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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모음]양경규의 "오늘"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1)

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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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

 

당신은 그들의 손에 일곱 동지들과 함께

죽어야 했습니다.

그 처참한 죽음 앞에서

나는 60년 굳게 믿어 오던 하느님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쩌리요

당신이 죽음으로 지켜낸 정의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을 부인하면 인생도 없고 역사도 무의미 한 것을

그리하여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정의의 뿌리에서

당신의 마음에서

나는 버렸던 하느님의 체취를

다시 내 코끝으로 맡을 수 있었습니다.

- 문익환 목사의 시 <이수병 동지여> 중에서 -

 

 



89년 한 겨울, 아마 1월이었을 것입니다. 연극구경을 갔습니다. 극단 연우무대가 올린 <4월 9일>이라는 연극을 보러 갔습니다. 그때는 연극보기를 꽤 좋아했습니다. 삼일로의 창고극장, 경운동 덕성여대 옆의 실험극장, 혜화동의 연우소극장이 자주 가던 곳이었습니다. 서른 한 살의 나이였습니다. 88년 11월에서 12월에 걸쳐 노동조합 부위원장으로서 50일의 파업을 마치면서 새로운 하늘을 이게 되었고 새 땅을 걷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종로 어디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사민청(사회민주주의청년동맹)이 열어 놓은 사민청학교에서 매주 두 차례씩 학습을 받고 있던 시기였고 책 속에서 한가롭게 거닐던 역사와 사회의 울타리를 넘어서며 구체적인 현실과 맞닥뜨리고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더욱 남다른 느낌을 가지고 연극 <4월 9일>을 보러 갔을 것입니다.

 

 

 

문성근과 양희경이 출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성근은 <한씨연대기>, <칠수와 만수> 등으로 이미 연극판에서는 꽤 알아주는 연기자였습니다. 더구나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언론의 관심도 받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역을 맡았던 문성근은 당시 한겨레 신문의 인터뷰에서 파란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유가족의 분노의 울부짖음을 기억하며 연기했다고 말했습니다. 양희경은 그때도 지금처럼 덩치가 좋았고 연극무대에서 내뿜는 그의 목소리는 연극배우의 발성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소리였습니다. 벌써 23년이 지난 일입니다. 이제는 59세나 된 양희경의 젊은 모습은 좀체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목소리는 지금도 어제 일처럼 귓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가 하나하나 부르던 사람들의 이름, 그 이름은 정말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습니다.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우홍선!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오늘, 연극의 제목이기도 했던 4월 9일,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몸부림치며 살았던 그 간난(艱難)의 세월을 뒤로 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법사상 최악의 살인행위로 일컬어지는 대학살이었으며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만행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75년 4월 9일, 새벽에 일어난 일입니다. 전날인 4월 8일, 대법원에서 이들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고 나서 18시간 만이었습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확정선고가 있고나서 4월 8일을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였고 국제 엠네스티가 군사정권의 대표적인 인권유린행위라고 강력히 비판하였지만 잔인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 북한의 지령을 받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총학생연맹)을 배후 조종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이 그들이 사형당한 이유였습니다.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작 사건은 이렇게 8명의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으며 역사를 또 한번 피로 물들였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선고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되어야 했던 8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걸어 온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살아 온 시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도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는 변혁운동의 역사의 도정에서 그들이 서 있던 자리와 오늘 우리의 자리를 가늠해 보려고 합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이야기하려면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합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사람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던 날로부터 1년하고도 6일 전인, 1974년 4월 3일 밤 10시, 박정희는 담화문과 함께 유신헌법 제 53조에 의한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였습니다. 긴급조치 4호는 그날 있었던 전국 학생시위의 주체로 등장한 민청학련 하나를 겨냥하여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총 12개항으로 이루어진 이 긴급조치의 선포는 민청학련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 안에 이미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같은 대규모의 공안사건 조작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1.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이하“단체”라 한다)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연락 그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에 관한 문서, 도화·음반 기타 표현물을 출판·제작·소지·배포·전시 또는 판매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4. 5. 6. 7. 생략

 

8.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9.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10, 11. 12. 생략

 

이 긴급조치는 민청학련이라는 학생운동 조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형벌의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수사가 진행되지도 않았던 민청학련에 대하여 인민혁명 운운하며 미리 대규모의 공안탄압과 용공조작을 획책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담고 있었습니다. 담화문에서 언급한 인민혁명, 1항에서 언급한 민청학련에 대한 편의제공과 지원, 그리고 8항의 사형, 무기 등의 형벌내용은 바로 이런 의도를 드러낸 조항이었습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사건은 물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이미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한 후 열흘만인 4월 14일 여정남의 체포를 시작으로 소위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등을 잇달아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는 이들에 대하여 정신줄을 놓게 만드는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박정권은 어떻게 해서라도 학생운동을 공산혁명과 연결시켜 유신반대운동과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국민을 떼어 놓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박정권은 체포된 사람들이 학생운동조직인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여 공산혁명을 꾀했다는 사실을 시인할 때까지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이 고문수사를 토대로 마침내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 사건 수사결과 발표를 빌어 본격적으로 민청학련의 배후에 공산혁명 세력이 있다는 것을 조작하기 위한 단추를 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사건개요에 대하여 중앙정보부는 이렇게 발표하였습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주동 학생들은 4단계 혁명을 통해 이른바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세울 것을 목표로 과도적 통치기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까지 계획했으며 이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①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일본공산당 ②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관련, 학생을 포함한 1,024명이 조사를 받고 253명을 군법에 송치하여 54명이 1차로 기소되었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민청학련의 배후와 민청학련이 수립했다는 4단계 혁명전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인혁당 당수로 지하활동을 하다 복역했던 도예종 등은 71년부터 대학가의 데모를 배후조종, 학생폭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수립을 기도...... 전국학생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 경희대 위원장 이수병 등을 통해 10.2 서울대 문리대 데모를 주도한 이철 등에 접근, 민청학련의 구성과 활동을 배후조종하고 자금을 지원해 왔고,

 

2. 조총련의 비밀조직원 곽동의의 조종을 받은...... 일본인 다짜가와 마사키, 일본공산당원 하야가와 시게루 등이 이철 등과 접촉, 폭력혁명계획을 지원해 왔으며,

 

3. 좌파혁신계로 복역한 적이 있는 유근일 등은 이들 대학생들에게 자금지원 등을 지원해 왔고........

 

<4단계 혁명계획>

 

1단계 : 유신체제를 비민주 독재체제로 단정하고 자원파동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정부실책으로 과장함으로써 민주회복 등의 명분으로 반대세력을 규합하고,

2단계 : 4월 3일 전국 주요 대학이 일제히 봉기, 청와대 등 정부기관을 점거, 정권을 인수하고,

3단계 : 민주연합정부를 구성하고 민족지도부와 100인 위원회를 설치하여,

4단계 :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세운다.

 

 


 

발표만으로 보면 국민들이 경악할 만한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배후라는 것도 그렇고 혁명전략이라는 것도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발표였습니다. 과연 북한의 지령에 의해 조직된 배후세력에 의해 학생들이 국가변란을 일으키고 이에 기반하여 청와대를 점거하는 혁명이 당시에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기자회견장에서도 이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신직수는 장황하게 학생들이 국가변란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4.19혁명을  거론하며 이 때 잘못 조성된 학원풍토 때문에 학생들은 국가전복을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스스로도 궁색하다고 생각한 중앙정보부는 국민을 더 쉽게 속일 수 있는 그림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몇 사람의 배후조종이 아니라 명확한 실체를 갖는 공산혁명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는 본격적으로 인혁당재건위라는 조직을 만들어내어 이들이 민청학련을 통해 공산혁명을 하려했다는 그림을 그려나가기로 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 경제위기와 독재정치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위기에 몰린 박정희 유신정권의 발악이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1970년대 초반의 시대적 상황들을 잠깐 먼저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어떤 경로를 거쳐 유신을 단행했는지, 이 과정에서 민중민주운동은 어떻게 저항했는지, 70년대 초반의 한국사회 전반에 대하여 들여다보겠습니다.

 

“값싼 인기에 영합하고 나만 평안한 길을 가려면 나에게도 얼마든지 쉬운 길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광된 후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70년대를 깊이 생각한 끝에 나를 버리고 국가를 위해 한 번 더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정에서 나는 이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의 이러한 생각들은 추호도 나를 위주로 한 생각에서가 아니라 오직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한 일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 3선 개헌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박정희가 발표한 대국민 연설 -

 

1969년 10월 17일 3선개헌 국민투표를 통해 권력연장이라는 조건을 확보하고 맞이한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기반은 견고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며 그동안 박정희의 권력기반이 되어 주었던 미.소 양대 강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냉전체제와 남북간의 긴장관계는 변화를 맞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1970년 2월 이른바 닉슨독트린으로 불리는 <197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 : 평화를 위한 새로운 전략>을 통해 동서간의 긴장완화를 통한 세계평화를 천명하면서 ① 중공과의 관계 개선 ② 베트남전의 조속한 종결 ③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역할 증대를 골자로 한 외교백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어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서는 한편, 70년 8월에는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하여 남북한의 적대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였습니다. 닉슨은 이어 핑퐁외교(1971년 4월10일 미국 탁구대표팀 15명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중국 대륙을 최초로 공식방문한 사건)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 후 1972년 2월 21일 헨리 키신저와 함께 중국을 방문해 새로운 세계평화질서를 위한 노력을 천명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세계정세의 변화는 3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하던 박정희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냉전체제에 편승하며 남북 긴장관계를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해 온 박정희로서는 매우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3선개헌을 통해 권력유지의 조건을 확보하기는 하였지만 지식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요구가 점차 강력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다 70년대 초반,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의 팽배와 제1차 석유파동으로 60년대부터 형성되어 온 개발독재에 뿌리를 둔 한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는 축적의 위기, 즉 경제침체라는 위기에 빠져 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0년 11월에 일어난 전태일의 분신은 박정희 정권에서 누적되어 온 사회, 경제적 모순의 폭발이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60년대 개발독재에서 소외된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6월의 국립의료원 수련의 파업, 8월의 광주 대단지 생존권 투쟁, 9월의 베트남 파견 기술자들의 대한항공 습격.방화 사건을 비롯한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줄을 이었습니다. 71년 7월에는 권력을 등에 업고 사법부에 칼날을 겨둔 검찰에 대항하여 전국 판사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위 1차 사법파동으로 불리는  7.28사법파동이었습니다. 

 

 

 

1971년 4월 27일, 박정희는 3선개헌에 따라 다시 출마한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권력을 쥐었지만(박정희 634만 2828표-53.2%, 김대중 539만 5900표-45.2%, 표차 94만6924표) 국제정세의 변화와 국내에서 진행된 일련의 민중생존권 투쟁과 민주화 운동으로 빚어진 권력의 위기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박정희는 국제정세의 흐름, 즉 미국의 긴장완화정책에 조응하고 국내의 반대여론도 돌릴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먼저 국내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 27일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은 모든 정치, 경제활동을 통제할 수 있고 국민기본권을 유보시킬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한 박정희는 1972년 7월 4일, 7.4남북 공동성명, 1972년 8월 3일, 소위 8.3조치로 불리는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동하여 권력에 대한 위기 국면을 돌파하고자 하였습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를 기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은 당시 큰 충격이기도 했고 모든 혁신세력과 민주화 운동세력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감격적인 일이기도 했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동안 분단의 극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투쟁해 왔던 사람들이 주장한 내용을 사실상 거의 포함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 쌍방은 남북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은 하지 않으며 불의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3. 남북간의 다방면의 제반교류에 대한 합의

 

4. 남북적십자회담의 적극적인 추진 합의

 

5. 서울과 평양사이의 직통전화 합의

 

6. 남북조절위원회 설치 합의

 

7. 성실 이행할 것에 대한 약속

이후락, 김영주, 1972년 7월 4일

 

 

 

 

그러나 7.4 남북공동성명은 미국의 긴장완화 정책에 부응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미국의 한결같은 지지를 유지하면서 국내정치에 있어서의 강권통치를 일면 유지하고 일면 민주화운동을 누르고자 하는 정치적 술수의 측면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명서가 발표된 직후 나온 김종필 총리의 논평은 남북공동성명이 진정 무엇을 겨냥한 것이었으며 어떤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조금도 긴장이 풀리거나 너무 큰 기대를 가져서는 안된다.......정부가 비상사태를 선언한 뜻이 바로 총력안보를 위한 것이었으니 우리는 더욱 총력안보를 위해 단결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문제마저 독재권력의 유지를 위해 서슴없이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만적인 행위는 이로부터 불과 3개월 만에 이루어진 박정희의 영구집권 쿠데타,10월 유신(10월 維新)으로 분명해집니다.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단, 헌법의 일부조항 효력정지, 새헌법 개정안 국민투표 부의 등의 비상조치를 취하였습니다. 박정희는 계엄령과 비상조치에 관한 특별선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는 결코 한낱 정권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국권을 수호하고 영광스런 통일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실로 우리 민족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불가피한 조치...... 정상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시도한다면 혼란만 심해지기 때문에 부득이 비상조치를 통한 체제개혁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비상조치를 취하는 것이 절대로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것......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러 밝혀두는 바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들어 계엄령을 선포하고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을 위해 새로운 정치, 사회체제를 수립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영구집권에 대한 독재권력의 구축이었습니다.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투표에 붙여진 새 헌법은 투표율 91.9%, 찬성율 91.5%로 확정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추악한 권력연장을 위한 민주주의와 인권압살의 시대, 유신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70년대 초반,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와 민주주의와 민중생존권 압살기도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과 민주화운동 또한 가열차게 진행되었습니다. 3선개헌 저지투쟁의 실패로 인한 무력감을 극복하며 1970년 봄부터 박정희 정권에 맞서는 투쟁이 각계 각층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학생들이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학생운동의 노동자 연대가 늘어났습니다. 또한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투쟁도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민중생존권투쟁은 조직력의 부재와 대중적 토대의 취약으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투쟁의 중심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이었습니다.

 

69년의 3선개헌저지 투쟁 실패의 후유증을 극복하면서 민주화 운동세력들은 1년 앞으로 다가 온 19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박정희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목표를 걸고 조직을 정비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운동의 중심축은 지식인들의 민주화 운동과 청년 학생운동이었습니다. 1971년 4월 8일,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화예술계를 망라한 인사들이 모여서 민주수호선언을 채택하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 결성하였습니다.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는 결성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민주화투쟁의 가장 중요한 구심으로서 활동하게 됩니다. 이 때 참여했던 사람들은 7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서 활동을 해나갔습니다. 71년 결성당시의 주요한 인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동대표 :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

운영위원 : 신순언, 이호철, 조향록, 김정례, 법정, 한철하, 계훈제

주요 참여 인사 : 함석헌, 홍성우, 이세중, 한승헌, 이병용, 양호민, 남정현, 구중서, 김지하,

                     이호철, 최인훈, 박형규, 유인호

 

지방에도 민수협 지부가 건설되었고 각 지역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광주의 홍남순, 대구의 유한종 등이 주요한 활동을 담당하였습니다. 민수협은 결성이후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70년대 초반의 민주화 운동을 온몸으로 감당해 나갔습니다. 민수협은 71년의 대통령 선거가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를 저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결정적인 싸움터가 될 것이라는 판단 속에서 부정선거 감시와 공정선거를 위한 치열한 투쟁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민수협은 이 과정에서 청년, 학생 단체와 연대하여 총 6,000여명(정확한 숫자)의 투,개표 참관인단을 파견하기도 하였고 선거 이후에는 부정선거 규탄집회와 시위를 조직해 나가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학생운동에 대한 정권의 폭력적 탄압을 막아내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학원민주화를 위해 학원정상화를 위한 법률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민수협의 활동은 박정권의 압제에 숨죽이고 있던 국민들의 가슴에 민주주의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민주화 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넓혀가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72년 10월 17일에 있었던 계엄령의 선포와 유신체제의 등장으로 그 활동이 점차 위축되어 갔지만 민수협은 7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며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 질적, 양적인 확장을 이루면서 70년대 민주화운동의 모태로서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7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일반화된 용어가 된 민주인사, 민주화운동 등은 바로 이 민수협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초반 학생운동은 노동자와의 연대를 통한 민중생존권 투쟁과 그리고 박정희 독재에 맞서는 학원자유화 투쟁과 사회 민주화 투쟁이라는 틀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3선 개헌저지 투쟁에서 가장 역동적인 대중운동을 벌인 학생운동은 그 실패 이후 1970년 내내 학내 문제와 처벌학생에 대한 구제 문제 등에 관한 산발적인 투쟁이외에 이렇다 할 대중적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학생운동의 침체는 1970년 11월의 전태일 분신을 분수령으로 하여 깨어나기 시작했고 이어 박정권이 추진한 교련강화에 대한 반대운동, 1971년 4.27대선에서의 공정선거 운동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청계천의 피복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우리 민중민주운동사에 중요한 전기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동안 개발독재의 압제 속에서 소외되어 있던 노동자와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면서 70년대 노동운동의 활성화는 물론 한국 노동운동사에 중대한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그 동안 학내 문제와 정치적 민주주의, 그리고 통일운동을 중심에 놓는 민족문제를 주요한 과제로 설정했던 학생운동이 민중의 생존권 문제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실제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학생운동은 모든 집회에서 노동자의 요구와 민중생존권적 요구를 제기하였고 당시의 학생운동의 주요 활동가들은 이후 자신의 활동전망을 노동운동에서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학생운동의 질적 변화와 활동가들의 인식의 확장은 이들이 졸업하게 되는 7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의 노동현장 진출이라는 새로운 운동양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1971년 상반기 학생운동의 최대과제는 교련반대와 4.27대선에서의 공정선거 감시였습니다. 초기에 학생운동은 교련철폐와 교련강화반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거치기도 하였으나 이후 교련철폐로 기본입장을 정리하고 전면적인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이 투쟁을 위해 전국 대학의 학생대표들은 4월14일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위원장 : 심재권 서울상대 3학년)을 결성하고 ① 대학이 폐쇄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교련철폐투쟁을 계속한다 ② 공명선거를 저해하는 온갖 부정부패를 사직당국에 고발하고 대학단위로 선거참관운동을 벌인다 는 등 12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하였습니다. 이어 4월 19일 공동시국선언문 발표를 시작으로 각 대학은 교련반대 시위와 공정선거 감시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전국에서 조직된 1,250명의 학생들이 선거참관 운동에 나섰고 선거 이후에는 부정선거 규탄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인 탄압을 겪으며 이후 투쟁의 방향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과 민주주의 수호투쟁으로 전환해 나갔습니다.

 

 


대통령 선거 이후 5월부터 전국 각 대학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정선거 규탄”, “민주수호”, “학원자유화“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여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되고 구속되었으며 급기야 5월 27일에는 가장 격렬한 투쟁을 벌였던 서울대에 대한 휴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로 인해 사실상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의 중심이었던 서울대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조직적인 활동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반대시위는 각 대학별로 더욱 폭 넓게 진행되어 나갔습니다. 각 대학의 시위는 71년 1학기와 2학기에 걸쳐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내내 진행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는 교수들의 지지선언으로 이어졌고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학생운동의 저항에 부딪히며 더욱 강경한 대응으로 나왔습니다.

 

시위의 양상은 교문을 사이에 두고 투석전과 최루탄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병력의 교내진입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시위학생들의 체포와 구속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아무리 잔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의 대중적 토대는 넓어져만 갔습니다. 점점 이성을 잃어가던 박정희 정권의 폭력은 10월 5일 새벽 수도경비사의 군인들이 고려대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구타하고 불법연행하는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박정희 정권의 폭력은 학생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습니다. 이 사태 이후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 졌습니다.

 

 

 


박정권은 학생운동이 수그러들지 않자 마침내 1971년 10월 15일, 서울지역 전체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내에 군대를 진주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조치로 학원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외국어대, 경희대, 서강대에 군 병력이 진주하고 이들 학교와 전남대에 휴업령이 내려졌습니다. 1,889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고 각 학교는 시위 주동학생 177명을 제적처리 하였습니다. 학원내의 써클들이 강제로 해산되었고 각종 간행물에 대하여 폐간조치가 취해졌습니다. 강력한 저항전선을 구축했던 학생운동은 이 강압적인 조치에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기로부터 10월 유신 반대투쟁의 봉화를 올리는 1973년 10월 2일의 서울문리대 투쟁까지 약 2년동안 학생운동은 박정권의 상상을 초월한 야만적인 탄압 속에서 이렇다 할 대중적 투쟁을 벌이지 못했지만 지하활동을 통해 운동의 질적인 내용을 확장시키고 대중적인 토대를 확장해 나가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학생운동의 새로운 힘, 새로운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기간이었습니다.

 

 

청년학생운동의 또 하나의 축을 이루며 활동한 그룹이 민주수호청년협의회(민수청)였습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이 결성되었던 1971년 4월에 결성된 이 조직은 4.19 혁명과 6.3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들, 이제는 대학문을 나선 청년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이었습니다. 당초 민수협으로 포괄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청년단위의 민주화운동 조직을 별도로 만들기로 하면서 결성된 조직이었습니다. 백기완을 초대 회장(1년 후 2대 회장으로는 이재오가 선출됨)으로 하여 이우재, 조영근, 송철원, 임헌영, 김도현 등이 참여한 이 조직은 학생운동의 대중적 역량과 재야 지식인들의 명망성을 결합하여 70년대 초반의 민주화운동역량을 총체화하는 역할을 해나갔습니다. 민수청은 재야인사들의 민수협과 학생운동 조직인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냈습니다. 민수청은 한국의 사회운동에 있어서 학생운동이 아닌 청년운동이라는 새로운 부문운동을 본격화한 조직이었습니다. 이 조직에 참여했던 주요 활동가들은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70년대 초반의 민주화운동은 이처럼 민수협, 민수청, 민주수호청년학생연맹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나갔습니다.

 

71년 10월의 위수령 발표를 시작으로 12월의 비상사태 선포, 이듬해인 1972년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실상 국내의 민주화 운동은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식인들은 감시와 연금 등에 시달리며 이렇다 할 활동을 할 공간을 찾지 못했고 청년 학생들은 엄혹한 조건에서 내일을 준비하며 지하조직을 건설하고 학습과 토론, 지하신문(유인물)발간 등을 통해 새로운 운동의 조건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유신 이후에도 계속되어 1973년 10월 서울문리대 시위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 기간 중에도 갖가지 조직사건을 조작함은 물론 정치적 테러와 폭력을 통하여 민주화 운동의 뿌리를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71년 11월의 서울대 내란 음모사건(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이신범 등 구속, 김근태 장기 수배), 73년 3월 전남대 함성紙 사건(지하 유인물 함성을 발간하였다 하여 박석무, 김남주 등 9명이 구속된 사건), 6월의 고려대 민우紙 사건(역시 지하유인물 관련 사건으로 함상근, 김영곤 등 12명이 구속된 사건), 고려대 검은 시월단 사건(일명 야생화 사건으로 불리며 지하유인물 야생화를 발간했다 하여 국가보안법으로 최영근 등 7명 구속) 등을 통해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는 한편 73년 8월에는 김대중을 납치하는 등 박정권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억압과 폭력은 끝이 없었습니다.

 

71년 10월 이후 73년 2학기까지 민주화운동은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가장 강력한 동력인 학생운동은 박정희 유신 정권의 강력하고 잔혹한 탄압에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재야 민주화 운동이나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유신체제하에서의 민주화 투쟁방향을 놓고 역량축적을 통한 준비론과 강력한 타격을 통한 돌파론 등의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거듭되는 토론 속에서 학생운동은 유신체제에 대한 정면돌파로 방향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문리대의 지하써클들을 중심으로 유신반대투쟁의 방향과 실천방안이 수립되었습니다. 서울문리대는 몇 개의 지하써클을 중심으로 활동역량이 축적되고 있었고 이 써클들은 계속적인 비밀회합을 통해 73년도 2학기 유신반대를 위한 학생시위 계획을 잡아나갔습니다. 당시 서울대의 지하써클로는 손호철, 김효순, 나병식, 정문화, 정찬용 등이 참여한 <후진국 사회연구회>, 복학생인 서중석, 유인태, 유홍준이 중심이었던 <문우회>, 정윤광, 김덕수, 황인범 등의 <낙산사회과학연구회>, 그리고 이철, 이해찬, 강구철 등 2학년생이 주축이었던 사회과학모임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투쟁과 민주화운동의 불을 다시 지피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재연되어야 하는데 의견을 모으고 이를 위해서 서울대 문리대의 투쟁을 선도투쟁으로 배치하여 유신체제를 정면돌파해야 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당시 유신체제하에서의 이런 결정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엄혹했던 유신시대를 감안하면 참으로 용기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D-Day는 10월 2일 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서울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으며 가장 연장자였던 정윤광(철학과 66학번)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유신체제를 금가게 만들려면 그만큼 강력한 타격이 필요했다. 유신체제와 격돌하여 이를 부수기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을 한 사람들이 필요했다....... 당시 선진적인 학생그룹에서는 현장진출을 많이 논의하고, 졸업이후 조직적으로 진출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유신체제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졸업 이후 현장진출만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현장진출도 중요하지만, 일단......... 유신체제에 대항해서 이를 깨뜨리는 것이 학생운동의 일차적 목표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목숨을 건 각오가 필요했다...... 유신체제를 금가게 하는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집회를 성공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문리대 4학년 그룹이 책임을 지기로 하고 이철을 중심으로 한 2학년은 학생동원과 시위참가에 집중하고 이번 학기 투쟁이 끝난 이후 다음 학기(74년도 1학기)에 전개될 2단계 반유신투쟁-전면 유신철폐투쟁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 <저항의 삶, 내가 살아온 역사>, 백산서당, 2005

 

10.2 서울문리대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가는 다시 유신반대와 민주화 요구 시위의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격렬한 가두시위와 동맹휴학, 단식투쟁 등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의 투쟁이 2개월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유신정권은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수많은 학생들을 감옥에 보냈지만 학생운동이 일으킨 민주화운동의 불꽃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점점 타올라, 71년 위수령과 72년의 유신선포 이후 좀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침체되어 있던 사회운동진영과 재야운동권을 깨워냈습니다.

 

그 엄혹한 유신의 압제에 맞서며 투쟁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나선 것은 교수들이었습니다. 학생시위가 한참 진행되던 10월에 한신대의 김정준 학장 등 10명의 교수가 삭발로 학생시위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고 11월 30일에는 이화여대 교무위원회(대표:김옥길)가 학내 정보기관의 횡포근절, 언론.결사.집회의 자유 등을 담은 건의서를 발표하였습니다. 12월 13일의 전국대학 총학장회의는 학생시위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언론계에서는 동아일보를 필두로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시작되었고 종교계와 재야인사들은 73년 12월 24일 헌법개정 청원운동본부(함석헌, 장준하, 천관우, 김동길, 지학순, 법정, 김재준, 백기완 등)를 발족시키고 유신체제의 종식을 위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74년 정초부터 정국은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죽은 땅, 국민의 인권과 자유가 신음하던 얼어붙은 땅에서 드디어 민주화를 위한 민중의 분노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서슬 퍼런 압제와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민중들은 민주화운동의 강력한 대오를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위기에 몰린 박정희는 73년 12월 3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신직수로 교체하는 등 10부 장관을 교체하는 대규모의 개각을 단행함과 동시에 구속.연행 학생 석방, 언론자유 확대, 학원자율 보장 등의 유화책을 내놓았지만 전국적인 유신반대투쟁의 기운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박정희 정권은 국민을 향해 시퍼렇게 날 선 칼을 빼들었습니다. 전 민중을 상대로 정면대결을 선언한 것입니다. 유신헌법 제 53조에 근거하여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을 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중지시킬 수 있다는 초법적인 권한인 긴급조치 1호를 1974년 1월 8일 발령한했습니다. 유신체제에 대한 어떤 도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어떤 비상한 수단을 써서라도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짓밟겠다는 통첩이었습니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1, 2, 3항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파,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 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사실상 유신체제와 관련하여 어떤 반대행동도 할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헌법개정 청원운동은 물론이고 어떤 형식의 행위나 말을 할 수 없도록 강제한, 침묵을 강요하는 조치였습니다. 더구나 이를 어길 경우 영장 없는 체포와 구속이 가능하도록 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한 것이었습니다. 일반 법원이 아닌 군법에서 재판하는 것이나 15년이라는 형량은 이 조치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악랄한 조치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김지하는 이 조치가 내려진 1974년 1월을 죽음이라고 불렀습니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면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 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을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던 날

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

두려움을 넘어 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바라보던 날 그 날

그 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

나올 꽃들의 잎새들의

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

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

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

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

온 몸을 흔들어

온 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김지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중 <1974년 1월>, 창작과 비평사 1982 -

 

그러나 한번 타오른 민주화를 향한 불꽃은 이 무시무시한 긴급조치 1호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 대중투쟁의 열기는 수그러들었지만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저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긴급조치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유신반대와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계속하던 장준하, 백기완 등의 재야인사와 종교계 인사, 그리고 학생들이 구속되었습니다. 박정권은 사회적 통제와 공포를 확산시키고 민주화운동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2월에는 문인간첩단 사건을 조작하고 임헌영,이호철, 정을병 등 문인들을 구속했습니다. 모두 무려 10-15년에 해당하는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런 폭력적인 탄압에 의해 표면적으로는 대중투쟁의 열기가 수그러든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전과 달리 유신반대투쟁의 더 강력한 흐름이 고요한 수면 밑 저 아래에서 세차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되었을 때 학생들은 겨울방학을 맞이한 상태였습니다. 이미 73년 2학기에 투쟁을 벌이면서 74년 1학기에 전면적인 유신철폐투쟁을 계획하고 있던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겨울방학 기간 동안 보다 치밀한 준비를 위해 다양한 교류와 연대를 통해 74년 1학기 투쟁을 준비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10.2 선도투쟁으로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부각된 서울 문리대의 활동가들은 각 대학의 활동가들과 연결을 갖고 개학과 함께 2-3차례의 위력적인 시위를 통해 대중의 역량을 확산시킨 후 일정시점에서 일시적이고 전국적인 집회를 개최, 민주화 운동의 총역량을 결집해 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준비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긴급조치가 발령되면서 다소간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긴급조치하에서는 단계적인 투쟁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전국적인 집회를 통해 정국을 돌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투쟁계획을 변경하고 이를 준비해 나갔습니다.

 

74년 유신반대 전국 학생시위의 중심에 있었던 정윤광은 당시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가졌던 정세인식과 투쟁방향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대대적인 시위와 집회를 통해서 거리를 휩쓰는 상황은 어려워졌음에 틀림없었다. 보다 결연한 투쟁이 요구되었다. 짧은 투쟁 시기에 전 운동역량을 집중하여 집회 시위를 성공시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강력한 역량을 가진 곳(대학)에 선도투쟁을 배치, 단위의 역량을 총 집중하여 하나의 집회시위 개최를 성공시켜 위력을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전국적으로 결행되는 학생들의 결연하고 위력적인 집회시위투쟁이 성공하면, 이어서 전국의 학생들과 민주인사, 종교인, 언론인, 정치인 등 사회 각계 각층의 유신철폐투쟁에 대한 지지와 동참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 <저항의 삶, 내가 살아 온 길>, 정윤광, 백산서당, 2006 -

 

이미 계획했던 대로 10.2시위의 2선으로 남아 74년의 1학기 투쟁을 책임지기로 했던 서울 문리대의 2학년들, 이철, 유인태, 황인성, 정문화, 김병곤을 중심으로 방학동안 투쟁준비가 집중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지역과 대학을 나누어 책임지고 조직화에 들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영남 지역은 여정남, 이강철이 호남지역은 윤한봉이 지역의 조직책임을 맡았습니다. 아울러 이들은 이 시위를 단순히 학생들의 역량이 아닌 한국사회의 운동역량을 총력으로 결집하기 위하여, 재야세력과 학생운동의 선배세대인 4.19 세대, 6.3세대와도 긴밀한 연결을 맺어 나갔습니다. 4.19세대인이수병, 유근일, 6.3세대인 김지하, 이현배 등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그룹이 74년 봄의 유신반대 시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힘을 모았습니다.

 

전국단위의 위력적인 시위를 준비했던 이 계획은 그러나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중앙단위의 책임 있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일사불란한 행동통일이 쉽지 않았던 측면과 긴급조치 1호라는 무시무시한 칼날이 대중적 행동을 조직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시적이고 전국적인 집회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로 미루어지면서 3월 21일 경북대, 3월 28일 서강대, 4월 1일 연세대 집회가 개최되었지만 이들 집회는 투쟁분위기를 고양시킬 만큼 대중적 집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권의 경계심만 키워주고 대중적인 자신감은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접하면서 각 대학의 학생대표들은 전국적이고 일시적인 집회의 조속한 조직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4월 3일을 거사일로 잡았습니다. 대중적 열기가 오히려 꺾이고 있고 공안당국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건곤일척의 계획이었습니다.

 

민중, 민족, 민주선언

 

바야흐로 민중승리의 새날이 밝아오고 있다. 공포와 착취, 결핍과 빈곤에 허덕이던 민중은 이제 절망과 압제의 쇠사슬을 끊고 또 다시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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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상태를 강요하는 저들 깡패집단을!

보라! 호화방탕을 일삼으며 민중의 살과 뼈를 발라 살찐 저 도둑의 무리를!

보라! 이 땅을 신식민주의자들에게 뇌물로 바친 저 매국노들을!

 

부패특권족벌들이 저지르는 이러한 파멸상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저들의 발밑에서 빼앗기고 고통당하는 제 민주세력이 민생, 민권, 민족의 기치 아래 속속 모여들도 있다. 어떤 강압과 폭력으로도 노도와 같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이 도도한 물결을 결코 막지 못하리라. 이제 우리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집단을 분쇄하기 위하여 숭고한 민중, 민족, 민주 전열의 선두에 서서 우리의 육신을 살라 바치려 한다.

1974년 4월 3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마침내 4월 3일 전국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민청학련 명의의 <민중, 민족, 민주선언>, <결의문>,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에게 드리는 글>, <민중의 소리>등이 시내 곳곳에 뿌려졌고 청계천 5가와 서울역으로 나누어 집결한 각 대학의 시위에 돌입했습니다. 학교정문마다 시위대와 경찰의 전투가 벌어졌고 서울시내는 하루종일 게릴라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워낙에 엄혹한 상황에서 시작된 시위였던 까닭에 시위양상은 위력적이지도 대중적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신이라는 엄혹한 정세 속에서 벌어진 이 투쟁은 박정희 정권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고 국민들에게는 민주화운동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계획했던 만큼의 대중적 시위를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4.3시위는 이후 유신정권에 대한 새로운 투쟁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만은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 10시 정부는 시위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박정희 정권은 학생운동의 움직임과 동향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학교 내에서의 통제가 더욱 강화된 것이나 이 집회가 열린 후 바로 긴급조치 4호를 공표한 것으로 미루어 박정희 정권은 이 집회를 빌미로 민주화운동을 전면적으로 쓸어버릴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위가 열렸던 바로 당일인 4월 3일 밤 10시를 기해 민청학련을 언급하고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을 언급한 것은 바로 이후에 벌어지는 일련의 조치와 탄압들이 미리 기획되었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반증이라 할 것입니다. 긴급조치 4호를 공표하면서 발표한 박정희의 담화문은 바로 이후의 과정, 즉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미리 기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후 진행된 모든 과정은 박정희가 발표한 이 담화문을 그대로 꿰맞춘 것에 불과했습니다.

 

“정부는 소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으로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그들의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으레 조직하는 소위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최근에 이르러서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인민혁명의 수행을 지도하였던 것입니다.”

- 박정희 담화문, 동아일보 74년 4월 4일자 -

 

이른바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라는 박정희 정권 최악의 조작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민청학련은 실재했던 조직이고(각 대학을 대표한 학생들은 3월 중순경 이 시위를 준비하는 조직단위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대표들은 이 조직이 상설적인 조직이 아닌 4월 투쟁을 준비하는 임시적인 연대기구로 상정하였습니다) 그 활동의 목표가 대대적인 학생봉기를 통해 전 국민의 저항을 불러 일으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겠다는 데 있었던 만큼 민주화운동이자 반국가적인 투쟁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민청학련 사건 자체가 조작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유신 반대운동으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민청학련 사건을 공산주의자의 조종을 받아 일으킨 인민혁명 사건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4.3시위를 준비했던 학생들은 이 투쟁의 성격을 민주화 운동으로 분명하게 정리해 두고 있었습니다. 다시 정윤광의 증언입니다.

 

“민청학련 투쟁은 상설적 조직체를 건설하려 하지 않았다. 위력적인 유신철폐투쟁 그 자체를 조직해내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유신체제 철폐가 성공하든 아니든 그 이후까지 운동을 담당할 조직체를 건설하려고 하지 않았다...... 노동계급이 정치조직화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역량과 민주운동역량만으로 상설적인 조직을 꾸리는 것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투쟁의 이슈는 유신헌법철폐, 새로운 민주헌법제정을 핵심으로 해서 노동3권 보장, 농민생존권 보장 등 당시 석유파동 이후 경제적 위기와 민중 삶의 파탄을 구하는 내용을 담고, 제국주의에 종속, 지배당하고 있는 민족의 자주적 요구를 결합시키기로 하였다. 당시 학생운동의 당면과제는 유신 파쇼 폭압체제를 철폐하고 새로운 민주체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투쟁의 본질적 성격은 유신 철폐 민주운동이었다.”

- 정윤광, 같은 책 -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가 발표한 수사결과 발표 중 민청학련의 활동, 즉 학생들이 어떤 조직화 과정을 거쳐 시위를 준비하고 유신체제에 저항하려 했으며 조직구성과 주요한 책임자는 누구인지 등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사실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자신들이 유신반대를 위해 어떻게 투쟁했는지를 당당하게 밝혔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의 투쟁이 민주화운동과 유신반대 운동이라고만 규정한다면(물론 이 정도라 하더라도 긴급조치 4호에 의해 사형선고의 사유는 충분합니다) 중형을 통해 학생운동을 근원적으로 압살하고, 그런 공포 분위기를 확산시켜 민주화 운동 전체에 타격을 주겠다는 정부의 정치적 의도가 충분히 달성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의 본질적 성격을 왜곡하고 조작해 나갔습니다. 조작의 핵심은 민청학련 사건의 본질을 공산주의 혁명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고 북의 지령에 의해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조직을 조작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파악하고 준비한 기획에 의해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되고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체포가 이어졌습니다. 유인태가 4월 14일 검거되었고 여정남은 4월 16일 자신의 신설동 하숙집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수배망을 피하던 이철마저 4월 24일 사직공원 근처에서 검거되었습니다. 연행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분실의 지하 취조실에서 야만적인 취조와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각본대로 날조된 조서에 서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고문이 계속되었습니다. 무자비한 폭력과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이 자행되었고 마침내 4월 25일, 박정희 정권은 “조총련과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통해서 북괴의 지령을 받아서 폭력적 시위 등의 방법으로 내란을 일으켜서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혁명을 시도”한 것으로 민청학련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일체의 면회가 불허된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긴급조치 4호에 의해 재판은 군사법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최초의 인정신문 후에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와 민청학련 관련자는 따로따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반국가단체 구성 및 그 수괴와 간부, 형법상의 내란 음모, 반공법, 그리고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이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이었습니다. 총 1024명이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고 그 중에 204명이 최종적으로 실형에 처해졌습니다. 1진으로 먼저 재판을 받은 주동자급의 최종 재판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o 학원관계

 

사형 : 여정남(경북대졸)

무기 : 이철, 유인태(서울대), 이현배(서울대 대학원), 김지하(시인, 항소포 기), 안양로(서울대, 항소포기), 김병곤(서울대, 항소포기)

징역 20년 : 정문화, 황인성, 나병식, 서중석, 이근성, 정윤광, 김효순(이상 서울대), 유근일(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상복(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징역 15년 : 강구철(서울대), 이강철, 정화영, 임규영(이상 경북대), 임규영, 윤한봉(이상 전남대), 김영준, 송무호(이상 연세대), 김수길(성 균관대), 안재웅(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이강(전남대, 항소 포기), 김정길(전남대, 항소포기)

징역 12년 : 이직형, 나상기(이상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서경석(서울대졸), 이광일(교회청년연합회), 구충서(단국대)

 

o 인혁당 재건위 관계

 

사형 :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홍선, 김용원

무기 : 김한덕, 유진곤, 나경일, 강창덕, 이태환, 전창일

징역 20년 : 김종대, 이창복, 조만호, 이재형, 정만진,

다찌가와 마사끼(재일조총련), 하야가와 시게루(일본 공산당)

징역 15년 : 전재권, 임구호, 황현승

 

 

 

군사법정에서 이루어진 재판은 학생들에게는 유신반대투쟁의 연장선에 있는 또 하나의 투쟁의 과정이었습니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재판과정을 통해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는 사실을 끝없이 주장하면서 그 서슬 퍼런 군사법정에서 조차 유신반대의 뜻을 당당하게 밝혀 나갔습니다. 이 재판의 변호인들로는 황인철, 홍성우, 강신옥 등이 참여하여 민청학련 사건 피고들과 하나가 되어 변호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짜여진 각본에 의해 이루어진 재판에서 아무리 정연한 법리와 절절한 변호라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군 검찰의 구형이 있고나서 1심 재판의 마지막 변론에 나섰던 강신옥은 결국 사법사상 처음으로 변호인이 법정에서 행한 발언으로 구속되기에 이릅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그는 10년의 실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나는 법조인으로서 법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이제까지 믿어 왔으나 오늘 그 믿음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법은 정치의 시녀이며 권력의 시녀가 되었습니다. 검찰관이 애국학생을 내란죄,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사형에서 무기를 구형한 것은 사법살인 행위입니다...... 직업상 변호인석에는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고 싶은 심정입니다........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좋으며 악법과 정당하지 않은 법에 대하여는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 악법을 적용하여 이 사건을 다루는 것은 역사적으로 후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 강신옥 변호사의 변론 -

 

최후진술에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통렬하게 유신정권을 비판하고 재판을 진행한 군사법정에 대해 야유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을 거리낌 없이 밝혔습니다.

 

“지금 당신들이 우리를 재판하지만 당신들은 역사와 민중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 이철

 

“사형 구형! 영광입니다. 내가 죽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면 당당하게 사형을 받을 것입니다.”

- 김병곤

 

그 외에도 “사형을 구형받지 못한 것이 후배들에게 죄송스럽다” “사건을 고문으로 조작한 유신정권에 대한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등 역사와 민중 앞에 당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1심 판결 후 김지하, 김병곤 등 5명은 항소를 포기하였습니다. 당초 모두가 항소포기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지만 서로간의 소통의 착오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기들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이 재판을 받고 있는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과의 연대를 위해 항소포기 투쟁방침은 철회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형을 감형 받을 수 있는 항소를 포기하려고 했던 그 꿋꿋함과 결기가 바로 그 엄혹한 시대 유신반대투쟁을 했던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진 재판이후에도 민청학련 재판은 계속되었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등도 이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외 수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가야했습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사건발생일로부터 10개월이 지난 1975년 2월 15일 이현배, 유인태, 김효순, 이강철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징역이 3-4년도 아닌 무기와 20년형의 정부전복을 모의한 사람들을 1년도 되지 않아 석방한 것입니다. 이는 민청학련 사건 이후에 국내외에서 진행된 끝없는 석방노력이기도 하였지만 이 사건자체가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석방과 유신반대를 내건 학생들의 시위, 그리고 재야인사들의 계속적인 유신반대 투쟁도 박정희로 하여금 이 사건을 계속 끌어안고 가는데 부담을 주었을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통해 학생운동의 위축과 유신반대 세력의 침묵을 기도했지만 74년 2학기에 학생운동은 더욱 강력하게 진행되었고 74년 10월 24일의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대회를 필두로 한 언론인들의 언론자유운동, 이어진 소위 백지광고로 알려진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에 나타난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여론, 11월 27일 다시 결집한 각계각층 재야인사들의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등이 이어지며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는 정국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드디어 유신헌법 신임투표를 붙이고 이를 통해 한 방에 자기권력의 대중적 정당성을 다시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1975년 2월 13일, 79.8%의 투표율에 73.1%의 찬성율로 유신헌법의 신임을 확인함으로써 칼자루를 쥐게 된 박정희는 그 힘을 가지고 짐짓 대국민유화 제스처를 취합니다. 그것이 바로 3일후에 발표된 148명의 민청학련 관련자에 대한 형집행정지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는 그 누구도 석방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의도적으로 민청학련 사건과 인민혁명당 사건을 분리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민주화운동의 예봉을 꺾고 한편으로는 분단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술수를 부렸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이 폭력시위를 통해 공산혁명을 기도한 것이고 그것을 배후조종한 것이 인혁당 재건위였다고 발표했던 것에 비추면 이는 분리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공산혁명의 주체들인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1년도 안되어 석방될 만한 정도의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처리되어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을 당시 우리사회에 팽배한 이념적 편향을 이용하여 빨갱이로 가두어놓았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의 비극이었습니다. 오늘 4월 9일, 이제 그들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