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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모음]양경규의 "오늘"

혁명의 시작, 프랑스 인권선언

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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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혁명의 시작, 프랑스 인권선언



  

 

혁명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변화의 특별한 형태’라고 쉬더(Thedore Schiedr)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특별한 형태를 페터 벤데(Peter Wende)라는 사람은 과거와의 극단적인 단절, 혁명적 열광, 혁명영웅들, 대중의 참여, 정치질서의 전복, 사회체제의 급격한 변화, 유혈을 동반한 내전과 봉기라고 부연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왠지 이런 외형상의 특별한 변화 현상만으로 혁명을 규정하는 것은 부족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를 뒤적여 보았더니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로 스탈린주의와 파시즘 등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로 유명함. 아이히만 재판과 관련하여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함으로써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음)가 규정한 혁명에 대한 정의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정이 강렬할 뿐만 아니라 자유에 대한 비젼과 결합된 경우만을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교체나 변혁을 혁명으로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 가지로 폭력도 혁명을 기술하는데 충분치 못하다. 교체를 통해서 새로운 시작이 가시화되는 경우, 새로운 국가형태를 구성하고 새로운 정치주체에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폭력이 사용되는 경우, 억압세력에 대한 해방투쟁이 자유의 확립이라는 의도를 가진 경우만이 본질적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 <혁명에 대하여> 한나 아렌트, 1963 - <혁명의 역사> 페터 벤데, 시아출 판사, 2004에서 재인용

 

글을 시작하면서 너무 딱딱한 말들을 늘어놓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한 시기의 순간적인 사건이 아닌 프랑스 혁명은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사건입니다. 프랑스 혁명을 규정하는 시기도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1789년의 바스티유 요새의 파괴와 국민의회의 성립, 그리고 인권선언으로 시작되어 1799년, 나폴레옹이 혁명의 종결을 선언하고 통령으로 권력을 잡기까지의 10년의 기간을 프랑스 혁명으로 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이후에 진행된 일련의 역사적 과정과 1830년의 7월 혁명, 1848년의 2월 혁명까지도 하나의 혁명적 과정이라고 보고 이를 프랑스 혁명에 포함시켜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1871년의 파리꼬뮌도 그 연장선에서 보는가 하면 심지어는 1960년대의 68혁명까지도 프랑스 혁명의 한 과정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프랑스 혁명을 읽는 것이 간단치 않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긴 시간에 걸친 혁명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프랑스 혁명이 위에 언급한 혁명의 정의에 부합하는 전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혁명의 주체들이 끝없이 교체하며 새로운 가치와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혁명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흔히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의 시민혁명, 부르주아 혁명의 상징으로 이해되지만 사실은 그 보다는 훨씬 더 넓은 의미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가치가 끊임없이 확장되고 민중이 참여하는 대중혁명의 모습을 띠었으며 민중주체의 사회변혁의 이상이 시험대에 올랐던, 그 시기의 여느 혁명과 전혀 다른 진행을 보였던, 그리고 그 이념적 폭이 한없이 넓었던 혁명이었습니다. 이런 측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또 자유주의자에게도 사회주의자에게도 각기 다른 의미들을 부여해왔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언제나 자기 나름대로 재단하기에 충분할 만큼 다양한 의미를 갖는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프랑스 혁명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혁명의 주체들이 프랑스 사회에 대한 새로운 내일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방을 선언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단순히 과거와의 특별한 단절이 아닌, 과거체제와의 일시적인 전복이 아닌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확인시킨 선언이었습니다. 오늘 1789년 8월 26일,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구체제(앙샹 레짐)를 종식시키고 인간해방에 대한 새로운 선언이 되었던 프랑스 인권선언을 시작으로 프랑스 혁명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은 과거와의 극단적인 단절, 대중의 참여, 정치질서의 전복, 사회체제의 급격한 변화, 유혈을 동반한 내전과 봉기로 규정되는 혁명의 외형의 과정 속에서 나왔습니다. 그 뿐 아니라 억압에서 자유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나가는 새로운 시작을 열어 젖힌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요새의 함락이 역사의 특별한 단절을 이룬 사건이었다면 8월 26일의 프랑스 인권선언은 바로 혁명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 미라보, 라파예트, 마라, 당통, 까미유 데물렝,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바뵈프, 그리고 나폴레옹으로 이어지는 숱한 혁명가들이 명멸하고 푀양파, 지롱드파, 자코뱅파(산악파), 평원파 등의 각종의 혁명세력이 새로운 세계의 이상을 놓고 다투었던 혁명, 수많은 민중들의 피가 빵과 토지를 붉게 물들였던 혁명, 인간의 기본권, 자유, 평등, 국민, 국민국가, 헌법에 의한 입헌주의, 정교분리, 의무교육, 선거제도, 지방자치행정, 종교의 자유, 민주주의 등 과거 역사를 단절시키고 세계사에 새로운 근대성을 부여했던 혁명, 그러나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보통선거제도, 민중운동, 혁명정부, 노동권, 행복추구권, 직접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 평등주의, 사적소유의 폐기, 사회주의 등 인류의 미래에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고 그 현대적 의미가 아직도 살아있는 혁명, 바로 그 프랑스 혁명, 그 이야기를, 오늘 혁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인권선언이 발표된 날, 하려고 합니다.

 

절대군주로서 태양왕으로 불렸던 루이 14세 이후 프랑스는 이웃나라 영국이 1688년 명예혁명으로 상원과 하원을 갖춘 의회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입헌군주제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왕정체제를 견고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부르봉왕조의 계승자 루이 16세가 즉위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이 되던 1774년이었습니다. 루이 16세가 즉위하던 당시의 프랑스는 오랜 기간 강력한 절대군주체제를 유지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중세의 봉건제, 즉 영주와 농노를 근간으로 하는 농노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있었습니다. 지주의 권리와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까지 가지며 사실상 작은 왕국을 갖고 있었던 영주들은 이제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받는 소작료, 즉 봉건지대를 받는 지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귀족신분으로서 다른 생업을 가질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토지는 상속되면서 형제간에 분할되었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며 지방의 영주들은 점차 빈곤한 귀족이 되어 갔습니다.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 아니 노동은 귀족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므로, 영주들은 점차 농민들을 더 쥐어 짤 방안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지대에 대한 보다 경직되고 가혹한 징수가 이어졌고 공유지를 사적인 소유로 무단히 점유하고 재산권을 주장하며 이를 통해 봉건지대의 수입을 늘리는 편법이 횡행했습니다. 절대왕정은 이런 귀족들의 특권을 비호했고 민중의 삶은 점점 어려워져만 갔습니다.

 

농민들은 농촌귀족의 이런 수탈에 의해 극빈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공유지가 귀족들의 소유물이 되면서 자신들의 가축이 풀을 뜯어 먹을 수조차 없어서 농민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습니다. 귀족들의 방토권(放兎權 : 사냥을 위해 토끼를 방목하는 권한)과 수렵권(귀족에게만 허용된 사냥할 수 있는 권리)은 농민들의 농토를 망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빈곤한 농민들에게는 이삭줍기 권리의 금지도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루이 16세 즉위 이후 빈번하게 찾아 온 재해는 이런 상황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반면 중앙의 귀족들은 광대한 영지에서 나오는 지대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직책에 지급되는 봉급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정부예산의 상당한 부분이 이처럼 왕실 가문과 중앙귀족들에게 사용됨으로써 정부는 심각한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지만 왕실과 왕실을 둘러 싼 귀족들은 금은복식으로, 사냥으로, 연회로, 그리고 각종의 사치스러운 일탈행위로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일부 왕족과 대귀족들은 파산상태에 이르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왕실은 이들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악화되는 정부의 재정난은 곧 바로 농민들과 부르주아 계급의 세금부담으로 이전되곤 했습니다. 농민들과 부르주아 계급이 각종의 세목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였던 데 반하여 대부분의 귀족과 교회는 증세에서 제외되거나 아예 세금자체가 부과되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은 이로 인해 비참한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렸고 부르주아 계급 또한 불만이 쌓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귀족들의 이러한 사치스러움과 호화로운 유한생활은 일부 귀족들에게 새로운 사상에 물들게 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쾌락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간에 대한 가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이상 등을 꿈꾸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보면서 자신들도 단순한 귀족의 신분을 넘어서서 무언가 새로운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여했다가 그 경험을 통해 공화제와 자유라는 새로운 체제와 사상에 흠뻑 물들기도 하였습니다.

 

절대군주체제는 새로운 계급들을 등장시켰습니다. 그 하나는 관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왕실귀족이나 대귀족은 아니었으나 절대군주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관료기구, 즉 행정직이나 사법직을 맡아온 관료귀족들이었습니다. 특히 사법귀족들은 재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를 축적하기도 하여 대귀족에 버금가는 지위로 상승했습니다. 특히 사법귀족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사법상의 권한, 즉 왕의 법, 칙령 또는 포고령이나 외교상의 조약은 사법부에 등재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통해 자신들을 새로운 특권계급 중의 하나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왕의 행정을 감시하거나 혹은 왕에게 아부하고, 또 대귀족들에 대한 소환명령 등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는가 하면 새로운 과세에 대한 등재거부 등을 통해 민중의 환심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사법귀족은 이런 자신들의 조건을 통해 때로는 왕과 정부와 대립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민중들에게 군림하며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절대군주체제에서 등장한 가장 주목할 만한 새로운 계급은 부르주아 계급, 즉 시민계급이었습니다. 루이 16세 치하의 프랑스는 아직 영국과 같은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단계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상업과 견직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이 점차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식민지의 산물, 특히 산토 도밍고(도미니카)의 설탕을 통해 세계 설탕소비의 반에 해당하는 무역량을 기록하고 있었고 포도주와 직물까지 합하면 영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무역국가였습니다. 이러한 상공업의 발전을 통해 프랑스의 상공업자들은 새로운 계급으로 발돋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프랑스에서 귀족들에 못지 않은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학문적 소양이나 문화와 예술에 대한 향유도 귀족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회의 신분제도로 인해 자신들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는 성직자와 귀족계급에게 신분상의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노동계급은 그 맹아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단계가 아닌 소규모 수공업과 농업 중심의 프랑스에서 아직 구체적으로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농촌을 전전하는 날품팔이 노동자이거나 아니면 농업수확의 부족함을 공장노동으로 보충하는, 아직은 농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전히 프랑스의 하층계급의 주력은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농노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농노와 다름없는, 소작으로 연명하며 봉건제의 족쇄아래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현실과 제도의 모순을 겪고 있었고 특권계급과 하층계급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계급의 고민과 모순을 또한 동시에 수렴할 수 있는 계급이었습니다. 비참한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의 빵을 걱정하는 하층계급의 불만을 안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부르주아 계급이었습니다. 몰락해 가는 자신들의 처지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이 중첩되면서 고민에 빠진 귀족들이 힘을 기댈 곳 또한 부르주아 계급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새로운 계급, 시민계급은 어느 사이 프랑스 사회의 가장 힘있는 계급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회는 절대군주의 권력이 점차 약해져 가고 있었고 이로 인해 절대군주를 중심으로 지탱되던 구체제는 하나씩 하나씩 그 모순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구체제에 발을 담그고 있는 특권계급에게 유일한 희망은 루이 16세였습니다. 구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고 프랑스를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군주체제에서 권력을 갖고 있었던 유일한 존재,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이런 위기를 극복할 만한 능력을 가진 왕이 아니었습니다. 1754년 8월 23일에 태어난 루이 16세는 루이 15세의 아들 루이가 1765년에 죽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1769년, 15세가 된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었던 14세의 마리 앙뜨와네트와 결혼하였습니다. 이로써 한때 오스트리아 계승을 놓고 겨루었던 유럽의 두 왕가인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가는 하나로 맺어져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루이 16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어떤 사가들은 루이 16세가 선대왕들에 비해 사치스럽지 않은 소탈한 왕이었으며 왕비 외에 정부를 두고 방탕한 생활을 하지도 않았던,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성실한 왕이었고 왕실의 재정난을 해결하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특권계급에게도 공평하게 세금을 부과하여 프랑스의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했던 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사치와 방종의 이름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마리 앙뜨와네트에 대해서도 낯선 프랑스 땅에서 보내는 생활을 달래고자 다소 사치를 부렸으나 나중에 근거 없는 입방아에 오를 정도로 터무니없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루이 16세의 초상, 작자 미상

새로운 사관을 정립했던 프랑스의 역사학자 알베르 마티에 같은 사람은 루이 16세에 대하여 아주 인색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행동거지에 품위가 없는 이 뚱뚱한 사나이는 식탁에 앉았을 때나 사냥할 때, 그리고 자물쇠제조 작업장에 앉아서 자신의 취미인 자물쇠를 만들 때만 행복을 느꼈다. 머리를 쓰는 일은 질색이었다. 그는 조정회의에서 잠을 자기 일쑤였다. 그는 경박하고 생각 없는 대신들의 조롱거리가 되곤 했다...... 마리 앙뜨와네트는 미인이었으나 경솔하고 바람둥이여서 무분별한 열정에 빠져 쾌락에 몸을 던졌다.”

<프랑스 혁명사 상> 알베르 마티에, 김종철 역, 창작과 비평사, 1982

 

그 평가가 어찌 되었든 루이 16세가 이 어지러운 상황을 돌파하고 프랑스 왕정의 안정을 꾀할 만한 능력을 가진 왕이 아니었음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루이 16세도 현재 프랑스에 계급간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으며 특히 하층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 재정의 안정이 급선무라고 하는 것도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루이 16세가 선대왕인 루이 15세로부터 물려받은 국가의 빚은 15억 리브르(무게 5g 미만의 은에 상당하는 주화로 지금의 프랑(franc)보다 가치가 약간 떨어지는 화폐임. 또 다른 화폐인 수(sou)는 1/25 리브르였고 드니에(denier)는 1/250 리브르의 가치를 갖는 화폐였음)였습니다. 루이 16세는 취임과 함께 튀르고, 네케르 등을 차례로 재무총감으로 임명하여 국가재정의 안정화를 추진하였으나 특권계급의 반발과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귀족들의 요구에 밀려 그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명령을 발령하기 일쑤였습니다.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누르고 그들에게서 보다 많은 세금을 얻어 내지 않는 한 사회개혁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구조적으로 그런 개혁조치를 밀고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1589년부터 1794년까지 프랑스를 지배한 프랑스의 왕가)는 봉건귀족들의 정치권력을 박탈하고 절대왕정체제를 수립하면서 그 보상으로 귀족들에게 사회적, 경제적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의 절대왕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귀족과의 밀착이 불가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개혁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에 대한 특권박탈은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정부수반인 왕의 단호한 의지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조건 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프랑스 정부의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위기를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수렁으로 밀어 넣은 것은 미국의 독립전쟁이었습니다. 루이 16세는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인 영국의 식민지 미국을 지원하기 위한 참전을 결정하였습니다. 오랜 숙적인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독립전쟁의 참전비용으로 무려 20억 리브르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늘어나는 정부 빚으로 민중들과 부르주아들의 세금부담은 늘어났으나 왕실의 사치와 향락은 여전히 줄지 않았고 과세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층은 아무런 책임도 갖지 않았습니다.

 

네케르의 뒤를 이어 재무총감이 된 깔로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의 빚은 혁명이 일어나기 전 해인 1878년에는 무려 45리브르에 달했습니다. 루이 16세는 깔로느가 제안한 특단의 조치를 승인하였습니다. 깔로느는 민중들에 대한 세금을 경감하고 성직자와 귀족들에게도 공평하게 과세하는 개혁조치들을 입안하여 이를 명사회(名士會 : 고위 성직자, 대귀족, 소수의 부르주아 대표들로 구성된 왕정시대의 의회로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독립적인 의회라기 보다는 왕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기구였음. 그 임명권도 왕이 갖고 있었음)를 통해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명사회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왕의 의사를 거역한 적이 없었기에 루이 16세는 이 조치의 통과를 낙관하였습니다.

 

그러나 1787년 2월에 소집된 명사회는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명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직자와 귀족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은 재정문제는 중대사안이므로 전국삼신분대표자회의(삼부회)를 소집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또한 이들은 정부가 백성들의 대표인 의회(명사회)를 들러리로 세우며 전제정치를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보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부가 운영되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계몽사상의 영향과 미국의 독립전쟁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경험한 일부의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미국식의 의회제도나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통해 프랑스 사회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이와 같은 주장의 이면에는 특권계급에 대한 과세를 거부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기묘하게도 공평과세를 거부하는 다수의 특권계급의 의도와 일부 귀족과 부르주아계급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들은 동상이몽의 구조 속에서 소위 입헌파, 삼두파, 민주파 등(통칭해서 흔히 애국파로 불리기도 함)으로 불리며 회의장 왼쪽에 자리하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회의장 오른쪽에는 왕정의 안정을 통해 절대군주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세력인 왕당파가 자리하였습니다. 이들은 좌파들이 특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국민 대다수를 위한 개혁을 방해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왕정 대신 자기들의 이해를 위해 귀족 중심의 정치체제를 획책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집권세력을 지지하는 우파와 이에 반대하는 좌파라는 이름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명사회의 대다수는 특권층에 대한 공평과세를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내심으로 뜻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로써 명사회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깔로느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명사회 다수가 깔로느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해임을 요구하였습니다. 깔로느는 개혁조치의 필요성을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명사회를 압박하려 하였으나 개혁에 대한 대중적 여론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대체적으로 개혁안에 대하여 긍정적이었으나 힘을 모으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일반 민중들에게 명사회에서의 논쟁은 너무나 먼 이야기였습니다. 루이 16세는 명사회에 굴복하여 깔로느를 해임하고 1787년 여름에 브리에느를 재무총감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신임 재무총감 브리에느 또한 개혁 없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리에느는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서 취임하게 된 조건을 활용하여 우선적으로 명사회와 고등법원으로부터 귀족들의 종신연금 6,700만 리브르를 차입하는 결의를 받아내어 정부의 위급한 파산을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나아가 1792년에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약속하고 우선적으로 개신교도에 대한 공민권 부여와 특권계급에 대한 공평과세를 결의해 줄 것을 다시 명사회에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브리에느의 개혁정책 또한 명사회와 고등법원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브리에느는 이에 대한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그 어떤 정책도 구체적으로 집행되지 못했습니다. 고등법원의 사법귀족들은 정부의 어떤 포고령도 고등법윈에 등재되지 않으면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며 개신교도에 대한 공민권 부여와 새로운 과세정책의 시행이 부당하다는 입장을 거듭 주장하며 왕과 브리에느에 맞섰습니다. 루이 16세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사법귀족의 근거지였던 파리 고등법원을 추방하고 사법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이 또한 사법귀족들의 조직적인 반발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법귀족들의 이런 입장은 정부의 무단적인 정책시행에 반대하는 민주적인 저항으로 비추어 졌습니다.

 

전제정치에 반대하는 민주적 국정운영 요구에 기반한 성직자와 귀족, 사법귀족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의 기묘한 동맹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맹이 결과적으로 프랑스 왕정과 특권계급의 몰락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귀족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개혁의 거부는 혁명을 잉태한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와 주장이 자신들의 계급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혁명의 씨앗이 될 것임을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루이 16세가 보다 강력한 군주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거나 아니면 특권계급이 당시의 프랑스 정세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이해를 가지고 일정한 과세의 부담과 개혁조치를 수용했다면 프랑스는 영국의 명예혁명처럼 입헌군주제 수준에 머물면서 귀족계급의 특권을 유지해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명사회에서 개혁과 반개혁, 그리고 전제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이 1년여를 끌면서 진행되었습니다. 1788년 봄에서 여름, 프랑스의 정세는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정부재정의 고갈은 각종 연금생활자들에 대한 연금을 지급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정부는 국가부채와 이자에 대한 지불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가 정부에 대하여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발행된 온갖 국.공채에 대한 이자지급이 중단되자 부르주아 계급은 그동안의 관망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전제적인 왕정을 비판하던 애국파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리에느는 삼부회를 앞당겨 내년 1789년 5월에 소집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하였지만 이미 정국은 루이 16세의 후퇴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1788년 8월, 루이는 브리에느를 해임하고 네케르를 재등용하겠으며 사법개혁에 대한 조치를 철회하고, 삼부회를 예정대로 내년 5월에 소집하겠다며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루이 16세의 후퇴는 체제위기를 완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동안 내재되었던 갈등과 분노가 보다 확장되는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이미 때를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이 16세의 후퇴와 브리에느의 실각은 그동안 왕정의 무단전제에 대한 공동대응을 가능하게 했던 특권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분열로 나타났습니다. 귀족과 성직자 계급은 일부 과세에 대한 부담은 지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들의 이익이 보장되고 자신들의 참여가 관철되는 온건한 왕정체제로의 복귀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부르주아 계급과 일부 귀족계급의 정치와 사회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요구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단지 왕권을 제한하고 특권계급 중심의 정치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평등과 공평한 과세,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와 평등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부르주아 계급과 일부 귀족들의 이러한 요구들은 단순히 재정문제로 빚어진 갈등에 연유한 것으로 보기에는 뿌리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종교로부터 해방된 자유의지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가톨릭과 가톨릭에 토대를 둔 유럽의 구체제는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을 통해, 또 한편으로는 계몽사상이라 부르는 새로운 철학에 의해 그 자리를 내주고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라 불리는 신교의 등장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들었고 계몽사상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 그리고 자연권에 근거한, 인간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기본권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로크 등으로 대표되는 계몽사상가들은 이를 하나의 철학과 사상으로 정립해 나가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가치, 사회에 대한 새로운 체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인간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을 통해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의지를 갖고 있는데 이것이 일반의지이며 이 일반의지는 절대적인 것으로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가운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약속하고 만들어 진 것이 사회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루소는 모든 사회의 규범이나 법, 그리고 국가권력은 모두 인간의 일반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주권재민, 혹은 인민주권의 사상을 분명하게 제시하였습니다.


 

한 세기에 앞서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인간오성론>을 통해 자연은 인간에게 생존권, 자유권, 재산권을 부여했으며 이 권리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소유하고 향유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권재민(主權在民)과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여 대표제에 의한 민주주의, 입법권과 집행권의 분립, 이성적인 법에 따른 통치와 개인의 자유·인권 등을 강조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역설했습니다.

 

절대군주체제에서 이런 사상은 모두 불온시 되었고 이들이 펴낸 저서들은 모두 금서가 되었지만 때마침 성장하기 시작한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들은 이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유럽 각국은 이런 새로운 사조와 이 사조를 흠뻑 받아들인 부르주아 계급의 실천에 의하여 새로운 근대국가로서 발돋움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각국에서 벌어진 계급을 기반으로 한 구체제에 대한 저항과 평등권에 대한 요구, 그리고 일련의 혁명은 이런 사상적 기반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전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8세기 들어 이러한 흐름은 더욱 큰 물결로 퍼져 나갔습니다. 일부 지식층과 일부 부르주아 계급에 제한되었던 계몽사상은 어느 사이 민중들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고 귀족계급이나 성직자들도 이런 사상에 젖어 들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카페와 살롱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논쟁들이 교환되고 토론되었으며 수많은 팜플렛들이 발간되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왕정의 실정이나 재정문제, 혹은 민중의 비참한 생활이 아니라 이처럼 수세기에 걸쳐 축적되었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민중적 요구의 분출이 프랑스 혁명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1788년 하반기로 들어서며 특권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갈등은 확대되었습니다. 가장 첨예하게 대립된 문제는 삼부회와 관련된 논쟁이었습니다. 특권계급은 1614년에 열렸던 삼부회의 전례에 따라 신분별로 토론하고 결정해야 하며 어떤 사안이 결정되기 위해서는 3개의 신분이 모두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대해 제3신분인 부르주아 계급은 이와 같은 형식의 삼부회는 개혁의 실종으로 나타날 것이며 왕정체제의 공고화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에서 강력히 반대하였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합동회의에 참여해야 하며 그 결정방식도 신분별이 아닌 합동회의에서의 동등한 표결권의 행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울러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을 제외하면 인구의 96%가 제3신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대표의 수가 다른 신분과 같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위에 언급한 당대의 자유주의 사상과 결합되면서 정치체제에 대한 논쟁,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논쟁 등으로 확대되며 격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1788년부터 1789년까지 철학과 사상, 그리고 국가와 사회, 인간에 대한 백가쟁명의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사상가, 문필가, 법률가, 사제, 그리고 평범한 부르주아들까지 이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모든 민중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개혁방안과 새로운 이상을 밝힌 팜플렛과 새로 창간된 신문의 홍수 속에서 살았습니다. 수천 권의 정치 팜플렛이 발간되었습니다. 나중에 제헌의회 의장이 되는뚜레는 <선량한 노르망디인에게 호소함>을, 미라보는 <프로방스인에게 호소함>을, 까미유 데물렝은 <프랑스 인민의 철학>을, 로베스피에르는 <아라스인에게 호소함>을 발간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에예스는 당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팜플렛으로 기록되고 있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발간하였습니다. 시에예스는 이 팜플렛에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지금까지 정치질서에서 무엇이었던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엇을 요구하는가? 무엇인가가 되기를 원한다.”라는 글을 통하여 부르주아 계급, 즉 평민들이 시민권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확산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의 논쟁은 점차 도시와 지방의 하층계급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전국 각지의 부르주아 계급과 하층계급은 온갖 종류의 진정서와 호소문을 통해 각기 새로운 단결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서들은 전제정치에 대한 규탄, 성직자와 특권계급의 횡포에 대한 비판과 이들에 대한 권리 제한, 대다수 민중의 의사가 반영되는 의회제도의 시행, 공평과세와 민중의 자유와 평등권 보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1788년-1789년의 정치. 사회적 갈등은 때마침 찾아 온 경제.사회적인 위기와 맞물리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1788년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약 2,600만 정도였습니다. 농업생산량의 증가는 인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788년의 기록적인 흉작, 1788-89년 겨울의 혹한, 1786년에 맺은 영국과의 통상조약을 계기로 유입된 영국 공산품에 뒤처지는 공업경쟁력 상실 등이 겹치면서 프랑스는 빵 값 폭등, 기아, 실업률 증가, 사회불안 등 체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방 농민들의 폭동이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이러한 폭동은 프랑스 사회의 혼란을 심화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이 곧 프랑스를 혁명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피에르 각속트가 말했듯이 “빈곤은 폭동의 원인은 될 수 있으나 혁명의 원인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제적인 혼란이 이후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 된 것은 바로 위에 언급한 새로운 사상이 민중속에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존의 벼랑에 몰린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특권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1789년 5월로 예정된 삼부회 개최를 위한 준비는 속도를 내고 있었습니다. 각 지역별로 삼부회에 보낼 대표를 선출하는 대회가 1, 2, 3 신분별로 진행되었습니다. 삼부회의 성원은 1, 2 신분에서 각 300명 그리고 3신분에서 600명을 선출토록 하여 부르주아 계급의 의견이 일부 반영되었지만 삼부회 개최가 코앞에 닥쳐 올 때까지 삼부회의 운영 방식, 즉 신분별 회의로 할 것인지 아니면 합동회의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지방의 사제들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신분에서 선출되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제3신분 대회에 출마하여 대표로 선출되는 길을 찾았습니다. 귀족계급이었던 미라보나 성직자였던 씨에예스 같은 사람들은 제3신분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이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라파예트(제2신분), 로베스피에르, 베르트랑 바레르(이상 제3신분) 등도 각기 그들의 신분에서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들은 아직 제3신분의 대표가 될 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3신분의 대표는 법률가와 문필가, 상공업자 등 부르주아 계급들이 주로 선출되었습니다.

 

 



 

1789년 5월 5일, 전국삼신분대표자회의(삼부회)가 호화스러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1,200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회되었습니다. 175년만이었습니다. 호화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 자체로서 제3신분의 대표들에게 자신들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네케르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위화감과 궁정의 사치를 드러내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피하여 파리에서 삼부회를 열고자 하였으나 루이 16세는 ‘사냥 때문에’ 베르사이유 궁전을 고집했습니다. 제3신분의 대표들은 개회 첫날부터 자신들이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왕과 특권계급의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3신분의 대표들은 왕의 명령에 의해 까만 제복만을 입도록 강제되었습니다. 1.2신분의 대표단이 입고 있는 금실 레이스가 달린 복장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1614년처럼 왕의 개회연설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규칙은 간신히 모면했으나 1.2신분의 대표들이 회의장의 정면 출입구로 당당하게 입장할 수 있었던 반면에 3신분의 대표들에게는 회의장의 뒷문만이 허용되었습니다.

 

왕과 내각은 이 회의를 통해 프랑스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는 의사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개회식에서 왕과 내각은 정부의 재정악화를 해결할 과세문제에 대한 협조만을 당부했을 뿐 정치개혁에 대한 어떤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회의 운영방식에 대하여 왕은 신분별회의는 당연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다만 과세문제에 관한 한 필요하다면 전체회의도 가능하다는 수준이었습니다. 제3신분의 대표들은 매우 실망하고 분노하였습니다. 이들은 별도로 3신분 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하고 회의 진행방식으로 합동회의와 동등한 표결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전국삼신분대표자회의는 회의 개회와 함께 본 안건에 대한 토론은 시작도 못한 채 회의 방식을 둘러싼 지루한 논쟁만을 벌였습니다. 한 달여가 지내도록 회의는 끊임없이 공전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6월 12일, “때는 왔다. 닻줄을 잘라라!”라는 시에예스 연설을 시작으로 제3신분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제3신분의 대표들은 국민의 96%를 대표하는 자신들의 의회를 독자적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이 의회를 국민의회라 부르고 앞으로 국민의회에서 결의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왕의 거부권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아울러 만약 정부가 국민의회의 강제해산을 기도한다면 어떤 납세도 거부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제1신분인 성직자들도 회의를 열고 제3신분과 합류할 것을 결의하자 루이 16세는 즉각적으로 국민회의 결의의 무효를 선언하고 회의장의 폐쇄를 통해 성직자들의 참여를 봉쇄하였습니다. 6월 20일, 회의장이 폐쇄되자 국민의회의 의원들, 즉 제3신분의 대표들은 베르사이유 궁전내의 실내 뽀므 구장(실내 정구장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음. 흔히 역사교과서에서 이곳을 테니스 코트라고 명명함으로써 테니스 코트로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궁전에서 대신들이 즐기던 라케트로 공을 치는 경기, 즉 뽀므라는 경기의 실내 경기장임)으로 집결하였습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어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지 않는 한 결코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였습니다. 이른바 프랑스 혁명의 초기 전환점으로 기록되는 유명한 사건, 테니스코트의 선서였습니다.

 

 


6월 22일 왕이 참여하는 삼신분대표자회의를 앞두고 제1신분의 다수가 지난 결의에 따라 제3신분으로의 합류, 즉 국민의회 동참을 선언하였습니다. 일부의 귀족들도 뒤따랐습니다. 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회의장을 압박하면서 삼신분대표자회의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것은 매우 반동적인 연설이었습니다. 루이 16세는 신분별 회의를 여전히 강조했고 과세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면서도 재산권, 즉 귀족들의 사유재산과 봉건지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아직도 절대왕정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 몰락하는 왕국의 군주는 짐짓 위엄을 부리며 말을 이어 갔습니다.

 

“그대들이 짐을 버린다면, 짐은 혼자서 백성에게 행복을 베풀고, 짐 혼자만이 그들의 참된 대표라고 생각하겠노라....... 신사들이여, 그대들의 어떤 계획도, 어떤 조치도 짐의 승낙 없이는 효력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짐이 명령하노니 당장에 (국민의회를)해산하라. 그리고 각자는 신분별로 분리된 회의실에서 내일 아침 회의를 재개하라.”

 

귀족들과 일부 성직자들은 회의장을 떠났으나 제3신분은 꼼짝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내각의 관료들이 다시 한 번 왕명을 상기시켰지만 뽀므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바이이는 “여기 모인 국민은 왕명을 받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였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남아 있던 국민의회의 의원들은 다시 한 번 그 전의 테니스코트의 선서 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선언, 즉 국민의회의 의원의 권리는 어떤 경우에도 침해할 수 없으며 이 불가침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중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선언을 결의하였습니다. 명백한 항명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왕과 내각은 궁정 근위대를 동원하여 강제해산을 시도하였지만 국민의회에 결합한 라파예트를 비롯한 귀족계급이 검을 빼들고 막아섰습니다. 보고를 받은 루이 16세는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미 성직자와 귀족도 합류한 국민의회를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루이 16세는 시간을 갖고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왕은 군대를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각에 은밀히 내렸습니다.

 

삼신분대표자회의 이후 성직자와 귀족들의 다수가 3신분의 국민의회에 합류를 선언하였습니다. 7월 9일, 국민의회는 이름을 제헌국민의회(제헌의회)로 바꾸고 왕국의 헌법을 제정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대세는 기울고 있었습니다. 왕은 짐짓 후퇴를 가장했습니다. 성직자회의와 귀족회의 전체에 대하여 국민의회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루이 16세는 은밀히 동원한 병력을 파리와 베르사이유 궁전 주변에 집결시켰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대세가 다시 일순간에 넘어갈 것처럼 보였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 주변과 파리시내에는 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회의를 강제해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민중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파리시민들은 파리시청으로 모여 국민의회를 수호하기 위한 자발적인 사수대를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파리의 위병대와 베르사이유 궁전의 근위대까지도 국민의회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이들은 국민의회나 시민들을 상대로 한 어떤 공격의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이 동원한 군대가 파리와 베르사이유에 진주를 시작하면서 긴장은 최고조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7월 11일, 팽팽한 대치 정국에서 루이 16세는 그동안 제3신분과의 합의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주장해 온 네케르를 전격적으로 해임하고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인사를 중심으로 한 내각을 발표하였습니다. 군중들은 항의에 나섰고 마침내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왕이 동원한 군대가 시위 군중들을 상대로 한 공격에 나선 것입니다.

 

7월 12일, 파리시민들은 팔레 루아얄 광장의 드 푸아 카페 앞으로 집결했습니다. 후에 로베스피에르, 당통과 함께 국민공회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 되는 까미유 데물렝(Camille Desmoulins, 1760-1794, 국민공회의원, 온건공화주의자로 공포정치기간에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당통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당함)은 몰려 든 시민들을 상대로 모자에 청색 리본을 매고 무기를 들 것을 선동합니다. 시민들은 상이군인회관을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했습니다. 파리의 민중들은 국민의회를 수호하기 위한 군대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프랑스의 미래를 두고 한 판의 대결이 임박하고 있었습니다.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성으로 몰려갔습니다. 바스티유 성은 정치범들이 수감된 감옥이자 파리시내를 지키는 군대의 요새이고 절대왕정의 상징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시민군에게 무기를 양도하고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스티유 요새의 군대는 백기를 든 시민군을 상대로 일제 사격을 가해 왔습니다. 1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마침내 요새는 함락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요새 사령관 드 로네와 파리시장 플레셀을 체포하여 죽인 후 창 끝에 매단 채 파리시내를 행진했습니다. 이어 시민들은 왕의 군대를 지원하고 있던 추밀원의 고문관플롱과 그의 사위 베르티에도 마찬가지로 교수형에 처한 후 효수하였습니다. 후에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가장 급진적인 요구, 즉 사적소유의 폐기를 걸고 소위 평등주의자의 음모라는 사건의 중심이 되었던 그락쿠스 바뵈프(Gracchus Babeuf, 1760-1797, 원래 이름은 프랑소아 노엘 바뵈프, 로마의 개혁가 그라쿠스 형제의 이름을 따서 개명함, 평등주의자의 음모 사건으로 단두대에서 처형, 그의 혁명적 이상을 기리는 의미에서 프랑스 혁명 100주년이 되는 1889년 7월 14일 파리에서 창립된 제 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장의 단상 플래카드에 그의 이름이 올랐음. - 오늘 열 번째 인터내셔녈 깃발 아래 전진 또 전진 참조), 그러나 아직은 혁명의 구경꾼이었던 그는 파리방문 중 이 광경을 목도하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느낌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20만 명의 구경꾼들이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무장 시민들에게 환호를 보내며 효수된 그들에게 야유했다. 오! 이 기쁨이 나를 아프게 한다!....... 민중이 단죄하는 것을 이해한다. 죄인들을 처단함으로써 정의가 충족될 때 나는 그 단죄에 동의한다........ 지배자들은 우리를 개화시키기는커녕 우리를 야만인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야만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뿌린 것을 거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끔찍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프랑스는 바스티유 요새가 민중의 봉기에 의해 함락된 날을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민중봉기에 의해 혁명으로 전화된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이 근대 유럽국가의 혁명들과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 주는 날이라 할 것입니다. 부르주아 계급, 시민계급의 제한적인 자유와 평등에 머물렀던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미국의 독립전쟁과 달리 프랑스 혁명이 민중주체의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적 이상을 담는 급진적인 혁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바로 민중이 참여하는 혁명으로 그 시작을 열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7월 14일의 파리 민중의 봉기는 이후 진행되는 프랑스 혁명의 힘의 원천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바스티유의 경험은 프랑스 혁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중의 동력을 기반으로 또 다른 혁명으로 나가게 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루이 16세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7월 15일 루이 16세는 제헌국민의회에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어 네케르를 복직시켰습니다. 제헌국민의회는 그들이 선언한 대로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을 위한 그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의회를 해산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의 결의를 지켜냈습니다. 그들은 이제 사실상 국가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제헌의회는 바이이를 파리시장에, 라파예트를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프랑스의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7월 17일 루이 16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파리시청으로 나와 새 시장인 바이이로부터 혁명의 상징이었던 삼색휘장(이것이 현재 프랑스의 국기임)을 받고 이를 두른 채 파리시민에 앞에 서서 혁명에 대한 승인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굴욕을 당했지만 루이 16세는 왕좌를 지켰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제 자신이 프랑스의 주인이 아니며 프랑스의 주인은 프랑스의 민중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부르주아 계급과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성직자와 귀족계급이 중심 되는 새로운 체제가 열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분출된 민중의 불만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방 곳곳에서 구체제에 대한 공격과 생존권에 대한 요구가 묶여진 농민들의 폭동과 봉기가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곳곳에서 귀족들과 영주들이 공격당하고 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재산이 탈취되고 상점이 습격당했습니다. 전국은 혼란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또 다른 계급의 출현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헌의회 내부에서는 국민방위군을 통해 강력한 진압을 촉구하는 발언들이 이어졌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한 혁명의 한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실제 몇 몇 도시에서는 가혹한 진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제헌의회는 혁명을 유지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사태를 빨리 안정시켜야만 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구체제의 억압에 맞섰던 그들이 이런 상황을 무력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8월 4일, 현 상황에 대한 해결을 위한 제헌의회의 회의 과정에서 한 참석자의 웅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공정해 집시다. 우리의 염치뿐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모독인 그 고문서들을 여기에 가져 오게 합시다. 짐 나르는 짐승처럼 사람에게 쟁기를 지라고 요구함으로써 인류에게 굴욕을 안겨 주는 그 고문서들을 가져오게 합시다. 쾌락을 사랑하는 영주들의 잠을 개구리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연못가를 두드리면서 밤을 새우라고 인간에게 강요하는 고문서들을 가져오게 합시다. 신사 여러분, 이 계몽된 세기에, 이 수치스러운 양피지들을 조국의 제단에 희생으로 바치기 위해 그것을 태울 장작더미를 만들어 거기 불을 지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누가 있겠습니까? 신사 여러분, 일체의 봉건적 조세를 임의로 상환할 수 있는 금납체로 대치할 때까지, 그리고 그 미세한 흔적조차 인민의 정당한 불평의 원인이 되는 봉건적 조세가 여러분이 공포하게 될 법류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여러분은 광란의 프랑스에 평정을 회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프랑스 혁명사 상> 알베르 마티에, 창작과 비평사, 1982

 

8월 4일, 그들은 자신의 계급들이 갖고 있었던 전통적인 특권의 폐지를 선언하였습니다. 농민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수렵권, 방토권, 비둘기 사육권(귀족들만이 비둘기를 기를 수 있다는 권리로 농작물에 피해를 끼쳤음), 그리고 재판권의 폐지를 선언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은 10분의 1세를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은 면책특권을 포기했습니다. 표면상으로 이제 프랑스의 모든 국민은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모든 직업이 차별 없이 개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차별의 본질적인 원인이 되는 재산권에 대해서는 온전히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환호했습니다. 이제야말로 그 지긋지긋한 봉건제도의 온갖 억압이 폐지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선언이 실제화 되는 데는 약 3년의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농민들의 봉기는 산발적이지만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8월 4일 이후 제헌의회는 본격적으로 새로운 헌법의 제정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헌법의 골격은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제헌의회의 의원들은 헌법제정에 앞서 헌법의 서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론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헌법의 서문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제헌의회는 마침내 오늘 1789년 8월 26일 전문과 17개 조항으로 구성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하였습니다.

 

 


 

먼저 프랑스 인권선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문입니다.

 

“국민 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프랑스 민중의 대표자들은 인권에 관한 무지와 소홀함과 멸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 부패의 유일한 원인임을 믿으며, 사회의 구성원들이 언제나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상기하고, 입법권과 행정권의 행사가 언제라도 모든 정치적 제도의 목적과 대상에 부합되는지를 비교하여 좀 신중하게 행사되도록 하고, 앞으로는 단순하면서도 의심할 바 없는 원칙에 기초하여 시민들의 불편과 고충이 해결되도록 하고, 헌법이 유지되고 만인의 행복이 증진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갖는 빼앗길 수 없는 신성한 자연권을 업숙히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므로 국민의회는 절대적 존재의 후원아래 인간과 시민의 다음과 같은 권리를 인식하고 선언한다.“

 

인권선언의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좀 길지만 원문을 인용하겠습니다. 원문을 전재하는 이유는 이 선언이 갖은 의미를 같이 들여다보고자 함입니다.

 

제 1 조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의 이익을 근거로 해야만 한다.

 

제 2 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권리를 보전함에 있다. 그 권리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의 저항 등이다.

 

제 3 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떠한 단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유래하지 않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제 4 조 자유란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자연권의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도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어떤 제약도 받지 아니한다. 그 제약은 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제 5 조 법은 사회에 유해한 행위가 아니면 금지할 권리를 갖지 아니한다. 법에 의해 금지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방해될 수 없으며, 또 누구도 법이 명하지 않는 것을 행하도록 강제될 수 없다.

 

제 6 조 법은 일반 의사의 표명이다.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하여 그 작성에 협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법은 보호를 위해서도 처벌을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지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

 

제 7 조 누구도 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 그리고 법이 정하는 형식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소추, 체포 또는 구금될 수 없다. 자의적 명령을 간청하거나 발령하거나 집행하거나 또는 집행시키는 자는 처벌된다. 그러나 법에 의해 소환되거나 체포된 시민은 모두 즉각 순응해야 한다. 이에 저항하는 자는 범죄자가 된다.

 

제 8 조 법은 엄격히, 그리고 명백히 필요한 형벌만을 설정해야 하고 누구도 범죄 이전에 제정·공포되고, 또 합법적으로 적용된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될 수 없다.

 

제 9 조 모든 사람은 범죄자로 선고되기까지는 무죄로 추정되는 것이므로, 체포할 수밖에 없다고 판정되더라도 신병을 확보하는 데 불가결하지 않은 모든 강제 조치를 법에 의해 준엄하게 제압된다.

 

제 10 조 누구도 법에 의해 확립된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종교적 견해를 포함한 자신의 의견이나 발표로 인해 신변에 불안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제 11 조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발언하고 기술하고 인쇄할 수 있다. 다만, 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에 있어서의 그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제 12 조 인간과 시민의 제 권리의 보장을 위해 공권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공권력은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의 이익이 아니라 공중의 이익을 위해 행사되어야 한다.

 

제 13 조 공권력의 유지를 위해, 그리고 행정의 제 비용을 위해 일반적인 조세는 불가결하다. 이는 모든 시민에게 그들의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제 14 조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그들의 대표자를 통하여 공공을 위한 지출이 필요한지를 알 권리, 그것에 대하여 승인할 권리, 그리고 그 용도가 무엇인지를 알 권리, 즉 조세에 관해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

 

제 15 조 사회는 모든 공직자로부터 그 행정에 관한 보고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제 16 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정 되어 있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제 17 조 재산권은 신성 불가침의 권리이므로 공익을 위해 필요하거나 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거나 소유주가 사전적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조건이 없이는 누구도 빼앗기지 않는다.

 

프랑스 인권선언의 근본사상은 근대의 자연법 사상과 계몽사상을 통해 태동한 인간의 기본권(자유, 평등, 소유권, 안전 및 압제에의 저항)을 전제로 사회와 국가의 형성의 의미와 사회의 기본체제를 시민적 제권리(주권재민, 권력분립, 법률제정권 등)에 의거하여 규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은 1세기 전 영국의 명예혁명으로 탄생된 권리장전이나 1776년의 미국의 버지니아주 인권선언 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권리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읽어 보아도 200년이라는 시차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현대적 의미가 살아 있는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인권수준을 돌아 볼 때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1789년의 인권선언 그 자체는 사실 많은 한계를 가진 선언이었습니다. 알베르 마티에는 프랑스 인권선언에 대하여 이렇게 혹독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부르주아 계급의 작품으로서 그들의 각인을 담고 있었다. 이 선언은 평등을 선언했으나 그것은 사회적 효용에 종속된 제한된 평등이었다. 이 선언이 명백하게 인정한 유일의 평등은 과세와 법률에 있어서의 평등, 그리고 능력을 기준으로 한 평등이었다. 이 선언은 능력 자체는 부에 좌우되고 부는 세습의 권리 때문에 신분과 가문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재산을 전혀 갖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재산은 불가침의 권리로 선언되었다.”

- 앞의 책, 알베르 마띠에

 

이 선언은 또 종교의 자유가 공공질서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당대의 종교적 질서인 가톨릭에 저항할 권한이나 유대교나 신교를 믿을 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했으며 언론의 자유에 관해서도 입법자의 권한 밑에 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왕의 권한에 대한 제한과 성직자와 귀족계급의 특권을 폐지하였지만 이는 전적으로 당시 일정하게 재산을 획득하며 시민계급으로 부상하고 있는 부르주아들에게 맞추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결코 민중을 그 선언의 동반자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민중들이 겪고 있던 비참한 생활에 대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권리, 단결에 대한 권리, 그리고 노예제의 폐지, 여성의 평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인권선언은 이후 프랑스 혁명을 관통하는 중요한 토대로 기능하게 됩니다. 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이 위기에 다다르면 언제나 이 인권선언은 혁명의 진전을 위해 새로운 동력을 부여하였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권선언의 정신은 혁명정신이 침해되고 반동적인 흐름이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출구를 여는 무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최초에 가졌던 한계를 실천 속에서 극복하며 보다 더 풍부한 가치를 담아내며 확장되었습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혁명의 진전과 함께 부르주아 계급의 자유와 평등을 모든 민중의 자유와 평등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인종적인 편견도 극복되어 유대인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는 최초의 선례를 남긴 것도 프랑스 혁명이었습니다. 평등의 문제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재산권의 평등으로 확장되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이 실험대에 올랐던 것도, 재산권에 근거한 선거권이 보통선거권으로 확장되었던 것도 프랑스 혁명이었습니다. 인권선언은 그 부족함을 혁명의 실천 과정에서 극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인권선언은 여느 인권선언과는 다른 무게를 갖고 있는 선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프랑스 인권선언이 공표된 날, 인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은 인권은 사회의 진보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권이 전제되어야 민주주의와 정치적 권리, 경제.사회적 권리가 확장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며칠 전 한겨레에 인권에 관한 한 칼럼이 실렸습니다. 복지도 인권이라는 점을 전제하면서 복지가 인권이 되기 위해서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한 글이었습니다.

 

“인권으로 접근해야 민주주의, 정치적 권리 그리고 경제.사회적 권리가 상호의존 관계를 이룬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나홀로 복지가 아니라, 정치적 차원의 민주주의도 함께 가는 복지가 진정한 복지라는 논리가 나오려면 인권의 불가분성의 원칙에 기대는 편이 용이하다. 정치적 권리에 대해 미온적이면 경제.사회적 권리도 곧바로 추락하고, 경제.사회적 권리 없이는 정치적 권리도 보장될 수 없다.”

- 복지를 권리로 본 세계인권선언, 조효제, 한겨레 신문, 2011. 8. 13

 

200년 전의 프랑스의 인권선언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오늘의 세계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저항, 주권재민, 사상과 언론의 자유, 삼권분립을 통한 권력의 통제 등은 현대의 사회, 국가를 규정하는 가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들이 시대를 넘어 오늘 세계의 중요한 가치로 잡게 된 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권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권은 그 시대의 조건을 반영하며 그 함의가 끝없이 확장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던 그 때의 시대적 조건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가졌던 의미와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갖게 되는 의미는 다를 것입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당대에는 매우 급진적인 인간해방의 선언이었을 수 있습니다. 말로써 혹은 글로써 공표된 그 선언이 현실에서는 실제로 가능한 권리로 인정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선언은 시대를 넘어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이끌어 냈습니다. 인권은 시대를 반영하지만 세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동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를 변화시켜 가기 위해서는 인권에 대한 새로운 확장을 끊임없이 모색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 운동의 또 하나의 과제입니다.

 

 

 

1948년 12월 10일, 국제연합(UN)은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하였습니다. 역사의 진전과 사회의 변화는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선언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총 30조항으로 이루어진 세계인권선언은 프랑스 인권선언이 담지 못한 보다 적극적인 인간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적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인종적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노예제에 대한 폐지, 신체적인 억압, 폭력, 고문 받지 않을 권리,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 받지 않을 권리, 거주와 이전의 권리, 정치적 망명의 권리, 결혼하고 가족을 구성할 권리, 집회 및 결사의 권리,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권리. 교육받을 권리 등을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UN은 이 선언이 “모든 인민들과 모든 나라들이 다 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20세기 전반을 마감하며 전쟁과 학살, 파시즘의 야만성. 제국주의와 식민지, 인종적 억압과 차별 등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인권의 문제를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인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그 야만성이 극에 달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인권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체제를 지향하는 중요한 동인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새로운 인권선언이 필요한 때입니다. 프랑스 인권선언과 세계인권선언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인권선언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무상급식 문제를 둘러 싼 복지논쟁은 인권에 대한 새로운 확장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민중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복지가 인권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희망버스를 통해 모든 민중의 생활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인권임을 또한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기초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기본소득제도 또한 인권문제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정보통신의 확장에 따라 인간 상호간의 소통과 그 공간에서의 결사도 새로운 인권으로 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본의 무차별적인 공세로 무너지고 있는 공공부문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공공서비스 향유권 또한 침해받을 수 없는 인권임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소수자의 권리, 자연과 환경에 대한 권리도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기본권일 것입니다. 이러한 권리들이 인간의 기본권으로 확장될 때 세상은 또 한 번 변화할 것입니다. 사회변혁을 꿈꾸는 우리들이 새롭게 고민해야 할 지점입니다.

 

체제의 변화가 곧 인간해방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폐기되었다고 해서,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해방이 실현된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쩌면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새로운 확장의 실패로부터 연유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회체제와 인권은 상호의존의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다시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프랑스 인권선언일에 사회변혁운동과 인권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만 더 첨언하고 싶습니다. 이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 즉 인권이 새롭게 확장되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고 그 새로운 체제는 또 다시 인권의 개념을 확장시키는 이 불가분의 관계를 이어 주는 고리는 투쟁이라는 점을 첨언하고 싶습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인간에 대한 기본권은 인간의 투쟁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며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또한 혁명의 진전에 따라 확장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그 탄생부터 민중의 피와 땀의 소산이었고 그것이 민중의 권리로 올곧이 자리 잡아가는 데는 또 다시 더 많은 피가 뿌려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가 언급한 인권들은 모두 투쟁의 과제입니다. 희망버스는 일자리가 기본적인 인권임을 선언하는 투쟁입니다. 무상급식을 위해 그동안 우리가 실천해 온 일들은 복지권도 인권임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새로운 인권 중의 어떤 것은 혁명이라는 역사의 특별한 단절을 경험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선언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과 투쟁의 과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해 나가려고 합니다. 오늘 그 혁명의 시작이었던 프랑스 인권선언을 통해 혁명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인권선언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현대적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대체적으로 네단계로 구분됩니다. 1789-1792년의 입헌군주제의 수립과 이어지는 공화제, 1792년-1794년의 공화제하에서의 공포정치와 혁명적 독재, 1794년의 테르미도르의 반동, 1795-1799년의 총재정부의 통치와 나폴레옹의 등장, 혁명의 종료가 그것입니다. 겨우 그 첫 단계를, 그것도 일부만을 이야기 했습니다. 천천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하여, 그리고 그 시기와 사건들의 의미에 대하여 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글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후 기술하는 프랑스 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기에 일부러 그 이름들을 언급했습니다. 당초 인물을 중심에 놓고 프랑스 혁명사를 개괄하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프랑스 혁명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인물들의 사상과 행동도 이해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간의 흐름을 쫓아 써나가기로 하였습니다.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이어지리라는 생각에 언급하고 싶었던 이런 저런 역사적 평가와 의미들도 아껴 두었습니다.

 

책! 책! 책!

 

<프랑스 혁명사 상.하> 알베르 마티에, 김종철 역, 창작과 비평사, 1982

 

알베르 마티에(Albert Mathiez, 1874-1932)는 프랑스 혁명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관점을 확립한 사람입니다. 종래 프랑스 사학계의 주류는 당통과 데물렝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 공화파를 혁명의 중심적 흐름으로 보아 왔습니다. 마티에는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 프랑스 혁명을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민중 중심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마티에는 당연하게도 공포정치의 상징이자 독재자로 규정되었던 로베스피에르를 민중의 진정한 대변자이자 혁명의 수호자로 되살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공포정치에 대해서도 마티에는 상당한 부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이처럼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그래서 프랑스 주류학계와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책이었습니다. 매우 이론적인 역사책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혁명에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인물에도 소홀하지 않고 각 개인의 성격과 활동, 그리고 개인의 주변사까지 꼼꼼하게 기록해 두고 있어 특별한 흥미를 주기도 하는 책입니다. 1922-1924년에 3권으로 출판된 책을 번역하면서 상.하로 묶은 책입니다.

 

<프랑스 혁명> 서정복, 살림, 2007

 

단 번에 프랑스 혁명을 개관하고 싶다면 이 책은 읽을 만 합니다. 살림지식총서 291번으로 나온 문고판 책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간략하게 기술한, 그러나 그 내용이 비교적 만만치 않은 책입니다. 거기다가 혁명의 주요 인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의미 등이 별도의 장으로 기술되어 있어 프랑스 혁명의 기초 공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혁명의 역사> 페터 벤데, 권세훈 옮김, 시아출판사, 2004

 

세계사에 중요한 혁명으로 기록되고 있는 몇 개의 혁명들에 대하여 기술한 책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1848년의 독일혁명, 러시아 혁명, 멕시코 혁명, 중국혁명, 이집트 혁명, 쿠바혁명 등과 함께 프랑스 혁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냥 간단한 책은 아니고 혁명에 대한 역사적 의미들을 다룬 제법 무거운 책입니다. 이런 저런 혁명을 비교하여 공부하고 싶은 동지에게는 읽어 볼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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