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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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내가 아닌 다른 이름
1980년 12월 2일, 오늘, 프랑스의 언론들은 일제히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습니다. 프랑스 문단의 원로 중의 한 사람이었던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1980)의 죽음이 그것이었습니다. 문단 안팎에서 생전에 많은 일화를 만들어 낸 사람이었고 적지 않은 작품을 통해 프랑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했던 작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자체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총구를 입안에 넣고 자살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실종되었다가 10일 만에 자동차에서 자살한 채 발견된 그의 아내의 죽음으로 프랑스의 문화계가 시끄러웠던 것이 불과 1년 남짓밖에 안 되었는데 로맹 가리마저 자살하자 프랑스의 문화계는 물론 프랑스인 모두 그의 죽음을 놓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6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력적인 작품활동을 해왔고 아내인 진 세버그의 자살 이후 오래지 않아 새로운 연인과 사랑에 빠져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었던 그가 갑자기 자살을 하게 된 이유는 한 마디로 미스테리였습니다. 죽음의 이유를 놓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흘러 나왔지만 어느 것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발견된 유서에서 로맹 가리는 분명하게 자신의 자살이 아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맹 가리의 유서를 읽어 보아도 명확하게 로맹 가리가 왜 자살했는지를 명확하게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로맹 가리의 유서의 제목은‘결전의 날’이었습니다.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 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할 것이다>라는 내 자서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말 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유서만 놓고 보면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자살의 이유를 놓고 설왕설래했습니다. 그의 죽음의 이유에 대한 무성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 언론은 대작가의 죽음이 프랑스 문단의 큰 손실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그의 삶과 그의 문학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언론은 31세에 <유럽의 교육>으로 프랑스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로맹가리의 문학인생을 처음부터 하나씩 조명해 나갔습니다. 1956년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 최고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공쿠르 상을 수상한 그의 경력과 그가 죽을 때까지 써 놓았던 수많은 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해석들도 내놓았습니다. 살았을 때 그가 받았던 평가, 인간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로 요약되는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평가가 언론과 문단에서 이어졌습니다.
그의 문학세계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줄을 이었습니다. 여느 소설가와는 다른 그의 삶이 다시 화제가 되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의 공군조종사로 복무했고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제대 후에는 외교관으로 오랜 기간 동안 공직에 복무했던 남다른 이력들이 다시 소개되었습니다. 자신의 작품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1968), <킬>(1972)을 영화화하면서 영화감독을 했던 이야기,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와 결혼했던 이야기, 그 여배우가 자살한 이야기들도 언론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충격적인 화제는 로맹 가리의 권총자살 그 자체였습니다. 이처럼 한동안 로맹 가리의 자살 소식은 프랑스 문단과 언론에서, 그리고 프랑스의 국
로맹가리의 아내 진 세버그
민들 사이에 충격적인 화제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살의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로맹 가리가 자살한 날,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이 벌어졌음을 세상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로맹가리가 죽은 날, 1975년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으로 로맹 가리와 마찬가지로 공쿠르 상을 수상한, 당대 프랑스 문단 최고의 작가로 평가되고 있던 에밀 아자르도 바로 그 날 세상에서 사라졌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죽음은 7개월 정도 후에야 알려졌습니다.
에밀 아자르는 불과 6년 전인 1974년 <그로 칼렝>(원뜻은 거대한 비단뱀이라는 뜻이나 국내에는<열렬한 포옹>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음)이라는 작품으로 문단에 이름을 내민 작가였습니다.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에밀 아자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한 평론가가 추천한 사람으로 현재 브라질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이라고만 알려졌습니다. 이듬해인 1975년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한 후 평단의 찬사가 쏟아지고 공쿠르 상 수상이 결정되었을 때도 이 작가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에밀 아자르는 공쿠르 상 수상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공쿠르상 아카데미에 밝혀 왔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수상 거부 소식은 가뜩이나 얼굴 없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뉴스의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국내신문인 동아일보 문화면에도 이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프랑스 소설가인 에밀 아자르씨는 누구나 탐내는 권위 있는 문학상 공쿠르 상 수상을 거부한다고 발표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변호사인 지젤 알리미씨를 통해 세 줄의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의 이러한 처사는 공쿠르상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불신운동의 하나라고. 수상대상이 된 그의 작품<자기 앞의 생>은 이 상의 수상으로 사실상 30만 부 판매를 보장 받은 셈.(로이타 통신)”
- 동아일보 1975년 11월 22일자
에밀 아자르의 수상 거부에도 불구하고 공쿠르상 아카데미는 “상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주는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 그렇듯, 공쿠르상은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다. 수상자는 여전히 아자르다”라는 말로 공쿠르상 수상자로 에밀 아자르를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에밀 아자르는 결국 얼굴을 드러냅니다. 그는 로맹가리의 조카였던 폴 파블로비치로 밝혀졌습니다. 이후 에밀 아자르는 1976년 <가명>, 1979년 <솔로몬 왕의 고뇌>를 발표하며 프랑스 문단의 대표작가이자 최고의 인기작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랬기에 아마도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면 로맹 가리의 죽음 이상의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에밀 아자르의 죽음이 알려진 것은 로맹가리의 자살소식이 전해진 지 7개월이 지나서였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죽음은 로맹 가리가 쓴 유서 형식의 산문 소책자가 발표되면서 알려졌습니다. 그 산문 소책자의 내용은 문단을 경악케 한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로맹 가리의 산문은 에밀 아자르라는 인물은 허구이며 로맹 가리 자신이 바로 에밀 아자르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로맹 가리의 산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세기말의 분위기인가? 세상은 점점 더 작가에게 예술적 표현의 온갖 형태에 관해 쓸데없는 질문, 따분하고 시시한 질문만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나는 이 글을 쓴다. 문학은 아주 오랫동안 인간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해왔다고 자부했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했었는데, 이제 내겐 더 이상 그런 정열이 남아 있지 않다. 이 글이 출판될 즈음에는 어쩌면 이것은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점까지 충분히 감안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지금 내 뒤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 자신이 바로 에밀 아자르였음을 밝히는 것이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네 편의 작품들에게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문단의 충격은 컸습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을 구별하지도 못했던, 행세깨나 한다는 문학평론가들은 당혹스럽고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더구나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로맹 가리는 좀 더 분별력 있는 평론가들이 있었다면 자신과 에밀 아자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들과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들의 연관성이나 그 표현의 동일함을 하나하나 적시해 놓았습니다. 프랑스 문단은 한편으로는 충격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는 모욕을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동안 로맹 가리가 새로이 등장한 천재작가인 조카 에밀 아자르를 질투해서 슬퍼하고 있다며 로맹 가리가 불쌍하다고 거들었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런 말을 했던 사람들은 그 말을 주어 담지도 못하고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습니다. 1903년 처음 수상을 시작한 이래 결코 같은 작가에게는 다시 수상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지켜 오던 공쿠르상 아카데미 또한 매우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맹 가리는 전무후무하게 그 권위 있다는 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문단의 충격과 혼란도 적지 않은 파장이었지만 대중들의 관심은 에밀 아자르라는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으며 또 왜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인물을 만들었고 그 허구적인 인물 뒤에 숨어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라는 의문에 집중되었습니다. 로맹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그 과정과 이유를 하나하나 밝힙니다. 소설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문학을 이야기하고 프랑스 문단의 허위의식을 꼬집으며 그 과정과 이유를 밝혀 나갑니다. 로맹 가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곰브로비치(폴란드의 소설가)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그에게 만들어준 얼굴’이 한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그런 시도를 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이자 그 시도가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얼굴’은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로맹가리는 이어 이런 인식이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어떤 고민과 갈등으로 다가왔는지를 설명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싫증이 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 등에 붙여 놓은 로맹 가리의 고정된 이미지가 싫어졌다. 무려 삼십 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내 얼굴을 만들어 준‘ 것이다. 어쩌면 나는 무의식중에 거기에 동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더 편한 일이니까. 말하자면 틀은 완전히 만들어져 있었고, 나는 그곳에 안주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속마음을 털어 놓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젊은 시절, 초창기, 첫 소설에 대한 향수,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것에 시달렸다. 새로 시작하는 것, 다시 사는 것, 다른 존재로 사는 것이 내 존재에 큰 유혹으로 다가왔다.”
처음에 로맹 가리는 실제 이런 일을 감행할지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 그의 나이 60세에 <그로 칼렝>을 써 놓고 마침내 에밀 아자르라는 허구의 작가를 만들어 그 이름으로 발표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브라질에서 우편으로 작품을 송부한 것처럼 꾸몄습니다. 작품게재를 요청 받은 문학잡지는 이 소설의 마지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일부 삭제를 요청했습니다(나중에, 이 작품이 로맹 가리의 작품으로 알려진 뒤에 삭제되었던 마지막 부분을 보완하여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로맹 가리는 순순히 응했습니다. 작품이 발표되자 문단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그동안 평단의 홀대를 받던, 아니면 그냥 로맹 가리가 또 하나의 소설을 발표했다는 정도의 반응을 보이던 프랑스 비평계는 이 작품에 대하여 열렬한 찬사를 보냈으며 아직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작가에 대하여 추측 가능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대작가의 출현을 반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혹시 이 작가가 로맹 가리일지도 모른다고 하자 비평가들은 “로맹 가리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다” “로맹 가리는 끝난 작가다.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라며 일축했습니다. <그로 칼렝>을 주의 깊게 읽어 보고 비평했으면 이 소설에 쓴 문장들을 이미 이전의 다른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평을 해대는 비평가들에 대해 로맹 가리는 그들의 허위의식을 비웃어 주었습니다. 로맹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나는 이미 ‘어떤어떤 작가’라는 고정관념 속에 위치 지어진 기성작가일 뿐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내 작품에 대해서 더 이상 진지하게 연구하거나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기존의 관념이 지배하는 쉽고 단순한 분석으로는 절대로 그 가명에서 나를 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내가 얼마나 통쾌했을지 상상해 보시라. 나의 작가 인생 전체에서 가장 달콤한 즐거움이었다.”
<그로 칼렝>의 작가에 대한 언론과 평단의 관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고 온갖 상상과 신비감이 보태졌습니다. 언론은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중 하나가 에밀 아자르일 가능성이 많다며 몇 사람을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신문은 에밀 아자르는 레바논의 테러리스트인 아밀 아자라고 확정적으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에밀 아자르의 연인이라는 여성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두 번째 작품 <자기 앞의 생>의 공쿠르 상 수상여부가 화제가 될 때쯤, 로맹 가리는 오촌 조카 폴 파블로비치로 하여금 에밀 아자르 역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오촌 조카는 주저하다가 수락했고 에밀 아자르는 이제 실제 인물로 대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의 조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잠깐 동안 로맹 가리를 의심하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기존 관념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비평가들에게서 이미 한물간 작가와 에밀 아자르를 동일 인물로 볼만한 열린 안목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976년, 로맹가리는 다시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가명>을 발표했습니다. 조금씩 작품에서 로맹 가리의 냄새를 맡는 비평가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유사함에 대해 비평가들은 에밀 아자르가 인척관계에 있는 로맹 가리를 일부 모방하거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았을 뿐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가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비평가들에 대해 로맹 가리는 그가 쓴 산문,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극도의 불신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비평가들은 텍스트를 꼼꼼히 연구하는 일 외에 다른 일로 더 바쁜 사람들이며 그저 수박 겉핥기로 읽고 나서 무슨 대단한 비평을 하는 양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는 비평가라면 조금만 주의해도 충분히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로맹 가리는 한 신문의 문화부 기자와 자기와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며 비평가와 비교합니다. <파리 마치> 신문의 한 여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찾아와 자신에게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동일인이라며 작품의 텍스트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로맹 가리의 어느 소설의 문장이 에밀 아자르의 어느 문장과 어떻게 같은지를 일일이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로맹 가리는 그 여기자의 텍스트 분석에 놀라움과 함께 존경심을 가졌다고 실토했습니다. 로맹 가리는 또한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를 분석했던 몇 몇 사람들도 거론하면서 문학적인 열정을 다하지 않는 비평가들의 비평태도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일부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했다고 술회했습니다.
“아자르가 그 정도로 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는데, 당신이 지적한 대로 그렇게 똑같다면, 표절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직 젊은 작가인 만큼, 항의할 생각은 없어요. 대체로 내 작품이 젊은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런데 당신은 그걸 알아주시니, 저로서는 기쁜 일이고......”
에밀 아자르에 대한 평단의 찬사와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가 높아지면서 오촌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며 그 무게에 힘들어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별거 아니라는 생각에 가볍게 로맹 가리의 부탁으로 에밀 아자르가 되었던 폴 파블로비치는 점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양상에 매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로맹 가리는 파블로비치가 힘겨워할 때마다 그를 다독이며 에밀 아자르역할을 계속하도록 설득했습니다. 폴 파블로비치는 점점 에밀 아자르가 되어 갔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스스로 에밀 아자르로 사는 삶을 자기의 삶처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로맹 가리는 폴 파블로비치가 나중에는 그가 자신의 뜻에 의해 조종되기 보다는 오히려 작품 집필을 요청하는 등, 오히려 그 자신이 나서서 에밀 아자르가 되려고 하는 바람에 우습기도 하고 당황스러웠다고 회고했습니다.
로맹 가리는 1974년 이후 자신의 이름과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을 병행하면서 작품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자살하기 한 해전인 1979년, 로맹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솔로몬 왕의 고뇌>라는 소설을 네 번째로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에밀 아자르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동안에도 로맹 가리는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1974년부터 자살에 이르는 1980년 까지, 로맹 가리는 <밤은 고요할 것이다>, <이 선 너머에 당신의 티켓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여인의 빛>, <영혼의 짐>, <연> 등 1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로맹 가리는 그 시기가 작가로서 그 어느 때 보다도 강렬한 창작욕을 느꼈던 시기였다고 후에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제목과는 다르게 ‘이 선 너머에 당신의 티켓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즐거움을 “한계에 대한 예전의 공포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갖게 되었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바로 자신의 바람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작품 속에서 한결같이 추구했던 인간 정체성의 문제를 에밀 아자르를 통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소설이 아닌 현실 속에서 탐구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내가 만들어 낸 나 자신의 탄생에 대해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로맹 가리는 또 한편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삶이 가져 온, 자기 정체성의 확인과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갖게 된 즐거움으로 자신의 삶에서의 ‘또 다른 무엇’을 상상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무도 가져 보지 못한 ‘이 선 너머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티켓’을 손에 들게 되면서 자신의 다음의 궁지(窮地)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유서의 마지막 문장,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는 말은 바로 이 한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그의 자살 이유는 아니었을까! 로맹 가리의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만들 것도, 말할 것도, 할 것도 없다고 판단했다. 그의 작품은 완성되었고, 그에게는 진행 중인 작품도 없었다........ 그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떠났다.”
1980년 12월, 2일, 오늘, 로맹 가리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유를 분명하게 가늠해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스스로 생의 궁지에 도달했다는 완전한 평정심의 표현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여전히 닿을 수 없었던 자기 정체성의 혼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에밀 아자르의 탄생과 뗄 수 없는 부분일 것입니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를 만든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언뜻 보기에 에밀 아자르의 탄생은 로맹 가리라는 이름으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로맹 가리의 평단에 대한 불만과 불신 때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를 탄생시킨 보다 정확한 이유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갇히게 된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얼굴로부터의 탈출이었습니다. 로맹 가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얼굴, 그래서 로맹 가리라는 이름에 갇히게 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자신의 얼굴, 이름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인간의 다양성을 통한 인간이란 종(種)의 정체성에 천착해 온 작가에게 정작 자신은 다양성이 거세된 어떤어떤 작가로 단칼에 규정되는 로맹 가리라는 이름에 따라 다니는 정체성에 심한 혼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사는 것, 다른 존재로 사는 것,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사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나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프로테우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과 변신의 바다신)적 유혹, 즉 다양성에의 유혹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삶에서 오는 알 수 없는 갈망은 온갖 다양한 형태와 가능성 속에서 아무리 다른 맛을 보아도 채워지지 않았다. 항상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서로 모순된 나의 충동들은 나를 어디로 튈지 모르게 만들었고, 나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런 심리상태였기 때문에, 에밀 아자르의 탄생과 짧은 생애와 죽음에 대해서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설명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로맹 가리
로맹 가리는 자신이 에밀 아자르를 탄생시키면서 생각했던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다시 살아 보았고, 다른 존재로 살아보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에밀 아자르가 아니었으면,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된 그의 4편의 소설은 그저 그런 로맹가리의 말년의 소설 목록에 오르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 작품들이 프랑스 문학과 프랑스 문단에 끼친 영향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프랑스 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확인시켜 주었다는 에밀 아자르에 대한 평가도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에 갇힌 로맹 가리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를 알아 채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로맹 가리를 접한 것은 1977년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었을 때입니다. 그때는 물론 에밀 아자르라는 작가만 알고 있었을 뿐 로맹 가리는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1981년,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그런 일도 있구나’ 싶은 정도였지 큰 느낌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운동의 공간에 바삐 살아가면서 한때 좋아했던 소설도 시도 읽는 일이 줄었습니다. 로맹 가리같은 프랑스 작가의 이름은 잊혀진 이름이었습니다. 운동의 공간에서 제법 이런 저런 일들을 해나가면서 어느 사이 선배그룹이 되어갔습니다. 이름을 말하면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익숙한 이름 정도는 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로맹 가리가 생각났습니다. 로맹 가리를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 그대로 “20여 년 동안 사람들이 내 등에 붙여 놓은 000이라는 이름, 얼굴이 주는 이미지가 너무 싫었고 그 ‘이름’은 저의 생각이나 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저의 운동이나 실천이, 또는 저의 주장이 이름에 갇히고 있다는 생각에 참 많이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이름에 갇히고, 때로는 정파에 갇혔습니다. 턱없는 오해, 불신, 편견, 그저 그런 평가, 혹은 악의적인 왜곡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자기 정체성의 실종과 자기소외를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그 운동을, 새로운 이름으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꼭 제 이야기만을 하려고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일들을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많은 운동가들이 겪고 있는 운동으로부터의 자기소외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이 가지는, 운동가가 갖게 되는 사고의 다양성이 수용되지 않은 채, 기존의 관념이 지배하는 쉽고 단순한 분석과 예단으로 인해 이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그렇게 가두었고, 우리 또한 누군가의 등에 지워지지 않는 글씨로 이름을 써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남이 써준 이름으로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운동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누구나 새로운 운동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이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오늘 우리의 운동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개별적인 정체성의 혼란이 어느 사이 집단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에밀 아자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전혀 다른 삶, 전혀 다른 존재로 에밀 아자르가 되어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일 것입니다. 로맹 가리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만들어 준 이름, 사람들이 만들어 준 틀에 안주하는 로맹 가리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등에 붙은 이름을 힘겨워하지만, 또 그 이름 때문에 끝없이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만 포기하지 않는 로맹 가리로 살고 싶습니다. 비록 저는 로맹가리로 살더라도 누군가는 에밀 아자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혹은 저를 포함하여 운동의 선배들이 로맹 가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여러분 중 누군가가 우리들이 하고 싶었던 ‘새로 시작하는 것’, ‘다시 사는 것’, 다른 존재로 사는 것‘을 대신하는 에밀 아자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로맹 가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니 그의 문학에 대해 조금만 덧붙일까 합니다. 로맹 가리는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외교관, 영화감독, 비행기 조종사, 헐리우드와 엘리제궁을 드나들었던 사교계의 명사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런 이력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은 그를 작가보다는 대중적인 스타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이력이 로맹 가리의 작가로서의 문학적 성취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약 30여 편의 소설을 썼습니다. 로맹 가리의 작품의 주제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인간의 모습을, 다양한 인간의 정체성을 그의 작품 속에서 그려 나갔습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란 서로 다른 정체성이 중첩되어 있는 존재이며 이러한 정체성이 발현되는 공간이 곧 현실의 삶이며 인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작품 안에 비극과 희극, 슬픔과 웃음, 그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에피소드들을 배치하면서 시종 인간의 정체성을, 생의 의미를 탐구해 나갔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가벼운 에피소드와 재치 있는 유모어를 연속적으로 배치하여 우화와 같은 가벼움을 던져 주기도 하지만 전쟁, 아우슈비치와 유대인 학살, 환경과 인간, 인종차별, 가난 등 20세기의 모든 갈등을 포괄하는 주제를 담고 있어 무겁기도 합니다. 읽은 것 중에서 몇 작품을 소개합니다.
<유럽의 교육>은 1944년, 그의 나이 30살에 <분노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에서 먼저 출판된 작품입니다. 1945년에 프랑스어로 출판되면서 <유럽의 교육>으로 개제하여 출판되었으며 프랑스 비평가상을 받았습니다. 야네크라는 14살짜리 소년을 주인공으로 1942-43년의 폴란드의 숲 속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던 폴란드 빨치산 이야기입니다. 그의 작품이 이후 끈질기게 천착해 간 것처럼 이 초기 작품에서 로맹 가리는 전쟁이라는 부조리하고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과 생의 의미를 추적해 갑니다.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가운데 해학과 유모어, 비극의 에피소드가 교차되어 나타납니다. 소설 제목 <유럽의 교육>은 이 소설이 지성을 뽐내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그 허위가 드러나는 유럽의 교육, 추악한 전쟁을 통해 야만적인 인간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만든 유럽의 교육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전쟁 이후 가장 야만의 순간에도 미래의 희망은 인간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할 유럽의 교육에 대한 바람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요한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라는 제목으로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하늘의 뿌리>는 1956년 볼리비아 주재 프랑스 대리 대사 시절에 쓴 소설입니다. 로맹 가리에게 공쿠르 상을 안겨주었으며 로맹 가리가 이 상을 수여하기 위해 파리로 왔을 때 그는 그의 특이한 이력으로 인해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빽빽한 논문처럼 여백이 거의 없고 길기도 길어(한글판 번역본이 623페이지) 읽기에 인내가 필요한 소설입니다. 아프리카 차드를 배경으로 코끼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모렐이라는 야생동물 보호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1950년대 작품으로는 드물게 인간과 자연, 환경보호의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코끼리를 구하려는 것이 곧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며 진보와 발전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코끼리 학살은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종국적으로 말살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코끼리 보호를 둘러싸고 몰려 든 수많은 인간군상들에 대한 묘사는 복잡한 인간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줍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54세인 1968년에 쓴 단편소설입니다. 단편소설이 매양 그렇듯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줄거리도 변변하다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생을 마치기 위해 페루의 해안가로 몰려드는 새들의 이야기와 자살을 시도했다 주인공에게 구조되는 여자의 이야기가 소설내용의 다입니다. 그런데 참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입니다. 프랑스어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읽고 소설가 김인숙이 한 말입니다.
“오래 전에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가슴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 싶어 한참 귀를 기울이니 모래가 버석거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새들의 울음소리, 날갯짓을 멈춘 새는 세상의 끝이고, 그 끝에서도 버리지 못한 희망이고, 그 희망의 끝에서 뱉어지는 모욕과 경멸이었다...... 새들이 그곳에 와서 죽는 이유는 어쩌면 내 삶의 이유와 같다. 차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러나 바로 그것인, 내 삶의 단 한 가지 이유. 이제, 이 책을 통해 로맹가리를 통째로 만나게 되는 것은 각별하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두 번째 소설, 공쿠르 상을 수상하여 로맹 가리로 하여금 전무후무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받도록 만든 소설, <자기 앞의 생>은 1975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제가 로맹 가리를 알게 되었던 것도 이 작품을 통해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6년 문학사상사에서 출간되었고 저는 1977년에 처음 읽었습니다. 그저 그랬습니다. 아마 그 나이에 이 책을 이해하기에는 한 참 모자랐나 봅니다. 아주 오랜 만에, 처음 책을 읽은 뒤로 33년만인 작년에 다시 읽을 때는 참 많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이번에 한 번 더 읽었습니다.
14살 소년인 모모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랍인 소년 모모가 전에는 창녀였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된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을 맡아 키우는 로자 아줌마와 함께 지낸 생의 어느 한 시기에 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그리고 웃음을 머금게 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 소설입니다. 인간에 대하여,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인생에 대하여 이 소설은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은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모모를 통해, 삶이든 죽음이든 생은 신비롭고 경이로운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을 관통하는 것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랑이며, 그것 없이는, 즉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978년에 김만준이라는 가수가 부른 <모모>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마침 그때 독일작가미카엘 엔데가 쓴, 요즘이라면 판타지 소설로 부를 <모모>라는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그 <모모>라는 노래가 바로 그 소설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모>라는 노래의 가사말은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의 이야기였습니다. 들어 볼까요?
로맹 가리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그의 아내 진 세버그(Jean Seberg, 1938-1979)입니다. 진 세버그는 영화 <잔 다르크>, <슬픔이여 안녕> 등에 출연하며 헐리우드의 신성으로 등장했습니다. 이어 1959년, 그 유명한 영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의 주연을 맡으면서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가 만났을 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때 로맹 가리는 LA주재 프랑스 총영사의 자격으로 헐리우드에 출입하는 명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45세였고 진 세버그는 21세였습니다.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했고 이들은 프랑스로 건너가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도 생겼지만 오래지 않아 둘은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여기까지는 뭐 그저 그런 신변잡기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 세버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요즘 말로 개념 있는 배우였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말 헐리우드로 돌아간 진 세버그는 영화활동을 하면서도 흑인 민권운동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그는 몇 안 되는 블랙팬더당(흑표범당)에 대한 지지자 였습니다. 블랙팬더당은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노선에 반기를 들고 강경투쟁 노선을 천명한 흑인 민권운동 조직이었습니다. 표범 가죽점퍼를 입고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 조직은 흑인혁명을 공개적으로 주창하며 무장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FBI를 중심으로 한 탄압이 거셌습니다. 이런 조직에 대하여 지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진 세버그는 블랙팬더당에 대한 지지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1970년, FBI는 진 세버그를 매장하기로 하고 공작을 진행했습니다. FBI는 도청을 통해 진 세버그가 임신 중임을 알고, 그녀가 블랙팬더당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언론에 흘렸습니다. 언론보도로 심한 충격에 빠진 진 세버그는 심각한 우울증의 증상을 보였고 로맹 가리는 이런 진 세버그를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제네바의 한 병원에서 조산한 아이는 이틀 만에 사망했고 이는 진 세버그의 우울증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영화촬영 중 만난 한 멕시코인이었습니다. 이후 진 세버그는 죽기 전까지 7차례의 자살시도를 하였고 결국 1979년 치사량의 약물을 먹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진 세버그의 자살 이후 로맹 가리는 그의 죽음이 FBI의 공작때문이었음을 고발하기도 하였습니다. 로맹가리는 1년 후 자살하면서 유서에 진 세버그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다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도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맹 가리는 결혼생활이 파탄이 난 이후에도 언제나 진 세버그를 옹호했고, 또 그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책! 책! 책!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01
<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한선예 옮김, 책세상, 2003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2003
<하늘의 뿌리> 로맹 가리, 백선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7
위에서 소개한 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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