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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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민청학련, 인혁당(3)
온 산하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렀다. 5월의 빛을 온몸으로 받은 산과 들이 차창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려왔다 사라져 갔다. 3일전, 5월 14일, 대전 목천교 밑 백사장을 달구던 그 빛과 다르지 않은 봄볕이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수병에게는 봄의 신록도 5월의 봄볕도 어제와는 너무나 달랐다. 머릿속은 자꾸 딴 곳으로 달아나는 생각을 붙잡지 못해 시간이 갈수록 하얘지기만 했다. 가슴은 먹먹하기만 했다. 불과 4일전, 13일 서울에서 있었던 남북학생회담환영 및 민족통일촉진 궐기대회는 아주 먼 옛날 일인 것 같았다. 통일대장정의 첫 대회로 그 다음날 열렸던 대전대회도 꿈속의 일인 듯 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에 전주대회로 향하던 길을 돌려 서울로 올라왔다. 도로 한 가운데 들어앉은 탱크, 끝없이 이어지는 군용트럭의 행렬이 계엄령이 선포되었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거리 전파사에서는 비상포고령이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체의 옥외집회가 금지 되었고 모든 신문, 출판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가끔씩 회합장소로 사용했던 서울역 앞 무궁화 다방으로 가는 길이 낯설기만 했다.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전국이 통일운동의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흉흉한 소문 또한 돌았다.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이었다. 오랜 기간 혁신정당 운동을 했던 선배들은 나름대로의 정보가 있었는지 얼마 전부터 군부 쿠데타의 우려를 이야기했다. 보다 강력한 전선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모으는 정도의 대책이 전부였다. 민민청과 통민청의 통합을 서두르자는 이야기, 혁신정당의 통합을 추진하자는 이야기, 민자통을 명실상부한 전선운동조직으로 발전시키자는 이야기 등이 나눌 수 있는 대책의 전부였다. 실제 군부쿠데타가 일어날 경우에 대한 면밀한 대책은 없었다. 모두 설마하는 심정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군부쿠데타에 대한 걱정 보다는 운동내부의 혼선을 조정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민통전학련 학생들을 설득하여 궐기대회에 참석시키는 문제, 전국 순회 궐기대회를 조직하기 위한 행정적인 준비 등이 훨씬 더 시급한 과제였다. 수병은 민통전학련을 설득해내지 못했다. 결국 통일대장정과 관련하여 학생운동 부문의 대표는 자신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 음모가 한참 진행 중일 때 운동진영은 통일대오 조차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한이 몰려왔다.
무궁화 다방으로 들어서자 함께 통일운동의 대장정을 준비했던 혁신계 정당의 원로들, 선배들이 미리 자리를 갖추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26살로 가장 어린 수병은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통민청과 민민청, 민자통의 선배들이 들어섰다.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도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부의 사람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쿠데타 세력의 중심인 박정희가 좌익의 전력이 있는 사람이고 쿠데타 세력이 민족적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으니 부패하고 무능한 장면정권 보다는 오히려 나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다수는 군사혁명위원회의 혁명공약 1호가 반공을 국시로 하고 반공체제에 대한 재정비를 천명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군부가 그동안의 학생운동이나 통일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으로 나올 것이라고 보았다. 치열한 토론은 없었다. 누구도 현재의 상황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일단 몸을 피하고 향후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수병은 그 길로 대구행 경부선 열차에 올랐다. 몸을 피한다는 것에 대한 절박감은 없었다. 군부라 한들 무어 죽을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당장 오늘 내일 사이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을 피하더라도 잠시 집에는 들리겠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신변문제는 차치한다하더라도 새로운 운동이 큰 벽에 부딪힌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중의 역동적인 투쟁을 통해 조국의 통일과 사회변혁을 이루려 했던 새로운 변혁운동의 봄이 한번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일순간에 지는 벚꽃처럼 가고 있었다. 수병을 태운 열차는 그 무거운 절망에 힘이 부친 듯, 민중의 고통스러운 앞날이 안쓰러운 듯, 가쁘게 숨을 쉬며 반도의 잘린 땅을 질러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대구역사에는 헌병과 경찰이 줄줄이 늘어 선 채 검문을 하고 있었다. 불현듯 걱정이 되기도 하였으나 별 일은 없었다. 창녕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의령군 부림면 구성마을까지 가려면 아직도 먼 길이었다. 창녕 차부에 내리니 부림면까지 가는 버스는 한참이나 있어야 했다. 30리 길이었지만 수병은 오랜만에 찾은 고향길을 걷기로 했다. 낯익은 고향길이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덜어 주었다.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오는 다릿재 고개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부터는 반 마장, 수병의 마음은 이미 고향집에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수병이 마음속에 그렸던 그 고향집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다릿재 고개를 채 넘기 전에 수병은 잠복하고 있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장, 민족일보 수습기자, 민통전학련 결성준비위 경희대 대표였던 이수병은 그렇게 체포되었고 그 후 혁명재판소에서 학생으로서는 최고형인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감형을 받고 출소한 것은 1968년 4월 1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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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는 뜨겁게 달아오르던 변혁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잠재워 버렸습니다. 반공을 전면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군부는 반외세 자주통일 운동도 민중의 생존을 위한 변혁운동도 산산이 부수어 버렸습니다. 군부는 쿠데타 직후 설치한 국가재건최고회의(5월 22일 발족)를 통해 친미와 반공을 내세우며 사회전반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억압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오랜 기간 이승만 독재와 장면정권의 무능, 외세에 빌붙어 민중을 핍박해 온 지배세력에 실망했던 민중들은 처음에는 이 군사 쿠데타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군부에 대해 일부 학생운동권이 지지성명을 내기도 하였고 변혁운동 내 일부는 장면정권 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가져 보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북한조차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근거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세력이 북한정권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지 막연한 기대를 품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친미, 반공 노선을 명확하게 표방한 군사 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들고 나온 것은 진보진영, 혁신진영의 사회변혁운동, 통일운동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었습니다. 미국의 지지와 승인을 얻기 위해서는 민족자주를 앞세우며 반외세 투쟁에 나섰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좌익전력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을 없애주어야 했습니다. 박정희는 포고령 1호를 통해 일체의 집회를 금지한 후 이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시켰습니다. 통일운동과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민자통, 민민청, 통민청 등의 변혁운동조직과 민통전학련 등의 학생운동 조직이 모두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언론기관에 대한 통제와 폐쇄도 진행되어 민족일보를 비롯한 진보계열의 신문들이 모두 폐간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부는 노동운동, 통일운동, 학생운동의 주요 활동가에 대한 전면적인 검거와 체포에 들어갔습니다. 전국적으로 약 3천명이 투옥되었습니다.
군사 쿠데타 세력은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했습니다. 이는 투옥시킨 진보진영 인사들을 혁명재판에 회부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가 설치되었습니다. 학생운동과 통일운동, 변혁운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재판은 특수반국가사범으로 기소되어 혁명재판소 심판 2부가 담당하였습니다.
혁명재판이 열린 것은 7월 28일이었습니다. 이 재판을 통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사회당의 최백근 등이 사형당했고 민통전학련의 지도부로서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이수병, 윤식(서울대, 위원장), 유근일(서울대 대의원총회의장), 이영일(서울대, 공보부장), 황건(서울대, 조직위원장), 김승균(연락위원장, 성균관대) 등이 7-1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민자통, 민민청, 통민청 등의 조직을 결성하고 반외세자주통일운동과 변혁운동을 중심에서 이끌어 갔던 사람들, 자주적인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에 섰던 사람들은 모두 수배되고 구속되었습니다. 후에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는 사람들도 모두 이때 구속되거나 오랜 기간 수배를 피해 잠적해야만 했습니다. 민민청 경북지역 위원장이었던 서도원은 7년형을 선고받았고 사무국장이었던 송상진은 혁명재판소에서 기소유예 판결로 석방되었지만 6개월을 감옥에 있어야 했습니다. 서울대 민통련 대의원이었던김용원은 지도부가 아니었던 덕에 구속은 면했지만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민민청 간사장 도예종, 민자통 경북 부위원장 하재완, 통민청 위원장 우홍선 등은 수배를 피하여 오랜 기간 잠적해야만 했습니다. 이들은 구속을 면한 덕에 감옥살이는 하지 않았지만 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곤욕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4.19 혁명이 일으켜 세운 반외세 민족자주의 통일운동도, 노동운동도, 그리고 사회변혁운동도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5.16 군사 쿠데타와 함께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은 다시 힘든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학생운동은 정치지도조직의 부재와 운동이념의 빈약을 그대로 드러냈으며, 다른 부문운동은 군부의 폭압적인 통제 속에서 모두 지하로 숨고 말았습니다. 서울대 학생회는 5.16쿠데타가 발발한 지 일주일만인 5월 23일 5.16지지선언을 했고 6월 24일에는 전국총학장회의에서 혁명정책에 대한 지지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이어 6월 24일에는 서울대에서 농촌운동과 의식개혁을 중심에 놓는 향토개척단이 결성되었습니다. 향토개척단 운동은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는 군사정부의 재건국민운동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군사정부가 민중의 생존권과 민족적 민주주의를 천명하고 있는 만큼 새로운 민족적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학생운동의 역할이자 4.19혁명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피로써 이룬 4.19혁명은 유실되었고 학생운동은 낭만적인 민족주의에 자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반외세자주통일운동도 사회변혁운동도 실종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군사정부의 본질을 깨닫고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는 데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았습니다. 군사정부가 내놓은 연이은 사회경제 정책은 혁명공약이 권력을 위한 허울에 불과하며 군사정권은 결코 4.19의 계승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민정이양 약속이 집권연장을 위해 거듭 파기되고, 잇단 권력형 부패가 드러나면서, 학생들은 5.16 군사 쿠데타의 성격과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1963년 봄부터 학생운동은 군부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독재를 강화하고 있으며 외세의존의 매판적 경제질서를 더 심화시키고 있음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학생운동 내부는 반성과 성찰을 통해 새롭게 대중적인 역량을 결집하면서 오랜 침묵을 깨고 군부를 상대로 한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합니다.
1963년 내내 학생들의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군정연장 반대와 미국과 일본에 대한 자주적인 외교와 통상정책의 수립이 주요한 투쟁의 과제였습니다. 군부는 이런 저항을 폭력적으로 누르며 군정연장을 거듭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드디어 1963년 12월, 집권할 준비를 마친 군사 쿠데타 세력은 약 2년 6개월의 군정을 끝으로 3공화국을 출범시키며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집권하자마자 박정희 정권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한.일간 국교수립을 위한 한일회담이었습니다. 이미 군정시절부터 미국의 종용에 의해 한일국교 수립을 위한 작업에 들어가서 1963년 김종필-오오히라 메모를 주고받았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봄부터 본격적인 한일회담에 나섰습니다(오늘 -일곱 번째 한일기본조약 참조).
한일수교는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전략의 하나였습니다. 한.미.일의 공조아래 북한을 고립시키는 한편 소련에 대한 방어와 견제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비약적으로 성장한 잉여자본의 탈출구가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과 일본의 자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시종 저자세 외교와 굴욕외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협상에 목을 매고 있었습니다. 사회각계각층에서 한일회담 반대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왔습니다. 야당은 물론 문화예술인, 지식인, 종교인, 심지어는 쿠데타에 참여했던 예비역 장성들까지 분야별로 서명운동을 진행하는 등 당시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는 전국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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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알고 있다
누가 또 이나라와 백성을 팔아넘기려 하는지를
우리 이미 똑똑히 보아 알고 있다.
어떻게 또 우리가 지금 팔려 넘어가려 하는지를
조국 또 민족의 이름으로
자주, 자유, 독립국가의 시민
그 당당해야 할 민권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다만 한 가지
한.일 굴욕 매국 협정 일체를 즉각 파기하라!
그 더러운 망국협정의 비준을 즉각 파기하라!
-<우리는 또 다시 노예일 수 없다>, 박두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은 다시 역동적인 투쟁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봄부터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3월 24일 서울에서의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일어난 대중시위는 학원에서 시작되어 전 국민의 저항으로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관통한 주요한 이념은 민족주의였습니다. 여기에 한일회담을 통해 배를 불리려는 매판자본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확히 하면서 민중 중심의 자립경제에 대한 지향이 보태어 졌습니다.
“공화당 정부가 내걸었던 민족주의는 어디로 사라져 가버리고 우리의 우방 미국이 덮어씌운 면사포가 정부를 현혹한다...... 우리는 절규한다. 우리의 피어린 노력으로 우리끼리 살아보자고. 중국, 일본, 미국은 차례로 우리의 종주국이었다. 종주국 없이 한 번 잘살아 보자. 이것이 우리의 핏덩이 같은 절규다.”
- 3월 24일 고려대 시위의 선언문 -
“4.19 이념과 민족자립경제의 반역적 망국재벌을 처단하고 그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여 민족자본화하라”
- 3월 24일 연세대 시위의 선언문 _
시위는 서울에서 시작되어 지역으로, 그리고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되어 고등학생들과 일반 시민으로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정치인과 지식인, 문화예술인 등을 중심으로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구성되어 전국적인 반대운동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4월이 되자 시위는 점차 확대되었고 4.19 기념일을 전후로 하여 학생시위와 시민들의 반대시위는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시위에도 불구하고 김종필을 일본에 체류시키면서 한일회담을 계속 진행해 나갔습니다. 이런 정부의 태도는 국민들의 저항을 더욱 타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단순히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를 떠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5월 20일, 전국 32개 대학 연합으로 구성된 한.일 굴욕외교반대 학생총연합주최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진행하고 학생들은 격렬한 가두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정부는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시종 무력을 통한 강경진압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연행, 구속되었지만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5월 27일, 전남대 시위에서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는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때로부터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정권퇴진투쟁의 양상으로 진행되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권은 6월 1일부터 시작된 32개 대학 대표들의 단식투쟁장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학생대표들을 전원 연행한 데 이어 6월 3일 오후 9시 40분, 마침내 비상계엄령과 무기휴교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각 대학에서는 시위 주동자들에 대한 학생징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학생들이 계엄령하의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주요 지도부는 서울대의 김중태,현승일, 김도현 그리고 고려대의 이경우, 박정훈 등이었습니다. 이른바 6.3세대라고 일컬어지는 민주화운동의 한 흐름은 그렇게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의 투쟁의 불꽃은 다시 이듬해인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협약의 체결과 이에 대한 국회 비준이 이루어지는 8월 14일까지 다시 한 번 타올랐지만 결국 군사독재와 매판자본의 바람에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명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갑니다. 이명박은 한.일회담 반대투쟁 당시 고려대 학생지도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명박은 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으로 고려대 학생 시위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반대투쟁이 정점으로 치달으며 정권퇴진 투쟁으로 나아가던 5월 31일에 이명박은 고려대
구국투쟁위원회의 부
한일회담반대투쟁으로 재판받는 학생들, 가운데 이명박의 모습이 보인다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6월 1일, 각 대학의 학생대표가 연행된 이후 이어진 학교별 단식투쟁에도 참여하였으나 6월 3일 내려진 비상계엄령에 의해 도피했다가 6월 15일 시경찰청에 자진출두하였습니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풀려났습니다. 재판이 진행 중이었던 기간인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이명박은 감옥에서 변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출옥 후 학생운동을 완전히 정리하면서 주변의 옛 동지들과도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가 당시에 한일반대회담 투쟁에 나서면서 자신의 심경을 기록한 글이 지금 남아 있습니다. 한미FTA와 강정마을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명박이 그 때의 그 이명박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양국 간의 민족사적인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있는데 단순한 경제 논리로 덮어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다. 일제가 사과를 하고 들어와야 할 성격의 일이지, 우리 쪽에서 먼저, 그것도 밀실 협상을 통해 손을 벌리고 들어간다는 것은 민족적 감정이 용납할 수 없다. 군사정권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현실적 필요에서 파악한 데 견주어, 학생과 대다수 국민은 이 문제를 민족사의 장구한 흐름 위에서 파악하고 있다. 군사정권의 판단은 조급하고 졸속적이다.”
- <신화는 없다> 이명박, 김영사, 1995
1차 인혁당 사건은 바로 이 한일회담 반대시위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1964년에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3계엄령으로 잠시 숨을 고른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달아오르던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이 운동에 대한 지지와 공감을 표시하던 국민여론을 돌릴 방안을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기자회견을 통해 인혁당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3.24 이후의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한 이 인민혁명당은 1962년 1월 우동읍(우홍선) 집에서 북괴로부터 특수사명을 띠고 남하한 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통민청 중앙위원장이 던 우동읍과 동간사 김배영, 김영광, 민민청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작, 전 진보당원 김한덕, 빨치산 출신 박현채 등이 참가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회를 갖고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 경제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북괴로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새 강령과 규약을 채택함으로써 발족하였다. 인혁당은 창당 후 조직을 확대해오다가 1964년 4월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동당 중앙상임위원인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함과 동시에 학생데모를 4 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현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근거하여 중정은 52명을 체포하여 조서를 꾸며 검찰로 넘겼습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수사결과를 넘겨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용훈 부장검사, 김병리, 장원찬 검사)은 이 사건이 물증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중정의 조서만 있는데다 그것마저도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확인하고 기소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와 검찰총장이 강력하게 기소를 지시하자 일선검사들은 기소권침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정강과 정책도 없이 다만 진보를 지향하는 친목회 정도의 모임을 두고 남한 적화를 목표로 한 북한 이념에 동조한 당이라 이름 붙일 수 없다”, “양심상 도저히 기소를 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기소장에 서명을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검사였던 장원찬은 후에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한차례 구속기간을 연장해 가면서까지 수사를 해도 정보부 발표대로 그들이 북쪽의 지령을 받고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난수표가 나온다든지, 어떤 조직을 결성하려면 강령이 있다든지, 당에 가입선서를 했다든지, 가입증이라든지, 자기들끼리 모이는 사진을 촬영했다든지, 녹음, 전화도청...... 뭔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정보부에서 작성한 조서만 있었다.”
결국 이들은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민복기의 주재하에 열린 검찰수뇌부 회의에서 ‘빨갱이 사건에 증거가 왜 필요하냐’ “상명하복의 검찰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등의 압박을 받자 사표제출로 맞섰습니다. 급기야 이 사건은 국회에서 문제가 되었고 조작여부를 두고 정치적인 쟁점이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드러난 중정의 고문사실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사건의 조작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1974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에서도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는 도예종은 자신이 당한 고문을 변호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공개했습니다.
“촬영실이라는 방안으로 끌고 가 옷을 벗긴 다음 다다미 2장 넓이 위에 앉혀 놓고 물을 머리로부터 부은 다음 수건과 로프로 결박, 나중엔 옷을 입히고 두꺼운 베 같은 것으로 만든 잠수복 비슷한 것을 덮어 씌워 목과 다리만 나오게 했는데 몸을 조금만 밀어 붙이면 두 다리는 위로 올라가고 고개를 꼼짝 못하게 결박된다. 수건으로 코, 입, 얼굴을 씌워 막고 물을 부으면서 엄지발가락에 끼운 전선에 전기를 통했다 끊었다 하는 전기고문을 당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검찰수뇌부와 중정은 슬그머니 북한의 지령에 의한 국가변란 음모라는 기소내용을 북한에 대한 찬양.고무로 변경하고서 부랴부랴 검사를 바꾸어 체포했던 52명 중 13명에 대해서만 기소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도예종에게만 3년 실형을 선고하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검찰총장 신직수와 중앙정보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사법부를 압박, 결국 항소심에서 무죄를 뒤집어 도예종, 양춘우, 박현채 등 7인에게 1-3년의 실형, 김금수, 이재문, 우홍선(우동읍) 등 나머지 6인에게는 집행유예가 선고되도록 하였습니다. 이 조직의 배후조종에 의해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벌인 것으로 기소되었던 오병철, 황건, 김정강,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김승균 등의 학생운동 지도부도 집행유예로 모두 풀려났습니다. 이것이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10년 후에 벌어질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이러한 과정들은 고스란히 반복됩니다. 학생운동에 대한 배후조종, 공산혁명 기도, 계엄령 혹은 긴급조치를 통한 공안정국 조성, 중정이 주도하여 조작한 수사조서, 고문, 민주화운동.학생운동과의 분리 등은 1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너무나도 같았습니다. 이들 중 도예종,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정만진, 김한덕, 조만호 등은 10년 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똑 같은 과정을 두 번이나 겪어야 했고 몇 사람은 결국 죽음을 맞고야 말았습니다.
1차 인혁당 사건은 한일회담 반대시위라는 반외세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무고한 사람들을 북한의 간첩으로 몰아간 전형적인 공안 조작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0년 후에 다시 반복되는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이 저지른 가장 대표적인 범죄로, 숱하게 발생했던 공안사건 중 가장 전형적인 조작사건으로,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한 야만적인 폭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은 이 사건이 갖는 변혁운동사적 의미입니다. 진보당 사건으로 철퇴를 맞았다가4.19 공간에서 복원되고, 그러다가 다시 5.16 군사 쿠데타로 지하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던 변혁운동의 역사 속에 1차 인혁당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운동사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5.16 이후 지하로 잠적한 변혁운동세력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민민청, 통민청, 민자통, 그리고 혁신정당에 관계했던 사람들과 통일운동을 중심에 놓고 투쟁했던 학생들 중, 어떤 사람들은 감옥에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수배라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검거의 칼날이 비켜 간 사람들은 평범한 사회인으로 조용히 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어느 공간에 있었든지 그들이 그렸던 평등한 세상에 대한 열망,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묶어 보고자 했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새로운 운동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정치적인 억압과 굴레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사람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근본적인 체제 변혁으로서 공산주의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 즉 변혁운동을 위한 전위조직 건설이었습니다.
5.16 이후 변혁운동과 관련된 모든 사건은 사실은 전위조직 건설과 관련된 사건들입니다.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 1967년의 북괴대남간첩단 사건(세칭 동백림사건), 민비연(민족문화비교연구회) 사건, 1968년의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그리고 1974년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1979년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등은 바로 이런 전위조직의 결성이 밖으로 드러난 사건들이었습니다. 공안당국은 이런 전위조직에 대하여 한결같이 북한의 직접지시와 공작에 의해 설립된 공산혁명 조직이라는 이름을 붙여 처벌하였습니다. 이런 공안당국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한국사회의 변혁과 분단극복을 위한 운동을 국민들로 하여금 북한의 대남적화 사업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이런 인식은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사에서 6-70년대를 단절된 빈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80년대 이후 타오른 한국의 변혁운동, 통일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멀리 일제하의 항일민족운동,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단절 없이 면면히 흐름을 이어 온 운동입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끊어진 변혁운동의 맥을 끈질기게 이어 가고자 했던 전위조직 건설 운동은 북한의 대남적화 사업이 아니라 분명히 한국의 변혁운동사의 역사이며 오늘 우리 운동의 어제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등의 조직사건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었으며 오랜 기간 철저히 준비하고 투쟁해 온 변혁운동의 역사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4.19와 5.16을 경험하고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겪은 일부의 학생운동 세력들은 남한 사회의 변혁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되면서 변혁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대중운동과 전위조직의 관계 문제와 남한 사회의 운동역량과 북한 혁명역량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조직사건 중 통혁당사건은 4·19 혁명의 실패 이후 남한의 혁명역량을 지하당 건설운동으로 전환한 북한의 전략과 새롭게 급진화의 길로 나선 남한의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이 결합된 사건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 전위조직들은 대부분 남한 내의 변혁운동가, 통일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출발한 자생적인 운동조직이었습니다. 이들 조직들은 대부분 새로운 사회의 건설과 분단의 극복, 그리고 군사독재와 매판자본의 착취를 극복하기 위한 반외세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한 조직들이었습니다. 이들 전위조직들은 써클수준, 혹은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을 통해 대중적인 기반을 확장하고 대중운동과의 연계를 꾀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정권이 이 조직의 존재나 기본이념을 전면적으로 조작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접근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소중한 변혁운동사를 사상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박정권의 조작의 핵심은 이들 조직들이 북한과 연계하여 대중운동을 배후조종하고 국가변란을 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활동이 매우 대규모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폭력혁명을 기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북한의 간첩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 대부분의 사건에서 역사적 사실과 운동사적 의미를 취하는 것과 함께 조작과 거짓을 가려내어 올곧은 변혁운동사를 정리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전위조직을 통한 변혁운동이 역사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우리 운동의 변혁운동사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분단이라는 구조에서 발생하는 북한과의 관련성 때문일 것입니다. 외세의존적이고 반민족적, 반민중적인 집권세력과 매판자본들은 분단을 매개로 반공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변혁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분리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진행해 왔습니다. 지배계급의 이러한 은밀한 이데올로기는 우리사회에 깊게 침윤되었고 민주화 운동의 중심세력들 또한 이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6.70년대의 민주화 운동세력들이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세력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보수세력에게 투항하거나 혹은 자유주의 세력의 그늘 밑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70년대 말의 학생운동과 80년대 초의 노동운동 또한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분단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북한문제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지 못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은 실천적인 운동에서 힘 있는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역사적으로도 소멸된 운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6-70년대의 변혁운동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당시의 전위조직 건설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북한체제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과 6.70년대의 변혁운동가들이 가졌던 인식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 조직들이 북한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했고 통혁당의 경우에는 북한과의 관련성이 상대적으로 더 깊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시기 일부 전위조직들이 북한과의 연계가 불가피했던 점은 북한에 대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각과는 사뭇 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분단이 갖는 구조가 오늘날처럼 오랜 시간이 흘러 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지지 않았던 당시에 통일이라는 문제는, 특히 분단구조를 극복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변혁운동가들에게 북한은 그리 멀지 않은, 바로 어제까지 왕래하던 우리 땅이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스탈린주의로 대표되는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보면서 갖게 된 사회변혁운동에 대한 확장된 인식,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당시의 운동가들이 갖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체제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부정적 인식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남한과 비교해 볼 때, 북한은 당시 운동가들에게 지향해야 할 체제이자 가치로 인식되었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남한사회의 조건으로 볼 때 계급적인 대중운동의 토대가 거의 전무한 조건에서 변혁운동가들은 북한을 남한 변혁운동의 유일한 토대이자 버팀목으로 인식했을 수 있습니다. 그보다 한 참 시간이 지난 후인 8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북한을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변혁을 위한 민주기지로 보는 변혁운동론이 존재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6.70년대 당시 완전한 고립상태에 있던 변혁운동가들에게 있어서 북한의 존재는 남한 변혁운동의 거의 유일한 근거였을 것입니다. 일제하에서 제국주의와 싸우며 민족의 해방과 함께 혁명을 꿈꾸었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한편으로 코민테른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코민테른을 자신들의 운동의 주요한 기반이자 버팀목으로 삼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6.70년대 우리 변혁운동이 북한과 일정한 관계를 맺었던 것을 지금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할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6.70년대 변혁운동과 북한의 연계문제에 대해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한국사회 변혁운동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며 지배계급에 의해 혹은 우리 스스로가 왜곡해 온 변혁운동사를 복원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물론 변화된 우리 사회의 조건, 드러난 북한체제의 한계를 애써 무시하며 여전히 당시의 인식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변혁운동의 한 흐름이 오히려 우리의 변혁운동사의 온전한 복원을 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우리 운동에서의 북한문제를 둘러 싼 갈등이 6.70년대 변혁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장애가 되고 있는 지점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운동의 오늘을 있게 한 6.70년대 변혁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간과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980년 광주항쟁은 바로 이런 인식을 극복하고 우리 변혁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광주항쟁은 단지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의 항쟁이라는 의미를 넘어 미국으로 대표되는 외세에 대한 새로운 인식전환을 이루는 계기였고 분단모순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민족문제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다 80년대 중반으로 넘어서며 등장한 노동운동의 활성화가 가져 온 한국사회의 계급모순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면서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은 지배이데올로기가 강제한 긴 단절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운동은 여전히 6.70년대의 변혁운동사를 온전히 복원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북한 문제이며 이는 지배계급의 왜곡과 함께 우리 스스로도 분명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는데 연유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날 민족문제, 혹은 북한문제를 둘러싼 혼란과 갈등 또한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1차 인혁당 사건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권력에 의한 조작을 파헤치고 진실을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운동사적 의미를 살려냄으로써 우리의 변혁운동사를 올곧게 이해하고 복원시켜야 할 것입니다. 1차 인혁당은 변혁운동의 끈을 이어오며 반외세 자주통일운동, 반독재민주화운동, 사회변혁운동을 했던 전위조직이었습니다. 인혁당은 실제 북한과는 연계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인혁당과 통혁당은 그 기본적인 운동노선에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통혁당은 NL이고 인혁당은 CA(혹은 PD) 식으로 파악하는 견해입니다. 인혁당은 남한 독자노선이었다고 보지만 통혁당은 북한과의 연계노선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인혁당이 설사 북한과 연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운동의 조건을 생각할 때 북한과의 연계문제가 인혁당의 운동사적 의미를 논하는 결정적인 잣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조건에서 그것이 무엇이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민중중심의 사회를 이야기 하고,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북한의 주장과 노선을 따르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실도 분명히 확인되지 않은, 공안당국이 주장하는대로 이 조직이 북한체제를 찬양.고무 했다거나, 혹은 북한에서 내려온 인사와 교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변혁운동사에서 인혁당의 위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조직이 실재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조직의 이름이 인혁당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립니다. 인혁당이라는 이름의 조직의 실재여부는 74년에 발생한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직결되는 사안입니다. 인혁당재건위의 조작을 주장해야만 했던 조건에서 인혁당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실재했다고 증언하는 것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의 실재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박정권의 만행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부여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또 인혁당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실재했다는 것을 인정할 경우 북한과 연계된 조직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남한사회의 조건을 고려할 때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운동사에서 1차 인혁당의 실재여부는 역사적 진실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 측면이 있습니다. 더구나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와 가족들, 그리고 인권단체들이 이 사건에 대한 조작을 주장하면서 진실규명과 관련자들의 무죄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은 인혁당의 실재여부에 대한 역사를 객관화하고 변혁운동사를 복원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정치적 민주주의의 진전이 일정하게 이루어진 지금도 분단이라는 구조 속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역사적 접근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의 문제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이 조직이 실재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변혁운동을 위한 전위조직으로서 이 조직의 실재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1차 인혁당 관련자들이 조직이 실재했음을 증언하고 있고(조직의 실재를 증언하는 사람들도 북한과의 관련성은 부정하는 증언이 다수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변혁운동의 한 흐름인 민족해방그룹들도 우리 운동사를 정리하면서 이 조직이 실재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이 조직의 실재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할 것입니다.
1차 인혁당은 검찰의 기소장에 적시된 바와 같이 대체적으로 1962년 1월 우홍선의 집에서 발족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날 참여한 인사들은 도예종, 우홍선, 박현채, 김금수, 이재문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1차 인혁당은 당시의 정세적 조건 때문에 그야말로 몇 사람에 의한 전위조직 혹은 써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한국사회에 대한 진단, 미국이라는 외세에 대한 입장, 박정희 정권의 본질, 북한체제에 대한 이해 등을 놓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자유주의에 근거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과 변혁운동의 관계를 고민하며 이후의 전망과 전략을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때로는 대중운동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과의 연계를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경주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그 규모가 크지 않고 그 활동의 범주와 영향력이 높지 않았다 하더라도 1차 인혁당은 분명 일제하에서 이루어진 민족해방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운동이었고 이후 끊어질 듯 이어가는 우리 변혁운동의 토대가 된 운동이었음을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박정권과 중앙정보부의 정치적 의도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을 인혁당 사건을 통해 원천봉쇄하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의 음모는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인혁당 관련자들 중 일부는 결국 실형을 살았지만 그들이 감옥에 있었던 이듬해 1965년, 박정희 정권은 다시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위한 전국적인 저항에 부딪혀야만 했습니다. 인혁당이 아니더라도 반외세 자립경제와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 이후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은 이렇다 할 대중적 토대를 구축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수면아래 숨죽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통일을 말하는 것, 자주를 말하고 민족문제를 말하는 것, 그리고 노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때 이후로 20년이 훌쩍 넘도록 한국사회의 금기였습니다. 그 긴 세월은 한반도 전체를 변혁운동의 동토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이 소시민적 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그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전면적으로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변혁운동의 부재 속에서 자리를 잡은 자유주의 민주화운동이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측면, 즉 지금 우리 사회의 모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분단의 모순, 계급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킨 측면이 있음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계급운동, 통일운동이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도 이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어졌던 변혁운동의 단절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변혁운동사를 올바르게 복원하는 것은 지금 우리 운동의 현재를 살펴보고 새로운 변혁운동의 전망을 열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 이후 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진행되던 시기,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고초를 치렀던 사람들은 다시금 통일운동과 반독재민주화 운동, 그리고 사회변혁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며 새롭게 결합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대구.경북지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해 왔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지역에서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운동의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1961년 12월 민민청 경북지역 위원장으로 통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혁명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 받았던 서도원(1923-1975)은 1964년 대통령 특사로 2년 7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감옥에 있었던 관계로 서도원은 인혁당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석방 후 서도원은 감옥에서 배운 침구술로 생계를 해결하며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민민청 경북지역 간사장이었던 도예종(1924-1975)은 5.16군사쿠데타 이후 산판노동자로, 장사꾼으로 오랜 기간 수배생활을 견뎌내다가 기소중지가 되면서 대구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로써 3년의 실형을 받고 1967년에 만기 출옥하였습니다. 출옥 후에는 건설업계에 뛰어들었고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으로 인해 상승하던 건설경기의 덕으로 도예종은 삼화건설이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매우 안정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교원노조운동을 시작으로 대구경북지역의 통일운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경북지역 민민청 사무국장을 맡았던 송상진(1928-1975)은 5.16 이후 구속되어 갖은 고초를 당했지만 다행히 기소유예로 풀려났습니다. 이후 송상진은 대구의 팔공산에서 양봉을 하다가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으나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송상진은 다시 팔공산에서 양봉인으로서의 삶을 살아 갔습니다. 하재완(1931-1975)은 1961년 민자통 경북협의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5.16 군사쿠데타에 세력에 의해 수배생활을 하다가 기소 중지된 후 양조업, 출판업, 건축업 등을 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예비역 육군대위였던 우홍선(1931-1975)은 1960년 통민청 중앙위 위원장, 민자통 조직위 간사를 맡아 활동하다가 군부쿠데타가 일어나자 수배를 피해 잠적했습니다. 이후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거처를 서울로 옮기고 한국골든스탬프사의 이사로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들은 새로운 운동에 대한 모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대구.경북지역에서 혁신정당운동과 통일운동의 중심에 섰던 이들은 인혁당 사건 이후 공안당국의 감시가 계속되었지만 평범한 생활 속에서도 수시로 만났습니다. 대구 염매시장 돼지국밥 골목의 한 식당을 중심으로 자주 만나서 정세와 운동의 전망에 대해 자주 토론을 해나갔습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던 대구매일신문 기자 이재문과 장석구 등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운동의 전망을 가지고 실질적인 조직을 결성할 정도로 나가지 못했지만 이들은 조금씩 조금씩 새로운 운동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논의에 새로이 이수병과 김용원, 여정남이 결합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말부터였습니다.
이수병(1937-1975)은 1968년 4월 감형을 받아 7년만에 출소하였습니다. 출소 후 고향인 의령에 잠시 머무르며 과거 4.19 공간에서 통일운동과 변혁운동을 함께 했던 옛 동지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수병 또한 자연스럽게 과거 운동가들이 모이던 대구 염매시장의 돼지국밥집을 드나들며 토론하면서 향후 운동에 대한 전망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수병은 1969년 서울로 올라오면서 본격적으로 새로운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수병은 이미 서울에 근거를 두고 생활하고 있던김금수, 박중기, 유진곤 등 암장 동지들과 우홍선을 비롯한 과거 통일운동의 선배들과 교류하며 향후 운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수병과 친구사이였던 김용원(1935-1975)은 5.16 당시 서울대 민통전학련의 대의원으로서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가 풀려난 후 다시 1964년 인혁당 사건으로 또 한 번 고초를 당했지만 그래도 큰 일은 당하지 않고 넘겼습니다. 1964년 이후 동양중고 교사를 거쳐 경기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이수병의 상경과 함께 새로운 운동을 같이 모색하는 한편 이수병과 함께 가끔씩 대구모임에 같이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여정남(1945-1975)은 1964년 경북대에 입한한 후 경북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며 두 차례의 구속과 제적을 당했지만 여전히 대구지역 학생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여정남은 이 과정에서 이재문의 소개로 대구.경북지역의 선배운동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반독재민주화운동과 함께 사회변혁운동으로 자신의 운동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여정남은 하재완의 집 가정교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학생운동과 변혁운동간의 고리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확장시켜 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대말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박정희 독재는 더욱 더 극악스러운 행태를 보였고 이런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실종되고 민중의 생존권은 끝없는 위기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3선개헌, 위수령 발동과 대학휴업령,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이어진 정치적 독재는 학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의 불을 지폈고 개발독재와 외세의존적인 수탈경제로 핍박받던 민중들은 신진자동차 파업투쟁, 한진본사 점거 투쟁, 광주대단지 투쟁, 전태일 분신 등을 통하여 민중생존권 투쟁을 벌여 나가고 있었고 사법부에서 사법파동이 일어났으며 실미도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꾸준히 새로운 변혁운동의 전망을 모색하던 이들은 전위조직 건설을 통해 반독재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변혁운동을 해나가자는 논의를 모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9월, 종로 청진동의 청진여관에서 전국조직 건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은밀하게 운동의 전망을 지역별로 모색해 온 각 지역의 핵심활동가들이 모였습니다. 대구의 서도원, 부산의 이영석, 광주의 김세원, 서울의 우홍선과 이수병이 머리를 맞댔습니다. 이들은 표면적인 조직의 이름을경락연구회라고 짓고 그 모임의 설립취지로 민족건강과 보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민족전통의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이들은 이 모임이 실제 그 취지에 부합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침술, 지압술, 단약방 등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모습이었고 실제로 경락연구회는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기 위한 전국단위의 전위조직이었습니다. 경락연구회는 월 1회 모임을 가졌으며 이 모임에서 각 지역의 사업을 보고하고 토론하는 한편 전체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전략과 노선을 세워나갔습니다. 경락연구회는 각 지역별로 민자연(민족전통의학 자연건강연구회-민족자주통일운동연합)을 구성하여 지역의 활동가들을 규합하는 한편 대중조직과의 연계를 이룸으로써 전위조직과 대중운동의 결합을 꾸준히 모색해 나갔습니다.
서울지역 사업에서 학원, 문화사업을 맡았던 이수병은 삼락일어학원을 암장 동지들과 설립하고 이를 매개로 학생들을 조직화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학원에 다니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독서회를 조직하기도 했고 등산모임을 꾸리기도 하였습니다. 아울러 활동의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전위조직의 활동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경락연구회의 합법적인 사업체로서 지압시술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경락연구회는 이런 활동 등을 통하여 분출하는 전국적인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통일운동과 사회변혁운동으로 이어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경락연구회가 민청학련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조직적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접근을 모색하고 연대를 논의하던 수준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변혁운동의 장기적 전망을 갖고 만들어진 이 경락연구회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청학련을 용공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한 인혁당재건위의 실체였습니다.
인혁당재건위는 분명 실재하지 않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조직입니다. 북과 연결되어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하고 국가변란을 꾀한 공산혁명조직으로 조작된 조직입니다. 인혁당재건위가 북한과는 실제로도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는 것이 여러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당시 이수병을 비롯한 경락연구회의 주요 활동가들은 북한과의 연계가 실제로 이루어질 경우 과거 공안사건과 같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야기될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었고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조직에서 후퇴해야 한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혁당재건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 북과 연결된 공산혁명조직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반독재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변혁운동을 위한 전국적인 전위조직은 분명히 존재했음을 이제는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 엄혹한 시기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를 위험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분단조국의 통일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변혁운동의 길로 달려간 사람들이 있었음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분명하게 다시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드러내야 할 우리 변혁운동사의 소중한 한 장이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남은 이야기들.....
남은 이야기들을 몇 가지 하겠습니다. 가족들이 인혁당재건위 희생자들의 사형집행을 알게 된 것은 집행당일 아침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대법원재심이 끝나면 면회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을 믿고 구속 이후 1년 동안 면회 한번 하지 못한 인혁당재건위 희생자들을 면회하고자 구치소에 갔다가 사형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구치소의 공식통보가 아니라 누군가 라디오뉴스를 통해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청천벽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오열하며 통곡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장례를 위해 인도된 시신은 모두 고문흔적이 뚜렷했습니다. 고문흔적이 유난히 심했던 송상진과 여정남의 시신은 일단 인도되었다가 고문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중앙정보부가 이동 중에 응암동 사거리에서 시신을 탈취하여 벽제화장터에 강제로 화장하였습니다. 정부의 감시와 탄압으로 함께 장례행사도 치르지 못한 희생자들은 살아서 함께 했으나 죽어
사형집행 당일날, 서대문구치소 앞에서 오열하는 가족들
서 같이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인혁당희생자 중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등 네 사람은 경상북도 칠곡의 현대공원묘지에 함께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4월 9일이면 이곳에서 인혁당희생자 추모제가 열립니다.
경북 칠곡군 지천면 소재 현대공원에서는 매년 추모제가 열린다. 이 묘원에는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의 묘가 있다.
가족들의 삶은 이후 끝없는 감시와 통제 속에 살았습니다. 가족들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고 슬픔을 밖으로 드러내지도 못하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재완의 부인 이영교는 그 세월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쌀 씹는 것을 모래알 씹듯 살아왔습니다. 가난은 불현듯 찾아왔습니다. 행상과 외판원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두려울 만큼의 가난보다 고통스러운 건 주변의 냉대와 핍박이었습니다. 갑자기 친척 친지의 왕래가 뚝 끊겼고 마치 무인도에 내버려진 듯했습니다. 동네 아이들마저 일곱살짜리 아들의 목에 새끼줄을 묶고 “빨갱이 자식”이라며 총살 놀이를 할 정도로, 이웃들의 반응은 무서웠습니다. 공안기관의 감시도 삼엄했습니다. 집 주변에는 늘 낯선 사내들이 서성거렸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방한 등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땐 아예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월 23일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이 터졌을 때 가족들은 다시 공안당국에 끌려가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남민전기(南民戰旗, 일명 전선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민전기는 인혁당희생자 여덟 명의 속옷으로 만들어진 깃발이었습니다. 남민전은 인혁당재건위 희생자들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여덟 명의 속옷을 구하여 물감을 들이고 그것을 재봉질하여 만들었습니다. 혁명, 통일, 평화를 상징하는 남민전기가 수사과정에서 인혁당재건위 희생자들의 속옷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공안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가족들에게 또 한 차례 고통을 주었습니다. 남민전은 1차 인혁당 사건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인혁당재건위 사건에서 몸을 피한 채 수배 중인 상태에서 지하운동을 했던 이재문을 중심으로 신향식, 안재구, 최석진, 이해경, 박석률, 임동규 등이 남한을 신식민지로 규정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부 건설을 목표로 한 전위조직이었습니다. 남민전은 비공개 이념서클 및 조직에서 활동했던 진보적인 학생운동가들이 여려 형태로 사회로 이전하면서 기존의 지하 혁명세력과 연결되어 결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인혁당(이재문), 통혁당(신향식) 구성원들이 최고지도부를 구성하였다는 점과 그 조직 내에 4·19, 6·3, 민청학련으로 상징되는 학생운동 및 민주화투쟁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남민전은 60년대 이후 자생적으로 형성된 변혁운동세력의 전면적인 결합으로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남민전을 북한과 연계하여 국가변란을 꾀한 공산혁명조직으로 규정하고 이재문, 신형식에게는 사형, 나머지 71명에게는 최고 무기징역을 선고하였습니다. 김남주, 홍세화, 이학영, 이재오, 임헌영, 권오헌, 이수일 등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도 모두 남민전과 관련되어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노무현정부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6년 2월 남민전 관련자 29명을 유신체제에 저항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습니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한 공식적인 대책위가 꾸려진 것은 1998년 1월 9일,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공동대표 이돈명 등)가 결성되면서부터입니다. 이어 2000년 7월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인혁당과 관련된 공식적인 조사는 이 위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는 옥중에서 사망한 장석구의 사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2002년 12월 10일, 위원회는 장석구의 사망이 인혁당을 조작하기 위해 벌인 고문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 직후 가족들은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변호사 김형태 등)을 서울지법에 신청했고 서울지법은 2003년 11월에 재심개시여부 결정을 위한 심리를 시작했습니다. 이어 2005년 2월에는 국가정보원이 대표적인 인권침해와 공작수사 사건으로 인혁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에 나설 것임을 발표하고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를 출범시켰습니다. 이 위원회는 같은 해 12월에 인혁당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이런 결정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2005년 12월 27일 서울중앙지법은 최종적으로 재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한 언론사는 그날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에는 한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어도 한기가 몰려오는 그곳. 8명의 '빨갱이 사형수' 유가족들이 흰 국화꽃 한 송이씩을 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칠십 세를 훌쩍 넘긴 노인들의 얼굴을 적신 눈물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 "천벌을 받을 놈들, 나쁜 놈들…" 30년 동안 흘렸던 눈물은 여전히 마르지 않았다. 30년 전 남편 송상진씨를 이곳에서 떠나보낸 김진생(77)씨는 "이제야 마음놓고 울 수 있게 됐다, 억울하고 슬퍼도 제대로 울지 못했던 세월... 사람의 삶이 아니었다"며 흐느꼈다.......... 27일 오후 서울 서대문형무소 한켠에 자리한 사형장 앞은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당한 사형수 8명의 유가족들이 쏟아내는 통곡과 오열로 뒤덮였다. 이날 오전 법원은 지난 2002년 유가족들이 제출한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1975년 4월 9일 사법부가 스스로의 손으로 저지른 '사법살인'의 원죄를 씻는 길을 연 셈이다.”
- <오마이 뉴스> 2005년 12월 28일
2006년 3월 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 주관으로 시작된 재심(재판장 문용선)은 16차례의 심리를 거친 후 2007년 1월 23일 최종판결을 내렸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75년 사건 당시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 헌신적으로 유가족들의 뒷바라지를 했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 이철, 유인태 등이 재판정에 함께 했습니다. 재판부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재판부는 무죄판결의 이유에 대해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에 대해서는 경찰과 검찰의 증거자료가 고문에 의한 조작이므로 증거로 채택할 수 없으며 공판조서 또한 피의자들의 진술이 엇갈릴 뿐만 아니라 항소이유서 등에서 1.2심의 공판조서를 전면 부인하였으므로 증거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결하였습니다. 중앙정보부와 법원이 이들을 사형시키는데 결정적인 증거로 들이밀었던 북한방송 청취와 녹취록도 단순히 방송을 청취한 것만으로 반공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에 대해서는 이미 유신헌법이 폐지되었으므로 면소된 것으로 판결하였습니다.
무죄가 선고되자 박수와 환호가 터졌습니다. 그러나 이내 법정은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32년, 그 긴 세월, 슬픔과 분노마저 드러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았던 세월, 어떻게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진실규명을 위해 싸워 왔던 세월의 무게가 한꺼번에 가족들의 어깨위로 쏟아지며 북받치는 설움이 터졌습니다. 함께 아픔을 나누었던 사람들의 가슴은 터질 듯 차오르는 기쁨과 아프도록 시린 슬픔이 교차했습니다. 인혁당사건진상규명대책위원회는 이날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번 판결은 32년간을 피눈물로 살아온 유족들의 끈질긴 싸움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이다. 하지만 형장에서 8명이 삼켰을 마지막 신음소리가 아직도 천둥같이 귓가에 울린다........ 국가는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고 이들을 위한 법적ㆍ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 글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일부러라도 가능하다면 사람들의 이름을 빼먹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독재권력에 빌붙어 영화를 누리며,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민중을 배신하며 살아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면서 자기 삶에 대하여 자랑하거나 변명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하여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이 오히려 역사를 왜곡합니다. 분단과 외세라는 천형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 시대의 비극을 그들은 희화화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무어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박근혜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번 총선이 진행되던 3월 13일, 부산에서 열린 9개 지역민방토론회에서 박근혜는 “산업화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 저는 항상 마음으로부터 죄송한 마음을 가져왔다”라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이는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유신체제 시절의 인권유린에 대해 박근혜가 사과한 일이 없다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독재와 인권유린에 산업화를 끌어들이며 우회적으로 피해간 답변에 불과했습니다. 산업화를 내세우며 독재를 합리화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그동안의 긍정적 평가에서 한 걸음도 진전되지 않은 변명이었습니다. 인혁당재건위 희생자들이 산업화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대목입니다.
박근혜는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해 왔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2007년의 재심판결에 대하여 박근혜는 최소한의 사과도 표명하지 않고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판사명단 공개가 공론화되자 박근혜는 적반하장으로 이를 자신에 대한 정치공세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박근혜는 같은 해 진행된 대선후보 한나라당 내부경선과정에서 “제가 진심으로 사과드리는 것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다. 또 한 부류의 세력인 친북의 탈을 쓰고 나라의 전복을 기도한 사람들이 있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를 혼동하면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라는 입장을 밝히면서 인혁당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사법기관이 명백히 민주화운동으로, 그리고 헌법을 유린한 초헌법의 폭거로 규정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서, 사법사상 최악의 살인이라고 모두가 평가하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 박근혜의 역사인식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독재자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
없습니다. 박근혜는 이보다 전인 2005년 12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됐다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의 발표에 “한마디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모함”이라고 일축한 바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인권을 유린한 유신시대에 대한 변호이자 역사의 왜곡입니다.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이 역사의 시계를 돌리려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민복기(1913-2007)는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앞장선 친일파 민병석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시대 판사로 재직하며 친일부역을 했던 사람입니다. 1차 인혁당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고 1968년부터 1978년까지 10년간 대법원장을 지냈습니다. 1974년 대법원장으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재심 재판장으로서 사법살인을 저지른 민복기는 이후에도 국토동일원 고문, 국정자문위원 등을 거치며 부귀을 누렸고 2000년에는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민복기와 함께 사법살인을 저지른 대법원 판사,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 한환진, 임항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유일하게 소수 의견을 제출했음)는 단 한번도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고 모두 한결같이 이후 권력의 주변에서 영화를 누렸습니다.
군법무관(육군 소령)으로 5.16군사쿠데타에 참여한 신직수(1997-2001)는 부산일보 강제탈취를 위해 부산일보 사주 김지태로 하여금 교도소에서 포기각서에 강제날인을 시킨 장본인입니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에는 검찰총장으로 인혁당 사건 조작의 중심에 있었고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법무부장관으로 유신에 저항하는 학생들과 민주화인사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진두지휘했고 이어 인혁당재건위 사건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온갖 고문을 통해 조작을 총지휘한 사람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변호사 생활을 하며 안락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중앙정보부 6국장으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수사 총책임을 맡았던 이용택(1930- )은 중앙정보부를 나온 후 정치인으로 변신, 1981년과 1985년 연달아 경북 달성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1997년에는 다시 변신을 시도하여 국민회의에 입당, 김대중 총재특보를 지냈습니다. 이어 그 공로로 경북관광개발공사 사장을 지냈으며 그 후에는 보수우익단체의 좌장노릇을 하다가 올해 이철승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회장을 맡는 등 평생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다른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 엄혹한 시대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함을 가르쳐준 사람들이었고 이 시대의 등불이 되고자 아낌없이 자신을 불사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역사 속에서 이름도 명예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함께 기억하고 살려내고 싶었습니다. 그 형극의 시대를 간난과 신고 속에 건너 온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그때의 그 삶과 그 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갈매나무와 같이 굳고 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엄혹한 시절의 투쟁을 뒤로 하고, 힘주어 팔뚝질하던 손을 뒤로 감추고, 그때 분명히 들었을 민중의 소리를 외면하고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틈만 나면 ‘나도 한때’를 입에 달고 마치 치기와 어리석음을 이제는 극복한 양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함께 했던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리면서 부귀와 영화에 굴복한 사람들입니다. 현실을 이야기하고 전술적인 우회도 이야기하면서 애써 포장하지만 돌아 온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후 일생을 통일과 변혁에 자신의 삶을 바치며 15년간을 지하운동으로 살아 간 이재문(1933-1981)은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후 수감생활을 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81년 서대문구치소에서 옥사했습니다. 김남주(1946-1994)는 1969년 전남대에 입학한 이후 학생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전남대 함성지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197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이후 시작활동을 하면서 농민운동에 몸을 담았습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88년 12월 21일 형 집행정지로 9년 8개월만에 출소하였습니다. 이후 광주.전남지역의 지역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인으로서 자신이 못다 한 혁명의 꿈을 그려갔습니다.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고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재문을 그리며 쓴 시로 알려진 시 <전사 1>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분 일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몸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은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신분을 잊은 적이 없었다.
- <전사 1>, 김남주
윤한봉(1947-2007)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1975년 특사로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80년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수배 중이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민족학교와재미한인청년연합 등을 통해 청년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다가 93년 귀국하였습니다. 이후 지역의 민중운동과 5.18 정신계승 사업에 헌신하다가 2007년 폐기종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정윤광(1947- )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75년 석방된 후 그 세대의 다른 활동가들과 다르게 일찍부터 노동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동료와 선후배들이 모두 한때의 학생운동을 훈장처럼 달고 정치권을 기웃거릴 때 편한 길을 마다하고 평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권오헌(1936- )은 올해 76세이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삶과 운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그리고 지금은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장으로 아직도 꺾이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집회, 어떤 투쟁의 현장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빨치산 소년돌격대 출신인 박현채(1934-1995)는 64년 1차 인혁당 사건을 거친 후 경제학자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민족경제론>은 민족적인 관점에서 한국경제를 조망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남민전의 홍세화(진보신당 대표), 이수일(전 전교조 위원장)은 지금도 함께 했던 동지들을 기억하며 변혁운동의 길에 비켜 서있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외 전재권, 임구호, 황현승, 김세원, 김한덕 등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입니다.
류근일(1938- ), 1958년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중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조국을 갈구한다’라는 글로 처음 구속되었고 4.19혁명의 중심에서 민통전학련 대의원회 의장직을 수행하며 통일운동에 헌신하다가 5.16 군사쿠데타로 7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1968년 출옥 후에는 중앙일보 기자로 언론에 몸담은 상태에서 유신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었던 류근일, 그러나 그는 이후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1981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하면서부터 그는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과 쌍두마차를 이루는 대표적인 보수 우익의 논객으로서 8-90년대 터져 나온 민족민주운동에 대하여 시종 비판적이고 악의적인 글을 발표하며 자신의 과거의 삶과 운동과 단절했습니다. 1995년에는 삼성언론재단의 이사가 되었고 2000년대 들어 뉴라이트 운동의 중심적인 논객으로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재오(1945- )는 한때 민족민주운동의 대표적인 이름이었습니다. 1963년 중앙대에 입학한 후 이듬해 6.3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제적당한 이후 줄곧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몸담으며 모든 열정을 바쳤습니다. 그는 1964년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치며 30년간 5차례 감옥을 들락거렸습니다. 1970년대 초반 재야의 원로인 함석헌, 계훈제, 김수한 등을 도와 민수협 결성에 앞장서는 한편 백기완을 이어 민수청의 2대회장으로서 유신반대투쟁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후 민통련 민족통일 위원장, 6월 항쟁 국민운동본부 상임 집행위원을 거쳐 1989년에는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직을 수행했으며, 1990년에는 민중당을 창당하고 당의 사무총장을 맡는 등 1990년대 초반까지 민족민주운동의 중심으로서 활동하였습니다. 이재오는 1993년 김영삼의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줄곧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편에 선 정치인으로서 살아왔으며 종국에는 이명박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되어 오늘도 권력의 주변에 맴돌고 있습니다.
민통전학련 위원장이었던 윤식은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박정희에게 투항했고, 한일회담 반대시위의 중심에 있었고 후에 민비연 사건으로 고초를 당했던 현승일은 한나라당 의원을 거쳐 지금은 청와대에 의해 세종대 총장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가 있습니다. 민통전학련 공보부장을 맡았던 이영일은 11대, 12대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변절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이후 15대 국회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로 변신하여 다시 국회의원을 해먹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한중문화협회 회장으로 변절한 삶의 말년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고행.....1974>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조작사실을 알렸던 김지하(1941- )는 27일 만에 다시 구속되었다가 1980년까지 5년 넘게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수감 중에도 시작활동을 통한 저항운동을 계속한 김지하는 출옥 후 본격적으로 시를 통한 저항운동을 하다가 1990년대 이후 생명운동으로 나아갔습니다. 김지하는 1991년 4월 강경대의 사망으로 시작된 5월의 분신정국에서 5월 5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라는 글을 게재하고 운동권에 모멸적인 성찰을 강요하며, 힘들게 싸우던 모든 사람에게 충격을 던진 이후 사실상 현실운동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김지하는 시작활동과 생명운동에 전념하였습니다. 이수병과 함께 부산지역에서 암장을 같이 했고 이후 4.19 혁명과 민민청 활동을 같이 했던 김금수(1937- )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고초를 당한 후 잠시 언론계에 몸담기도 하였으나 1960년대 후반 광산 노동자 생활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습니다. 한국노총에서 활동하다가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시작과 함께 초기 민주노조운동의 강화에 많은 열정을 바쳤습니다. 이후 노무현 정권에서 KBS 이사장,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민주노조운동 진영에 적지 않은 아쉬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노동사회연구소의 이사장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민청학련의 이철, 유인태는 야당 국회의원으로, 인혁당재건위 사건에서 15년을 선고받았고 이후 전국연합 의장을 맡았던 이창복 역시 야당 국회의원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러한 변신이 자신들이 살아왔던 삶과 궤적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화된 현실을 이야기하고 운동의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아직도 분단조국의 통일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나 민중의 생존을 위해 낮은 곳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만큼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이런 저런 언술을 동원하며 이들이 갔던 길을 똑같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고 난 후 묘비가 어지럽지 않은 삶이 되기를 오늘 또 다시 다짐해 봅니다.
책! 책! 책!
<해방후 한국학생운동사> 이재오, 형성사, 1984
1979년 송곡여고 교사로 재직 중 이재오는 현직 중고교 교사들로 조직된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를 남민전의 산하조직으로 조작한 중앙정보부에 의해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5년으로 감형되어 1984년 출소했습니다. 이 책은 출소 후 출간된 책입니다. 일제하의 1940년대 학생운동에서 80년 광주항쟁 이전까지의 학생운동사를 기술한 책입니다. 80년대 이후 학생운동사와 관련된 책이 비교적 많은 반면 그 이전의 학생운동사를 정리한 책은 별로 없는 편입니다. 이 책은 비교적 세세하게 1980년대 이전의 학생운동사를 기술하고 있어 학생운동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책입니다. 동시에 정치,경제,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도 빼어 놓지 않고 있고 그 관점도 변혁운동의 관점을 놓지 않고 있어 읽어 볼만한 책입니다.
<1970년대 민중운동 연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도서출판 선인, 2005
1970년대의 민중운동은 매우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 운동이었습니다. 변혁적이고 계급적인 관점이 관통한 운동으로 규정하기도,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전면화한 운동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지점이 있습니다. 억압과 통제의 시대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 투쟁이 반체제 운동이 되기도 하고 계급운동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런 점을 충분하게 확인하면서 70년대 운동에 대한 포괄적인 평가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70년대의 노동운동, 여성운동, 종교계가 결합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 농민운동, 지식인 운동 등을 조목조목 거론하면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고 평가해 놓은 책입니다. 1970년대 운동을 전반적으로 일별하는데 좋은 책입니다.
<이수병 평전>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2005
<저항의 삶-내가 살아온 역사> 정윤광, 백산서당, 2005
<암장> 지리산, 1992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의 세세한 이야기들,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과 그 속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읽을 만한 책입니다. 전문적인 역사서가 아니므로 실제 이 사건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책이며 동시에 많은 감동을 주면서 자신의 운동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푸른 혼> 김원일, 이룸, 2005
소설가 김원일이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입니다. 8명의 희생자 하나하나의 삶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연결하여 쓴 연작소설입니다. 소설을 통해 희생자 8명의 삶을 숙연한 마음으로 접할 수 있음은 물론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아픔 또한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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