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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모음]양경규의 "오늘"

민주노총 창립일에 기억해야 할 죽음

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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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민주노총 창립일에 기억해야 할 죽음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 10년 연표는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대의원대회를 서울 연세대학교 강당에 개최. 가맹노조 866개 노조 41만여 명의 조합원을 대표해 566명의 대의원과 국내외 귀빈 500여 명이 참여해 창립대의원회를 열고 공식 출범. 초대 위원장에 권영길, 수석부위원장 양규헌, 사무총장 권용목 준비위 공동대표를 각각 선출. 민주노총의 선언과 7개항의 강령, 20개의 기본과제, 규약을 519명의 대의원이 투표에 참가하여 506명의 찬성으로 확정. 사업계획안과 예산안을 확정하고 조합원 1인당 의무금 200원 납부와 1만 원의 창립기금 모금을 기립박수로 통과시켰으며 국제자유노련(ICFTU) 가입을 결의하는 한편 가입 시기는 중앙위원회에 위임했다. 정치세력화, 공동교섭 및 공동투쟁, 경영참여 확대 및 사회개혁운동 등을 주요 활동 목적으로 결의.”



앞줄에서 세 번째 자리엔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전문노련 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성원이 확인되고 노동열사에 대한 묵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될 때, 자리 곳곳의 대의원들과 이 역사적인 자리에 참가하기 위해 수많은 형극의 세월을 견뎌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민주노조의 깃발을 부여잡고 달려 온 지난 세월의 고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차디찬 쇠창살아래 몸을 누이던 그 아픔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어느 양지바른 언덕에 묻었던 맑은 영혼의 옛 동지를 떠올리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떠난 동지를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어느 작업장 후미진 곳에서 피로 쓴 유서 한 장 남기고 목을 맨 동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코 투쟁을 멈출 수 없다면서 웃으며 들어갔던 감옥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 온 동지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최루탄에 맞아 피흘리며 자신의 가슴에서 숨져간 동지, 자신의 몸을 노동해방의 제단에 한 점의 불꽃으로 던진 동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두들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바로 그들을 위한 애달픈 헌사임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민주노총의 새로운 출범, 새로운 행진이 바로 이들 ‘임’을 위한 행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하던 뜨거움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왔습니다. 어느 사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이내 시야가 흐릿해졌습니다. 무어 얼마나 대단한 운동을 했다고 할 수도 없는 저도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민주노총이 창립되던 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울었습니다.

  

오늘 민주노총 창립일, 그렇게 그날 동지는 간 데 없지만 최후의 한 사람까지 나부끼는 깃발 들고 달려 왔던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의 가슴에 고인 피눈물을 닦아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그날전태일을 생각했습니다. 김경숙(YH무역), 이석규(대우조선), 문송면(협성계공), 박진석(대우조선), 이상모(대우조선), 김봉환(원진레이온), 박창수(한진중공업), 권미경(대봉), 양봉수(현대자동차)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그날 올렸던 깃발, 민주노총은 그들이 그토록 살고 싶고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이었던 것입니다.

      


 

1995년 오늘 11월 11일, 민주노총이 창립된 날, 민주노총의 제단에 피를 뿌리며 숨져간 동지들을 다시 생각하며, 바로 오늘, 노동자의 내일을 위해 자본주의의 야만에 저항하며 싸우다 교수대에 올랐던, 8시간 노동제를 위해 싸우다가 쓰러져 간 노동자들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123년 전 오늘, 1887년 11월 11일, 미국 시카고, 4명의 노동운동가가 교수대에 올랐습니다. 사형집행인은 이들을 목매달 올가미 앞에 정렬시켰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오거스트 스파이즈, 아돌프 핏셔, 조지 엔젤, 앨버트 파슨즈였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덮었던 천이 벗겨지고 사형집행인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 모두 조금의 동요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숙하고 비장한 목소리로 그들은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침묵이 오늘 우리를 목매다는 당신들의 사형명령 소리보다 훨씬 강력해지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 오거스트 스파이즈

  

“지금이 내 일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다.” - 아돌프 핏셔

  

“무정부주의 만세!” - 조지 엔젤

  

“미국의 양반들,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겠다고? 보안관! 나에게 말을 하라고? 그 전에 당신들 모두는 민중의 소리를 먼저 들어라!” - 앨버트 파슨즈

 

그들을 교수대에 올린 사건은 그들이 숨져갔던 날로부터 약 1년 6개월 전인 1886년 5월 4일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의 폭탄투척 사건이었습니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의 집회는 그 전 날인 5월 3일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폭력진압으로 6명의 노동자가 사망한데 대한 항의집회였습니다. 이 항의집회에서 다시 경찰과 노동자의 충돌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어디선가 날아 온 폭탄으로 7명의 경찰과 노동자 4명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경찰과 자본가들, 그리고 보수적인 단체들과 목사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하여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 공세에 나섰습니다. 권력과 자본은 그 치열한 전투성으로 자본에 저항하며 노동운동의 토대를 강화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확장시켜 가던, 1880년대 미국의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노동운동을 압살하고자 하였습니다. 재판이 진행된 4개월 동안 전 미국의 자본과 권력은 추악한 선동과 모함을 일삼으며 노동운동에 폭력, 살인, 음모, 사회전복, 법과 질서의 추락 등의 이름을 갖다 붙이며 필사적으로 노동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을 차단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단절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습니다. 조작된 증거와 날조된 증인들이 동원된 얼치기 재판은 결국 이들을 주모자로 몰아 교수대에 세웠습니다.

 

아마도 다들 아는 사건이고 한 번쯤은 들어 본 이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 민주노총이 창립된 날, 그 투쟁의 삶을 마감한 날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동지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열사들의 피로 세운 우리들의 결사, 민주노총, 그러나 우리의 민주노총의 창립이 단순히 이 한반도의 남쪽 땅의 투쟁의 산물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민주노총의 창립은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끝없이 싸워 온 전 세계 노동자들의 피와 눈물의 투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민주노총이 창립된 날, 똑 같은 날, 먼 훗날 한반도의 남쪽 땅에 새롭게 써질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노동자들을 다시 기억해 보고자 합니다.

 

19세기 후반 미국자본주의가 그 발전을 거듭해 가던 시기에 미국의 노동운동은 폭발적인 투쟁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역사에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노조결성투쟁이 가장 강력하게 일어났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미국의 개괄적인 19세기 노동운동사에 대해서는 오늘-서른 아홉 번째 사코와 반제티 참조). 당시의 투쟁은 단순한 노자간의 충돌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권력에 의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던 살육과 학살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운동은 성장해 나갔습니다. 자본은 권력으로부터 부여 받은 온갖 이권을 통해 이윤을 창출해 나갔습니다. 기업합동을 통해 거대 독점자본을 형성한 자본가들은 이를 무기로 미국사회 전반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끝없이 추락했습니다.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최저 임금과 14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 살인적인 산업재해에 노출되어 있던 노동자들의 유일한 생존의 길은 노동조합을 통한 투쟁이었습니다. 1875년의 펜실베니아 탄광파업, 1877년 전국단위의 철도 총파업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투쟁이었습니다.

  

1870년대 이후 자본은 공업화의 진전과 함께 전체 미대륙 전체를 자본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시장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자본의 통제는 미대륙 전체에 미치기 시작했고 이런 통제의 가장 중요한 기제는 철도였습니다. 1860년 3만 1천 마일에 불과하던 철도는 1870년에 5만 3천 마일로 10년 사이에 거의 두배 가까운 확장을 이루어냈습니다. 또한 자본은 정치권과 돈을 매개로 한 정경유착을 통해 노동통제에 대한 물리적 탄압을 무시로 펼쳐 나가면서 신대륙의 그 넓은 땅을 권력으로부터 무상으로 혹은 사기로 점유하면서 전 국토를 자본의 손아귀에 넣어가고 있었습니다. 1860년에서 1870년까지 10년 사이에 공업생산물의 총가치는 100%이상 늘어났고 전 산업에 투자된 자본은 1859년 10억 1천만 달러에서 1869년 16억 950만 달러로 증가하였습니다.

 

이런 자본의 전면적인 미국사회에 대한 통제와 지배는 노동운동에게 전국적인 조직화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었습니다. 이미 공장단위, 지역단위의 직업별노조가 전국조직화 되어 가고 있었던 미국의 노동운동은 이런 직업별노조를 묶어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싸우는 총단결의 전국조직 결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866년 볼티모어에서 결성된 전국노동조합동맹(National Labor Union : NLU) 결성을 시작으로 1869년 노동기사단(Noble Order of the Knight of Labor), 1881년의 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 AFL) 등 전국단위의 노동조합 조직을 결성하면서 미국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대중적 기반과 조직적 토대를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1880년대 들어서며 미국의 자본주의는 더욱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이제 금융자본과 독점자본의 놀이터인 월가(街)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자본들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물가와 임금을 통제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기업합동을 만드는데 너나 할 것 없이 뛰어 들어 미국자본의 힘은 더욱 막강해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민중들은 자유와 평등의 땅 미국이 이제 막다른 골목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 자본의 폭압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고 그들이 쌓아올리는 이윤의 탑은 무너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정부와 두 개의 정당은 자본의 지배하에 들어 갔고 언론계 교육계 종교계는 모두 자본의 나팔수가 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이 노동자는 미국의 적이 되어 가고 있었고 파업을 하는 노동자는 미국을 파괴하기 위해 유럽에서 넘어 온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신문은 연일 노동자들에게는 몽둥이가 제일 좋은 약이라는 선동을 일삼았습니다.

 

1883년 다시 공황이 시작되면서 노동자들의 빈곤과 실업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죽을 수는 없다는 각오로 투쟁에 나섰습니다.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습니다. 파업의 양태는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연발생적인 파업의 비중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1800년대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얼마나 격렬하게 진행되었는지는 미국 노동통게국의 자료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1881년과 1890년 사이에 파업과 공장폐쇄가 9,668건이나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1886년 한 해에만 파업 1,432건과 공장폐쇄 140건이 있었고, 거기에 관련된 노동자는 610,024명이나 되었습니다. 1880년대의 파업 중에서 노동조합이 주도하지 않은 파업의 비율은 대략 39%나 되었는데 이는 미국 노동자들이 당시 얼마나 자발적으로 치열하게 투쟁했는지를 보여 주는 한 예라 할 것입니다(현대 미국 노동운동의 기원, 멜빈 듀보프스키).

  

이러한 투쟁의 정점에 있었던 것이 바로 1886년 5월 1일에 있었던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총파업이었습니다. 미국 노동자들은 1870년대 이후 지옥 같은 삶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이 주장은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고 노동자들 스스로도 하나의 구호로서 이 주장을 내세웠지만 그 실현 가능성을 확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1883년 미국 자본주의에 공황이 시작되고 노동자의 삶의 조건이 더욱 추락하면서 8시간 노동제의 문제는 이제 구체적인 투쟁과제로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8시간 노동제추진 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러한 8시간 노동제에 대한 전국적인 열기를 모아 미국노동총동맹(AFL)이 1884년 년차대회에서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해 1886년 5월 1일 하루 동안 총파업에 들어 간다는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8시간 노동제는 미국의 노자간에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습니다. 8시간 노동제가 노동자들의 가장 중요한 투쟁과제로 부각되고 불황국면에서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미국 노동운동의 조직력과 투쟁력은 최고의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1885년 한 해 동안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과 집회현장에서 8시간 노동제는 가장 중요한 구호이자 캐치플레이즈로 등장하였습니다.

 

1886년 들어 이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으며 전국의 노동자와 모든 노동조합 조직들은 1886년 5월 1일의 투쟁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 중 1869년에 창립되었던 노동기사단은 1885년에 10만에 불과하던 조직원이 1886년 경에는 70만으로 확대되기도 하였습니다. 노동기사단의 단장이었던 테렌스 파우덜리의 소극적이고 반동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노동기사단의 모든 지역 조직들은 8시간 노동제 투쟁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때까지는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던 미국 노동총동맹 또한 산하의 모든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5월 1일의 총파업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습니다.

  

자본은 이러한 새로운 노동운동의 폭발적인 고양을 우려하면서 노동운동을 파괴할 기회를 쫓고 있었습니다. 미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학살과 체포가 이어졌습니다. 자본의 포로가 된 보수적인 언론들은 5월 1일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들이 미국에 파리 꼬뮌을 만들려고 하는 날로써 이날 미국 노동자들은 무장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며 공포 분위기를 통해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와 투쟁열기를 잠재우려 하였습니다. <뉴욕타임즈>는 8시간 노동제 추진운동은 비미국적인 운동이며 노동자들의 요구와 소란은 외국인들의 선동 때문이라며 늘상 그렇듯이 노동운동에 이념적인 색깔을 덧칠하고 있었습니다.

  

5월 1일이 다가오면서 전국은 보수언론의 표현대로 노동자들은 '8시간 미치광이'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시위와 집회가 계속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낮에는 집회로, 밤에는 횃불시위를 통해 5월 1일의 총파업으로 열기를 모아가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의지를 모아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노라.

그들의 행군을 보라.

모든 압제자들이 떨고 있구나.

저들의 권력도 사라졌구나.

그대 노동 기사들이여, 요새를 향해 돌진하여라.

승리를 위해 압제자의 법 같은 건 쓸어 버리고,

만인의 평등한 권리을 위하여.”

 

이러한 8시간 노동제 총파업이 가장 힘 있게 준비되고 있는 지역은 시카고였습니다. 시카고 노동운동은 일찍부터 가장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노동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유럽의 무정부주의적 노동운동(생디칼리즘)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지역으로 이 지역의 주요한 활동가들중에는 무정부주의자가 많았습니다. 그런 만큼 시카고는 가장 격렬하고 치열한 싸움이 예정되어 있었고 자본은 시카고의 노동운동을 파괴해야 미국 노동운동의 힘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시카고에서는 3월과 4월 내내 숨막힐 듯한 긴장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5월 1일에 파업할 것을 결의하는 노동자들은 매일 수천명씩 늘어났습니다. 3월에 가구 노동자, 기계 노동자, 가스 노동자, 연관공, 벽돌공, 주물공, 운수 노동자들이 파업을 결의했고 4월 들어서는 석탄 운반공, 미장공, 푸줏간 노동자, 완구공장 노동자, 신발 노동자, 양품점 점원, 인쇄공 등이 파업대열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자본은 주 방위군을 동원하고 핑커튼 단원(스코틀랜드 태생의 알란 핑커튼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세운 사설흥신소로 노동운동에 대한 푸락션 활동과 파업파괴를 전문으로 하였음, 지금으로 말하면 용역깡패집단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사설흥신소가 너무나 유명했으므로 지금도 미국에서 핑커튼이라는 말은 파업파괴용역업체를 일컫는 하나의 일반명사가 되었음)을 증강시키고 경찰병력을 최대한 집결시키며 5월 1일의 파업에 대비하고 나섰습니다. 시카고의 신문들은 연일 5월 1일의 파업을 음해하고 모함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시카고의 신문들은 시카고 8시간 노동제추진 동맹의 중심이었던 오거스트 스파이즈와 앨버트 파슨즈에 대하여 선동적인 공격을 벌였습니다.

  

“시카고를 혼란에 빠뜨리는 8시간 노동제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놈들은 스파이즈와 파슨즈다. 이 공산주의 놈들을 가로등에 매달아 죽여야 한다.”

<시카고 트리뷴>

  

“시카고에는 두 명의 위험 인물이 도사리고 있다. 이 뻔들뻔들한 겁쟁이들이 자꾸만 말썽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하나는 파슨즈라는 놈이고 하나는 스파이즈라는 놈이다..... 그 놈들을 감시하라. 그 놈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5월 1일에 일어날 모든 사건의 주모자는 그 놈들이다. 만약 사건이 터지게 되면 그 놈들을 뭇사람의 시범으로 처단하라.” <시카고 데일리>

  

1886년 5월 1일, 토요일,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총파업의 중심도시 시카고는 더 없이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토요일이었지만 정상적으로 작업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공장의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았고 기계소리는 멈추었습니다. 상가도 건축 공사장도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수만명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시카고의 미시간 거리로 몰려 나왔고 거리에서는 노동자의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거리 곳곳에 무장 경찰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주 방위군 본부에는 군인들이 기관총을 앞세우고 시내 진격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려했던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평화적인 시가행진이 진행되었고 노동자들은 이날의 집회를 즐기고 있었으며 노동자들의 연대를 확인하며 노동자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었습니다. 보수 언론이 떠들었던 유혈사태도 파리 꼬뮌을 만들 것이라는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날 5월 1일의 총파업은 위력적이었지만 평화적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8시간 노동제로 뭉쳐진 노동자의 힘을 확인하였으며 머잖아 그 지옥 같은 장시간 노동을 벗어나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집회가 평화적으로 종료된 것에 대해 안도해야 할 자본과 경찰은 오히려 노동운동에 대한 일대 공세의 기회를 삼으려 했던 것이 무산된 것에 적잖게 당황스러워 했습니다. 다음날, 5월 2일, 일요일, 경찰은 파업 농성중이던 맥코이 농기계 공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화풀이에 나섰습니다. 경찰은 농성진압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저항하자 이들을 경찰봉과 방패로 폭력을 휘둘렀고 노동자들이 달아나자 그 등 뒤에 총을 난사하였습니다. 6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참변이 발생했습니다. 시카고의 노동자들은 즉각 비상대책회의를 통하여 이를 규탄하는 항의 집회를 5월 4일 저녁, 헤이마켓 광장에서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시 시카고에는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앨버트 파슨즈는 토요일의 파업집회 다음날, 다른 도시 노동자들을 지원 연대하기 위하여 시카고를 떠났다가 5월 4일 돌아와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파슨즈는 헤이마켓 광장으로 달려 갔습니다. 헤이마켓 광장을 채우기에는 모인 노동자의 숫자가 부족했습니다. 빈 마차 한 대로 연단을 마련하고 규탄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광장 바로 옆의 경찰서에는 기동경찰들이 여차하면 집회를 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회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스파이즈와 파슨즈, 그리고 그외 시카고의 노동자들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폭력사태를 우려하며 이 집회의 대오에 섞여 앉아 있던 시카고 시장은 집회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고 경찰에게 경찰병력의 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집회는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몇몇 노동자들은 이미 광장 주변의 술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파슨즈는 몇 몇 노동자와 함께 주변의 술집에서 이후 투쟁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들이 닥친 것은 바로 이런 때 였습니다. 경찰서장은 집회의 해산을 명령했고 시카고 노동자협회의 간부였던 샘 필덴은 서장에게 평화적인 집회에 경찰이 오히려 공포를 조성하고 있다며 물러나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대화가 오가던 그 잠깐의 순간에 갑자기 대열가운데로 폭탄이 투척되었고 헤이마켓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붉은 섬광이 번쩍하면서 폭음이 터졌다. 누군가가 폭탄을 던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청중들은 어쩔 줄 몰라 갈팡질팡했고, 경찰은 난폭하게 마구 총을 갈겼다. 노동자들은 부상당하고 쓰러지고 짓밟혔으며, 경찰을 향해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달아났다. 경찰들은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 폭탄 사건으로 7명의 경찰과 4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습니다. 다음날부터 시카고를 비롯한 전국에서 이 사건에 대한 선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외국놈들에 대한 복수를 선동하는 목소리가 전 미국에 소용돌이 쳤습니다. 권력과 자본은 이 사건을 통해 그 동안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전투적인 노동운동에 대한 일망타진을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소행인지 전혀 입증된 바가 없었지만 언론들은, 그리고 자본은 당연하게 이러한 폭력행위를 저지른 것은 노동자이며 바로 스파이즈와 파슨즈 같은 혁명적 노동운동가들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한 국민의 복수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보수 언론은 한결같이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를 규명하기 보다는 이런 폭력이 일어나도록 조장한 스파이즈와 파슨즈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을 처형해야 미국의 법과 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논조를 내세웠습니다. 나아가 언론은 사실에 대한 날조와 왜곡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군중들은 피에 굶주려 미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땅에 엎드린 채 경찰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다.” <뉴욕 트리뷴>

  

“국민은 암살도당 오거스트 스파이즈, 마이클 슈왑, 샘 필덴을 살인죄로 처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암살도당 앨버트 파슨즈도 즉각 체포하여 살인죄로 처형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놈이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미국의 수치다.” <시카고 트리뷴>

  

경찰은 언론이 조장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노동운동가에 대한 일대 소탕에 나섰습니다. 시카고의 감옥들은 거리에서 무작정 연행한 외국인들과 노동자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경찰은 범인을 검거한다는 핑계로 노동운동가의 집을 무단히 칩입하였고 모든 노동조합 사무실을 습격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각 지역의 경찰들은 지역내 모든 노동운동가들을 종래에 있었던 작은 사건들을 걸어서 일제히 체포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일대 공세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시카고 경찰은 현장에서 체포한 스파이즈와 샘 필덴을 비롯하여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마이클 슈왑, 조지 엔젤, 아돌프 핏셔, 루이스 링, 오스타 니이베, 그리고 앨버트 파슨즈 등 시카고의 노동운동 지도부들을 모두 살인죄로 기소하였습니다. 파슨즈는 사건 직후 이 사건이 권력과 자본이 노동운동을 압살하기 위한 음모이며 자신들을 이 날조극의 제물로 삼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도피하였습니다. 경찰은 파슨즈에 대하여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는 한편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재판을 속전 속결로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첫 재판은 사건 발생 50일도 되지 않은 6월 21일에 열렸습니다. 첫 재판이 열리던 날, “재판장, 나 앨버트 파슨즈, 재판 받으러 왔소”라며 앨버트 파슨즈가 법정에 자진출두 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재판을 통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파슨즈는 동지들과 함께 하기 위해 자수했던 것입니다. 훗날 파슨즈는 자신이 재판정에 출두한 이유를 동지들에게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나는 법정에 서게 되면 어떤 결말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네! 저 놈들은 날 죽일테지. 그러나 나의 동지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만이 자유의 몸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 죄가 없는데도 말일세.”

  

재판은 일사천리 였습니다. 날조된 증거와 매수된 증인들이 줄줄이 나와 이들이 폭탄투척을 모의했음을, 그리고 그 중 하나가 폭탄을 투척했음을 확인시켰습니다. 나아가 검찰과 증인은 입을 맞추어 이들이 이 사건을 통해 폭력으로 미국정부를 쓰러뜨리려 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직접 폭탄투척을 모의하고 실제 실행에 옮겼다는 증거는 입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검찰은 결국 폭탄 투척을 누가 했건 그 자가 폭탄을 투척한 것은 피고인들의 선동때문이었다고 방향을 틀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무리한 기소였고 무리한 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들을 제물로 노동운동을 압살하고 자본주의의 탄탄대로를 구축하려는 권력과 자본에게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재판은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되었고 권력과 자본에 조종되었던 배심원단은 이들에 대해 모두 유죄평결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양심적인 지식인과 언론인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이들의 무죄를 위해 투쟁했지만 권력과 자본은 끝내 이들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로 향하는 권력과 자본의 칼날 앞에서 이들은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삶이, 노동자를 위해 싸워 왔던 자신들의 운동이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결코 타협하거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가 이들에게 최후 진술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가능한 이들이 남긴 최후 진술을 옮기려고 합니다. 오늘 민주노총이 창립된 날, 새로운 운동의 미래를 한 번 더 고민하고 마음을 추스리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유일하게 사형을 면하고 15년의 징역형을 받게 되는 니이베가 가장 먼저 최후진술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보았다. 이 도시에서 빵집 노동자들이 개새끼처럼 취급되는 것을....... 나는 그들이 조직되는 것을 도왔다. 이것이 커다란 죄란 말인가? 이제 그들은 예전처럼 14시간이나 16시간씩 일하는 대신에 단지 10시간을 일하게 되었다....... 이것도 죄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 이른 아침 맥주 양조장의 노동자들이 아침 4시에 출근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밤 7시나 8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대낮에 자기 아내와 자식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이들을 조직했다..... 그리고 재판장, 이밖에도 죄지은 것이 있다. 나는 잡화상의 점원들이 밤 10시나 11시까지 일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을 충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저녁 7시까지만 일하고 일요일에는 쉬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큰 죄가 아닌가.....”

  

“나는 여기 있는 동지들과 똑 같은 죄를 범했다. 그들을 사형에 처할 것이라면 나도 사형에 처해 달라.....”

 

1848년생으로 38세에 불과 했지만 시카고 노동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던 앨버트 파슨즈, 스파이즈와 함께 시카고 노동자협회를 창립하고 8시간 노동제 쟁취투쟁의 중심이었던 앨버트 파슨즈의 최후 진술이 이어졌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나의 일생은 흔히 그렇게 부르고 있는 바 그대로 노동운동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다. 나는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를 무정부주의자니 사회주의자니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다..... 나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생산의 도구들을 자유로이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생산된 물건에 대해 생산자로서 나누어 가질 권리가 공평하게 주어진 사회를 원한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 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스스로가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나의 이웃과 나의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나는 노예들을 시켜 내 대신 일하도록 부려가면서 살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제일 먼저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자본가들 아니었던가? 그 놈들에게 총알 세례나 퍼부으라고 말한 것은 누구인가? 펜실베니아 주지사 톰 스코트 아닌가? 놈들에게 흥분제나 먹여 주라고 한 것은 <시카고 트리뷴> 아니었던가?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추진운동을 분쇄하기 위하여 뉴욕으로부터 특파된 자본가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추악한 음모의 희생자들이란 말이오.“

  

5월 1일 메이데이 행사 때마다 누군가 꼭 한 번은 다시 되살려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 가라!”

  

시카고 8시간 노동추진제동맹의 서기장이었던 오거스트 스파이즈의 최후진술입니다. 31세의 나이로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노동운동가이자 혁명가 였고 언제나 가슴 뭉클한 연설로 대중의 심금을 울렸던 스파이즈는 저들이 그렇게도 저주하는 외국인, 즉 독일계 이주민이었고 무정부주의자 였습니다. 그런 만큼 스파이즈는 이 사건의 핵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재판의 과정에서 누군가를 꼭 죽여서 이 사건을 종결시키고 싶다면 자본의 구미에 제대로 들어 맞는 자신을 제물로 삼고 다른 동지들을 풀어 주라고 요청했습니다. 재판 내내 굴하지 않는 투사의 모습을 보였던 스파이즈는 노동운동사에 남는 최후진술을 남겼습니다.

  

“재판장!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 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그러면서도 해방되기를 애타게 원하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다면 말이다! 그렇다. 재판장,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면 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고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이제 나의 사상에 대해 말해 주겠다. 그들은 나의 일부이다. 나는 그들을 버릴 수 없다. 아니, 버릴 수 있더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 그리고 그대가 만약 이 같은 우리의 사상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만약 우리를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우리의 사상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만약 진리를 말했다고 해서 그대가 그 국민을 사형에 처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목을 그대에게 주겠노라! 자 어서 사형집행인을 불러라!...... 진리를 말하다 죽은 선인들이여, 소크라테스여, 그리스도여, 부루노여, 그 밖에 진리를 위해 싸우다 죽은 수많은 선조들이여, 그들은 죽었으되 진리는 영원히 살아 있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르겠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어서 사형집행인을 불러라!”

 

1886년 9월 9일, 최종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니이베에게만 15년 형이 선고되었고 스파이즈, 파슨즈, 슈왑, 링, 필덴, 엔젤, 핏셔 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들을 위한 구명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이 일리노이주 고등법원을 거쳐 미 합중국의 최고재판소에 올라가기까지 1년여 동안 국내에서, 해외에서 이들의 사형집행을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파슨즈의 아내이자 그 자신 또 하나의 노동운동가였던 루시는 두 자녀를 데리고 전국의 현장과 언론사, 사회지도층을 찾아 다니며 7명의 구명을 위한 장정에 나섰습니다. 구명운동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미국과 세계 각국에서 탄원서가 밀려 들었습니다. 프랑스의 하원의장, 영국의 대문호 버나드 쇼와 시인 윌리엄 모리스가 이들의 구명을 위해 최후까지 노력하였지만 권력과 자본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미 합중국의 최고 재판소는 끝내 상고를 기각하고 최종적으로 사형을 확정하였습니다. 사형집행일은 1887년 11월 11일로 정해졌습니다.

  

사형집행 전 날, 필덴과 슈왑에 대하여 사형집행을 면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주는 조치가 이루어졌지만 나머지 5명에 대한 사형결정은 번복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젋은 청년이었던 링은 이날 감옥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타살인지 자살인지도 규명되지 않은 채 한 청년은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앨버트 파슨즈, 오거스트 스파이즈, 조지 엔젤, 아돌프 핏셔, 이들 4명의 노동운동가들은 교수대에서 못다 이룬 해방의 꿈을 안고 자신의 생을 접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사형집행은 폭탄 투척의 죄를 물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던 사상,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는 사실에 죄를 물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사형집행이었고 전체 미국 노동자에 대한 사형집행이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된 후 한 자본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친구들이 폭탄을 던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그 놈들은 교수형에 처해야 해. 나는 무정부주의 같은 것은 겁내지 않아. 정말이라구. 그런 건 몇몇 해괴한 박애주의자들의 공상적인 설계도에 지나지 않거든. 어떻게 보면 그 놈들은 귀엽기조차 하다구. 그러나 노동운동은 분쇄시키지 않으면 안 돼! 이 놈들을 죽이고 나면 노동기사단도 다시는 감히 말썽을 일으키지 못할테지.”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그러나 스파이즈의 말 처럼 그들의 목숨이 떨어진다 해서 노동운동의 목숨이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외쳤던 8시간 노동제는 이제 전체 미국으로, 그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의 요구가 되어 확산되어 나갔고 노동운동은 꺼지지 않는 들불로 살아났습니다.


 

1889년 7월,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일이었던 7월 14일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가 파리에서 열렸습니다(오늘-열 번째,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참조). 20개국에서 391명의 노동조합 대표들이 참석했던 이 대회에서 참석자들은 노동권의 확보, 결사의 자유, 전쟁과 평화에 대한 결의 등을 채택하면서 가장 중요한 인터내셔널의 과제로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선정하였습니다. 참석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위한 전 세계 노동자들의 공동행동, 공동집회를 1890년 5월 1일에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890년 5월 1일 세계 각국에서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집회가 열렸고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노동자의 날로 지키는 메이데이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오늘, 민주노총이 창립된 날, 시카고의 노동운동가들이 흘렸을 눈물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15년 전 그날 연세대 강당에서 흘렸던 나의 눈물을 생각해 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가슴에 아무런 눈물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향한 분노의 눈물도, 힘들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의 눈물이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나의 운동이 치열하지 못한 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민주노총이 창립된 날, 오늘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그러나 내일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바로 그 내일을 살고 있음을 한 번 생각해 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 책! 책!

   

<미국 민중사 1, 2> 하워드 진, 이후, 2006

  

미국사에 대해서는 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권력과 자본이 가르쳐 준 역사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미국의 역사를 민중의 관점에서, 흑인의 관점에서, 아메리카 인디안의 관점에서, 그리고 미국이 점령해 간 식민지 민중의 입장에서 새롭게 기술한 책입니다. 모두 1,2권으로 되어 있으며 무척 두꺼운 책입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미국에 대하여 마음먹고 그 본질을 들여다 볼 심산으로 한 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하워드 진은 노암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진보적인 학자, 사회운동가로는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입니다. 올해 1월에 타계 했습니다.

  

<세계노동운동사 1, 2> 윌리암 포스터, 백산서당, 1986

  

여러차례 소개한 바 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현대 미국노동운동의 기원> 멜빈 듀보프스키. 한울 아카데미, 1990

  

꽤 학구적인 책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지점들, 왜 미국에서 진보정당운동은 실패했는가? 왜 미국의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노동운동은 결국 미국노동총동맹을 중심으로 한 개량적 노동운동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는가? 미국에서의 산별운동과 이를 추진하던 CIO(미국산별회의)는 왜 실패했는가? 와 같은 주제들을 조목조목 풀어 쓴 책이어서 흥미로운 책입니다. 사실은 이번 글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같이 풀어 가보려고 했습니다만 너무 주제가 방만해 질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었던 문제들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만 미국노동운동사에 대해 일정한 이해를 전제로 써진 책이므로 미국 노동운동사에 대한 기본 학습을 하신 후에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인 독서가 될 것이라는 점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