남은 문제, 북아일랜드를 이야기 하기 전에 마이클 콜린스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가겠습니다. 마이클 콜린스의 고민과 현실적인 타협안은 거의 매일 우리 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모습들입니다. 마이클 콜린스는 더블린 봉기를 거치며 이제 더 이상의 전쟁보다는 평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매일 벌어지는 전투가 아일랜드에는 영웅과 희생자만을, 영국에는 군사적 승리만을 가져다 주는 것을 보면서 그는 지금 수 백년의 싸움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이클 콜린스는 우선 싸움의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전면전에서 게릴라전과 정보전으로, 그리고 대중에 대한 선전과 선동을 통한 대중의 지지 기반의 확대를 중심으로 독립을 위한 꾸준하고 지속적인 싸움으로 방향을 잡아나갔습니다.
마침내 영국정부가 이런 지속적인 투쟁에 손을 들고 협상을 요청했을 때 마이클 콜린스는 자신의 임무가 거기까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협상은 1921년 7월 런던에서 신페인당의 당수인 에이먼 드 벌레라와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이미 영국은 나중에 마이클 콜린스가 받아들이는 타협안을 흘리며 아일랜드의 일정한 양보를 요구하였습니다. 현실적으로 당시의 조건상 타협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벌레라는 일정하게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협상을 다음번으로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 런던에서 열린 협상에 마이클 콜린스를 파견합니다. 그는 가능하다면 협상대표로서 그 자리에 가지 않기를 원했지만 벌레라는 그에게 그 짐을 맡깁니다. 마이클 콜린스는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벌레라는 콜린스를 변절자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며 협상파와 아일랜드 자유국에 대하여 투쟁을 선언합니다.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를 통합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가, ‘마이클 콜린스를 배반하느니 차라리 영국군의 고문속에 죽음을 당하겠다’던 그의 어릴적 친구에 의해서, 그리고 그가 창설한 IRA에 의해서 고향 코르크에서 32살의 나이로 암살당합니다. 벌레라는 이후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아일랜드 자유국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활동을 전개합니다. 수차례의 의원당선과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국제연합(UN)의 전신인 국제연맹 의장을 세차례나 맡기도 하면서 아일랜드의 위상을 높이고 오늘날의 아일랜드 공화국의 초석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완전독립된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기도 했던 그는 1975년 93세를 일기로 자연사 하였습니다.
마이클 콜린스의 타협안은 확실히 오늘 북아일랜드 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 타협안은 확실히 아일랜드 민중 모두의 염원이었던 완전한 독립을 외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타협안은 또한 아일랜드 민중의 현실적인 선택으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아일랜드 공화국은 그 타협안의 산물임을 지금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마이클 콜린스의 선택과 죽음은 어쩌면 역사가 부여한 그의 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도 그가 결국 가게 될 길을 예상했는지도 모릅니다. 벌레라의 길고 긴 활동 또한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또 다른 역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운동은 우리에게 매일매일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의 선택으로 역사가 나에게, 우리에게 부여할 짐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어쩐지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뱀꼬리 같은 이야기. <마이클 콜린스>라는 영화(1996)가 있습니다. 저의 집에 그 영화의 비디오 테이프가 있습니다. 닐 조던이 감독하고 쉰들러 리스트로 유명한 리암 니슨이 마이클 콜린스로 나온 이 영화는 제53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습니다. 영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던 영화입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켄 로치가 감독하고 킬리언 머피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입니다. 아일랜드 자유국의 성립을 놓고 서로 생각이 다른 형제간의 갈등과 고통을 그린 이 영화는 제59회 칸 영화제(2006)에서 작품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마이클 콜린스의 타협안과 아일랜드 자유국에 대하여 바라보는 시각에 다소 차이가 있는 영화입니다. 아일랜드 분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제 현재 진행중인 북아일랜드 분쟁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영국령으로 남겨진 북아일랜드는 제한된 주권과 의회를 갖는 자치령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독립한 아일랜드는 자신들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이제 북아일랜드의 문제는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구교도의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신교도는 인구의 70%에 달하는 압도적인 지위와 영국정부의 힘을 업고 북아일랜드에서의 독점적인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선거제도(게리 맨더링)와 선거권, 세제를 통하여 구교도가 의회에 진출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법, 행정, 교육, 사회복지 등 모든 분야에서 신교도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들만을 위한 정치가 시행되었고 거주지역이 구분되는 등 구교도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구교도인 아일랜드인은 말하자면 2등국민에 불과했습니다. 1960년대 들어 구교도들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전개한 흑인민권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북아일랜드의 영국지배를 인정할테니 구교도도 평등하게 대우해달라는 평등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시위와 연좌농성, 평화행진등을 주요한 운동방식으로 한 이 운동은 한때 북아일랜드에서의 주요한 투쟁으로 자리잡았지만 영국정부와 신교도 중심의 북아일랜드 정부가 이러한 평화운동마저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구교도들의 투쟁은 점차적으로 그 규모나 시위방법이 확장되고 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 IRA의 공식활동재개 선언과 이에 맞선 신교도의 얼스터 민병대 조직으로 이제 시위는 양측의 무력충돌, 끊임없는 보복과 보복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북아일랜드의 행정과 치안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영국정부는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1972년 영국군을 주둔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북아일랜드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되었습니다.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아일랜드 시위대에 대한 영국군의 발포로 13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유혈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The Bloody Sunday)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북아일랜드는 이제 끝없는 유혈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유명한 사건은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세계적인 록 그룹인 U2의 Sunday Bloody Sunday라는 노래로도 알려진 바로 그 사건입니다. 1972년 3월 영국정부는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회수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후 하루가 멀다하고 수도 벨파스트를 포함하여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폭파사건과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1972년 한 해동안 이러한 유혈분쟁속에서 사망한 사람이 468명에 이르렀습니다. 1979년의 마운트바텐 총독 폭탄공격, 1984년 영국보수당 전당대회 폭탄공격, 1991년 존 메이져 총리관저 박격포 공격 등이 이어졌습니다. 30년 동안 이 분쟁으로 약 3,20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 글 처음에 언급하였던 단식투쟁도 바로 이런 북아일랜드 분쟁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속에서 영국지배를 인정하면서 구교도의 권리회복에 중심을 두었던 구교도의 정당인 사회민주노동당은 지지기반을 점차 잃어가고 북아일랜드로 거점을 옮긴 신페인당의 완전독립이 아일랜드인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점차로 해결불능사태에 빠져드는 북아일랜드 사태와 국제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영국정부, 아일랜드 공화국내 아일랜드인들의 부채의식과 북아일랜드인에 대한 동정심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아일랜드 공화국, 그리고 미국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미국계 아일랜드인등의 요청에 의하여 개입을 자처한 미국 등에 의하여 북아일랜드 분쟁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85년 영국과 아일랜드 간에 북아일랜드 문제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신교도와 구교도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1990년 영국총리가 된 보수당의 존 메이져는 다시 평화협정을 추진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그동안 불법단체로 간주하던 신페인당의 게리 애덤스 당수와 회담을 갖고 신페인당을 분쟁해결의 한 당사자로 인정하면서 분쟁해결의 단초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신교도와 구교도측은 협상의 진전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하여 무력사용 중단을 선언했고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신교도 정당과 구교도 정당이 참여하는 평화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7년 취임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도 이를 이어 받아 적극 추진하였고 미국정부는 상원의원과 하원의장을 역임했던 조지 미첼을 이 평화협상의 의장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마침내 1998년 4월 10일 북아일랜드의 자치와 구교도와 신교도의 평등한 대우를 골자로 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94%, 북아일랜드에서 71%가 찬성하고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 북아일랜드 구교도측의 얼스터연합당, 민주연합당, 그리고 신교도측의 사회민주노동당, 신페인당을 비롯한 모든 북아일랜드의 정당이 공동서명한 이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총선을 통해 108석의 북아일랜드 의회를 구성한다.
2. 선거를 통해 각 정당 비례대표 12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행정부의 기능을 수행한다.
3.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가 자국의 영토라는 헌법조항을 삭제한다.
4. 준군사조직인 IRA와 신교도 자위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정치범을 석방한다.
5. 대부분 신교도로 이루어진 경찰에 아일랜드인도 참여하도록 경찰구조를 개혁한다.
1998년 6월 실시된 총선거와 이후 자치정부의 구성까지는 일정대로 진행되는 듯하였습니다. 총선결과 의회가 구성되었고 다수당인 얼스터 연합당의 당수 데이비드 트림블이 자치정부의 수반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벨파스트의 봄은 짧았습니다. 정치일정이 진행되는 것과는 무관하게 현실에서 구교도와 신교도의 불신과 증오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곳곳에서 여전히 시위와 방화가 이어졌고 경찰과의 충돌 또한 계속되었습니다. IRA는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속에서 무장해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고 이에 신교도의 얼스터 민병대도 무기반납을 거부하였습니다. 급기야 1999년 8월 15일 IRA내 평화협정을 반대하며 분화한 '진정한IRA'(Continuity IRA)가 주도한 폭탄공격으로 29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최악의 유혈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자치정부의 구성은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였습니다.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고 1999년 자치정부가 구성되기는 하였으나 다시 신.구교도의 충돌과 방화가 벌어지면서 영국정부는 다시 2000년 2월에 북아일랜드에 대한 자치정부의 기능을 박탈하고 직접통치에 들어갑니다. 자치정부가 구성되었다가 사태가 악화되면 다시 영국정부가 직접통치하는 악순환이 이후에도 몇 차례 계속되었습니다.
현재도 북아일랜드는 영국정부가 아일랜드의 제정파와 협의를 가지면서 직접통치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예전만큼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신.구교도의 갈등과 충돌, 그리고 폭력적인 공격과 폭탄공격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경찰권은 거의 신교도가 장악하고 있으며 영국 주둔군도 철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구교도는 거주지역도 다르고 학교도 다릅니다. 북아일랜드에는 통합거주지역도 통합학교도 찾을 수 없는 실정입니다. 정치적으로 통합된다 하더라도 이미 수 백년간 종교와 문화를 달리해 온 이들이 사회적으로 통합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북아일랜드의 평화는 멀어만 보입니다.
오늘 민족의 명절이라는 한가위에 민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오랜 역사속에서 하나의 문화와 언어를 공유해 온 집단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문화와 언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서로 다른 종족간의 교류를 통하여 형성되고 정리된 산물이며 민족 또한 그러한 종족들의 통합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하여 단일민족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여러 종족의 통합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라는 한 공간에서 형성된 생활과 문화, 언어의 집합체에 불과합니다. 결국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의 원시공동체 단위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라는 시간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하나의 종족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수 백년 혹은 수 천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최초의 종족 혹은 민족이라는 카테고리를 넘어서 새로운 종족, 민족이라는 카테고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오랜 시간을 두고 지속된다면 그 공동체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가 다원적인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지만 이 나라들이 하나의 생활공동체로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된다면 그 때 지구상에는 일본족, 미국족, 중국족이 존재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민족이라는 말이 갖는 배타성과 폐쇄성에 대한 열린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자연스러운 민족의 형성이라 한다면 근대에 들어서면서, 특히 18C 이후 근대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체제가 출현하면서 국가의 지배계층은 위로부터 민족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제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지배계급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제국주의 전략에 유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민족분쟁은 바로 이러한 지배계급, 특히 자본주의체제가 형성된 이후에는, 부르주아계급의 이익을 관철하는 과정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민족통합, 민족제일주의는 가장 손 쉽게 지배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고 노동계급을 지배계급의 사회구조로 편입시킬 수 있는 방법임을 역사는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찌즘이나 파시즘, 그리고 소위 국가사회주의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일컬어지는 스탈린 체제나 주체를 앞세운 북한체제도 이 범주와 다르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진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현재 존재하는 민족분쟁을 넘어서는 새로운 민족분쟁 또한 이 연장선에 있습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충돌이나 서방세계와 이슬람세력의 충돌을 동서의 충돌, 혹은 문명의 충돌로 바라보는 것은 지배계급의 시각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분쟁 또한 자본주의체제에서 지배계급이 세계를 지배하고자 위로부터 민족 혹은 문명이라는 것을 조작함으로서 초래한 허구적인 민족 분쟁입니다.
민족분쟁 혹은 민족문제를 바라보는 노동계급의 시선은 달라야 합니다. 한정된 지구자원이라는 조건속에서 이전투구를 일삼는 자본주의체제를 앞에 두고 민족을 앞세우는 관점을 견지한다면 세상의 변혁을 이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북아일랜드 분쟁이 민족간의 충돌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 한 평화는 쉽게 찾아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슬람과 서방세계의 충돌을 문명의 충돌, 혹은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 운운으로 이해한다면 민족간의 분쟁은 더욱 확대될 것입니다. 자본주의라는 야만성이 분쟁을 필연화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민족분쟁의 종결과 평화라는 지구적 과제에 대한 노동계급의 역할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10월 3일,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해 죽음으로 저항했던 보비 샌즈를 비롯한 10명의 아일랜드전사를 생각하며, 19C 아일랜드의 문예부흥운동을 이끌었고 아일랜드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시인 W. B. 예이츠(1865-1939)가 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를 여러분과 함께 읽어 봅니다.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그곳에 흙과 작은 나뭇가지로 엮은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아홉 줄 콩 심은 이랑에,
벌들이 모여 살 벌통 하나 놓아두고서,
벌들 윙윙대는 그 숲 속 빈터에서
홀로 살아가리라.
나 거기서 얼마간의 평화를 얻게 되리라.
평화란 더디게 방울져 내리는 것이기에,
아침의 베일들로부터
귀뚜라미 노래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방울져 내리는 것이기에.
그곳은 깊은 밤 내내 희미한 빛 명멸하는 곳,
한낮이 자줏빛으로 타오르는 곳,
그리고 저녁은 방울새의 날개 짓으로 가득한 곳.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밤낮으로 나지막하게 찰랑이는
호수의 잔물결 소리 내 귀에 들리기에
차도 한 복판에 서있어도,
회색 보도에 서 있어도
내 마음 깊은 곳 중심에선
그 소리를 듣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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