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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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드레퓌스 사건
얼마 전에 우연히 영화 빠삐용(프랭크린 J. 샤프너 감독, 스티브 맥퀸, 더스틴 호프만 주연, 1973)을 케이블 TV를 통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옛날 영화를 다시 보는 재미는 영화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밖에 있습니다. 옛날 영화는 그 영화와 관련된 공간과 시간으로 나를 훌쩍 옮겨다 놓습니다. 옛날 영화는 빡빡머리 중고생으로 단체관람하던 그 떠들썩함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하고 그 때 이후로는 만난 적도 없는 친구들을 내 곁에 데려다 주기도 합니다. 지금은 사라진 그 극장과 그 주변의 낯익었던 거리로 나를 시간이동시켜 주기도 합니다. 기억도 흐릿한 어느 여학생의 얼굴과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을 언뜻언뜻 만나게 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 영화를 봅니다.
빠삐용을 보며 그 옛날 그 극장에 앉아 있다가 영화 속 한 대사가 저를 꿈에서 깨웠습니다. 저 영화의 저 장면에 저런 대사가 있었나 싶었습니다. 수차례의 탈옥과 재수감을 거쳐 빠삐용이 마지막 수형지로 머물렀던, 악마의 섬, 망망대해가 보이는 절벽위의 바위에 걸터 앉은 빠삐용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 때 나이든 수형자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빠삐용에게 도전적으로 묻습니다.
“당신 누구야? 당신이 누구길래 그 자리에 앉아 있는거야! 그 자리는 드레퓌스 대위님의 자리란 말야!”
다들 한 번 이상은 보았을 영화 빠삐용에서 이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젊은 시절에 꽤 여러 차례 이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몇 주 전에 처음으로 이 영화에서 드레퓌스의 이름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저 역시 드레퓌스 사건을 모르던 아주 어린 시절에 영화를 본 탓으로 그 장면을 아무런 이해 없이 넘긴 탓일 것입니다. 사실 어떤 영화에서는 그 대사의 영어 캡틴(captain, 선장, (육군, 공군, 해병대)의 대위)을 선장으로 번역해서 드레퓌스 선장으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니 지나칠 법도 했습니다. 드레퓌스 선장으로 번역한 사람은 아마도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서 몰랐나 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빠삐용에 드레퓌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도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삐용도 악마의 섬에 머물렀고 드레퓌스도 그곳에 수감되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역사속의 실존 인물이고 악마의 섬, 또한 실제로 존재하는 프랑스의 감옥이었으니 빠삐용이 그곳에서 드레퓌스의 이름을 듣게 되는 것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물론 시간의 차이는 상당히 있었습니다. 드레퓌스 대위가 악마의 섬에 수감된 기간이 1895년부터 1899년이었고 영화 빠삐용에서 나온 그 장면의 시기가 1943년에서 1944년 경이었으니 약 45년 정도의 시차는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 대위의 이름이 튀어 나온 것은 아마 그곳의 죄수들이 그 유명한 사람, 드레퓌스 대위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1906년 7월 12일, 오늘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마의 섬에 수감되었고 그 누명을 벗기까지 12년간 투쟁했던,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격동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로 인해 숱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들을 이어지게 했던, 바로 그 사람, 드레퓌스 대위가 재심에 의해 최종적으로 프랑스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를 선고 받은 날입니다. 이 사건은 개인의 자유.인권, 국가.민족의 이익, 국가권력의 무제한적인 폭력, 진실과 양심을 외면하는 대중의 광기, 언론의 역할과 황색저널리즘,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라는 인종문제,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문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등 당대 세계의 중요한 쟁점들이자 오늘 우리의 세계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는 쟁점들이 동시에 마주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그 사건 하나에 머물지 않고 이후 프랑스의 정치와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 되었습니다. 다들 잘 아는 사건이지만 다시 한 번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그리고 이 사건이 미친 세계사적 의의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오늘 여러분과 함께 드레퓌스 사건 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1894년, 서구열강의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열강간의 다툼이 세계 곳곳에서 긴장을 유발하던 그 시기의 9월 어느 날, 프랑스군 참모부의 정보국은 독일에 대한 첩보활동을 수행한던 중, 주불 독일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프랑스의 군사비밀 명세서가 첨부된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 발신인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고 단지 암호명 ‘D’로 표시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 참모부내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한 군 정보국은 수사를 시작했고 곧 그 용의자로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를 지목하고 체포하였습니다. 비공개로 진행된 군사법정은 1894년 12월에 드레퓌스의 끊임없는 무죄주장을 일축하고 간첩죄를 적용하여 종신형을 선고하였습니다. 편지의 필적이 비슷하다는 것 외에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했으나 군사법정은 서둘러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런 유죄판결의 배경에는 외부적인 요인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즉 대중의 민족적 편견과 반유대주의, 이를 끈질기게 확대해 나간 황색언론, 그리고 군부와 국가권력의 정치적 음모가 그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군내부의 사건이니 만큼 초기에는 일반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반유대주의의 입장을 갖고 있는 한 신문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이 사건을 기사화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각 신문은 앞 다투어 이 사건에 대하여 날조된 기사와 추측성 보도로 대중들을 선동해 나갔습니다. 주요한 선동은 반유대주의에 근거한 것들이었습니다.
19세기말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의 광기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반유대주의가 확산된 것은 자본주의 모순을 유대인에게 전가하고자 한 권력과 자본의 음모가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연쇄적으로 발생한 공황의 위기에 직면한 서구 자본주의 세계의 기득권집단과 중산층들은 몰락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서구 각국은 일자리의 부족과 실업으로 생존권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일반 민중들의 불만을 반유대주의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종주의로 호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오늘-서른세번째-갈등의 핵 유대인 팔레스티나에 이스라엘을 세우다 참조).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유대인 드레퓌스의 간첩협의는 국가권력과 군부, 그리고 보수적인 종교집단과 자본에게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드레퓌스는 간첩이었고 유대인은 프랑스를 위협하는 악이었습니다. ‘드레퓌스는 프랑스 국민을 파멸시키고 프랑스 영토를 차지하려는 국제 유대인 스파이조직의 요원’이라는 날조 기사가 신문의 1면을 장식했습니다. 파나마 사건(유대인 자본에 매수된 의원들이 파나마 운하 건설 책임기업에 대하여 사채발행이 가능하도록 입법조치를 해주었으나 후에 이 기업이 도산함으로서 운하건설도 무산되고 일반국민의 피해가 크게 되었음. 이 사건으로 관련 의원들은 사퇴해야 했고 유대인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매우 좋지 않게 되었음)과 같이 과거의 불미스러운 사건 중 유대인이 관계된 사건이라는 사건은 모두 신문에 다시 언급되면서 반유대주의가 급속히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대중적 선동에 의해 조성된 여론을 등에 업고 육군 장관은 무죄를 다투고 있던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언론을 통해 드레퓌스는 독일의 간첩임에 틀림없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과 프랑스는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민족적인 대립이 아주 심각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도 매우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1870년에 있었던 보불전쟁의 패배로 알사스-로렌 지방을 빼앗겼던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고 이런 속에서 형성된 양국간의 민족적.군사적 대립은 필연적으로 프랑스군에게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군대라는 매우 높은 도덕적 권위를 부여했고 덩달아 막강한 정치적 권력을 갖게 하였습니다 (1870년의 보불전쟁에 대해서는 오늘-네번째-72일 만에 끝난 노동자, 민중의 자치정부, 파리꼬뮌 참조).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군 내부에 독일 간첩이 있다는 사실은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지휘부는 이 문제를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처리함으로써 군의 명예를 지켜내야 했습니다. 더구나 군을 신뢰하고 군에 대하여 그 권위를 인정하는 프랑스국민들의 대중적 정서에 포위된 군은 이 간첩사건을 통해 국민의 군대라는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해야겠다는 판단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군은 진실보다는 이미 유대인 드레퓌스가 간첩임을 확신하는 국민정서를 만족시키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프랑스 군은 수사과정에서 드레퓌스가 간첩이 아님을 확인했지만 유대인 하나를 희생함으로써 군의 명예를 지킴은 물론, 국가통합을 통한 반독일전선을 강화할 수 있다면 그 정도의 거짓과 날조쯤은 민족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이어온 프랑스혁명의 전통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군은 드레퓌스에 대한 유죄판결후 ‘국가안보를 위해 증거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드레퓌스의 범죄가 확실하다는 판단속에서 내린 올바른 결정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덧붙여 변호인측의 증거제시요구에 대해 ‘중대한 군사기밀을 공개할 경우 독일을 이롭게 함은 물론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이유를 들어 대중에 대한 협박과 위기의식을 조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시대를 넘어 지금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유죄판결 후, 1895년 2월 21일, 드레퓌스는 유형지인 남미대륙의 북쪽 프랑스령 기아나(프랑스는 아직도 해외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대륙 밖에 9개의 영토를 갖고 있는데 기아나는 그 중 규모가 큰 영토입니다. 프랑스는 본토에 22개의 레지옹(프랑스의 행정단위, 미국의 주(州)나 우리나라의 도(道)로 이해하시면 됩니다)이 있고 본토밖에 4개의 해외 레지옹이 있는데 기아나도 그 중 하나입니다. 1667년 이후 프랑스영토로 되어 있습니다)의 북쪽 해안에 있는 악마의 섬(Ile du Diable)으로 떠났습니다. 악마의 섬은 기아나의 북쪽 해안에 있는 3개의 섬 가운데 하나로 프랑스혁명 때부터 유형지가 되었던 곳이었습니다. 4월 13일 이곳에 도착한 드레퓌스는 그 때부터 고통스러운 수형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섬에 갇힌 드레퓌스와 그 가족들의 애타는 무죄탄원과 재심청원운동은 거짓과 위선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레퓌스와 가족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드레퓌스의 형과 아내는 드레퓌스를 격려하며 드레퓌스의 석방을 위한 길고 긴 투쟁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드레퓌스와 그 가족들은 1,000여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격려하면서 투쟁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최근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새롭게 출간된 저서 <악마의 섬의 남자, 드레퓌스 사건과 분열된 프랑스>를 쓴 옥스퍼드대학의 루스 해리스는 이 책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진실을 되찾게 된 것은 가족 간의 연대 때문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임이 자랑스러워요..... 이 무서운 불운이 우리를 덮치기까지 우리가 누렸던 그 완전하고 깨끗한 기쁨...... 그 행복했던 생활을 되찾으려면 이 무서운 수수께끼를 푸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겠지요.....나는 믿어요. 내 믿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 드레퓌스의 아내 루시
“나는 체념하지 않았소......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고 마는 법이오......이것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오. 나는 온 세상을 향해 내 결백을 외치고 싶소.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나는 쉬지 않고 날마다 외칠 것이오. 나는 무죄라고!” - 드레퓌스
“시시한 위로 따위는 하지 않겠다.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로 너의 이름에 따라붙은 경멸과 수치가 결코 너의 머리를 숙이게 할 수 없다고 너 자신에게 말하라.” - 드레퓌스의 형 마띠외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도서출판 푸른나무, 1988>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 사건은 가족들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렇게 진실이 묻힌 채 15개월 정도가 지난 후 이 사건은 한 사람에 의해 프랑스 전체와 유럽사회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1896년 3월, 프랑스군 참모부 정보국의 조르쥬 삐까르(George Picare) 중령은 우연한 기회에 드레퓌스의 간첩행위에 대한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증거인 비밀문서의 명세서가 육군 소령인 페르디낭 에스테라지(Ferdinand W. Esterhazy)의 필적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삐까르는 즉각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재판을 다시 열 것을 군 지휘부에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은 이를 묵살하였습니다. 군은 삐까르 중령에게 상부의 뜻이라면서 침묵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미 군 지휘부에게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군은 이미 드레퓌스의 무죄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은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함으로써 군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군 내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느낀 삐까르는 이 사실을 변호사와 가족들에게 알리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위한 재심청구 투쟁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다시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의 뜨거운 쟁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삐까르와 가족들의 필사적인 재심 청구 노력이 더해질수록 군과 국가권력은 줄기차게 거부입장을 견지하며 조작된 증거를 만들어 내는데 골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언론은 다시 반유대주의를 부추기며 대중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사회는 다시 드레퓌스 사건이 화제의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대다수의 언론과 종교계는 이 과정에서 군과 국가권력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와는 다르게 일부 언론과 독립매체들이 이 사건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기 시작함으로서 이제 사건은 일방적인 선동에서 의견의 대립이라는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이 사건으로 전체 프랑스 사회가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군과 국가권력, 그리고 에스테라지는 서로 공모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없는 증거를 날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국제 유대인 스파이 조직에 대한 날조된 이야기들이 연일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군은 에스테라지가 간첩임을 알면서 오히려 에스테라지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야흐로 드레퓌스 사건은 이제 단순히 한 사람의 유무죄를 판결하는 문제를 넘어서서 프랑스 사회 전체의 권력관계를 뒤집을 수 있는 사건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군과 국가권력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원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어지럽히는 악질적인 선동꾼들을 발본색원하겠다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국민들의 일상은 드레퓌스로 시작해서 드레퓌스로 끝나는 하루가 되고 있었습니다.
드레퓌스의 형인 마띠외는 삐까르의 증거자료를 근거로 정식으로 에스테라지를 간첩으로 고발했습니다. 군은 삐까르를 군사기밀 누설혐의로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것으로 맞불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에스테라지에 대한 재판은 무죄가 되었고 삐까르는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프랑스는 요동을 쳤고 사회는 극심한 분열과 파쟁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진실은 또 다시 묻히고 국가라는 이름 앞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전 유럽의 중요한 뉴스가 되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혁명정신의 표상이었던 프랑스는 이제 유럽의 조롱거리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지식인들과 양심적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드레퓌스의 재심청구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뒤엎을 만한 힘은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드레퓌스의 재심을 지지하는 세력에게는 국가와 민족을 유대인에게 팔아먹는 매국노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이어온 프랑스 혁명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세력들은 한 발 더 나가 이 광기를 왕정복고나 보수반동체제의 공고화로 이어가고자 하였습니다. 제2제정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제3공화정의 시기에 있던 프랑스의 공화제는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보불전쟁의 패배속에서 민중들이 쟁취한 자유와 민주주의 상징, 공화제마저 위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96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질식할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파열구를 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장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대문호의 지위를 갖고 있던 졸라는 1897년 1월 13일,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공개장을 일간 신문 로로르(L'aurore, 黎明)에 게재합니다. 졸라가 갖고 있는 사회적 명성은 이 공개장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졸라는 이 공개장에서 드레퓌스의 결백을 주장하고 이 사건이 어떻게 군부와 권력에 의해 날조되었는지를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가며 짚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람들, 국방장관과 군의 지휘부, 엉터리 필적 감정사들, 두 차례에 걸쳐 엉터리 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대하여 실명을 들어 하나하나 고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거짓과 위선이 판치고 개인의 인권을 말살하며 국가전체가 강철군화에 짓밟혀지고 있는 조국 프랑스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날렸습니다.
“진실,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가장 잔혹한 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들의 유령으로 가득한 밤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비열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얼룩진 자들은 무죄를 선고받고, 한 점 오점도 없는 명예로운 사람들은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른 사회라면 그 운명은 파멸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광기, 어리석음, 기괴함, 상상력, 비열한 경찰근성, 종교 재판식의 매도, 폭력과 억압으로 뒤흔들렸습니다. 몇몇 군 지휘부의 영달을 위해 국가 전체가 강철 군화에 짓밟혔으며,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는 국가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질식되었습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않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막 가장 멀리까지 울려 퍼질 재앙 중의 재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인류, 바야흐로 행복 추구의 권리를 지닌 인류의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저의 영혼의 외침입니다. 부디 저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하여 푸른 하늘 아래에서 심문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밀졸라 나는 고발한다, 유기환 편역, 책세상, 2005>
졸라의 공개장은 프랑스 사회를 더 큰 충격과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지식인들과 시민,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사회주의 운동그룹들이 드레퓌스의 재심청구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1897년은 프랑스 인권선언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인권선언을 지킨다는 뜻으로 인권동맹이라는 이름의 조직으로 결합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수세력과 군부도 프랑스를 지키자는 이름하에 프랑스 조국동맹을 결성하고 재심반대 운동으로 맞불을 놓았습니다. 이들은 대중의 반유대주의와 애국주의에 기대어 대중적 집회와 선동, 폭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거리 곳곳에서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대중적 광기에 사로잡힌 프랑스인들은‘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몰아내자’, ‘프랑스군 만세’ 등을 외치며 재심을 주장하는 세력에 대한 공격을 일삼았습니다. 급기야 에밀 졸라도 군을 모독하고 군법회의에 대해 중상모략을 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분열과 사회적 혼란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프랑스역사에 없었던 대중적 분열과 충돌이었습니다(최근에 프랑스 교육부는 학교에서 히잡착용 금지라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를 놓고 프랑스 여론이 찬반으로 갈려 팽팽하게 맞서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은 일제히 드레퓌스 사건이후 프랑스가 최대의 국론분열에 휩싸이고 있다는 보도를 한 바 있습니다). 세계는 프랑스의 혼란을 주시했고 인권이 추락하고 거짓과 위선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프랑스의 국수주의에 대한 우려와 비난을 쏟아 놓았습니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이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 싼 혼란과 갈등에서 중요한 두 가지 역사적 변화가 일어났음을 짚어 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프랑스 내부의 정치지형과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 중요한 변화와 의미를 던져 준 미예랑 입각 사건이고 또 하나는 오늘 현대사에 큰 갈등구조로 나타난 이스라엘 건국의 기점이 된 시오니즘운동입니다.
시오니즘의 아버지로 칭하는 테오도르 헤르츨(Thedor Herzl, 1860-1904)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언론사의 기자로서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바로 이 시기에 프랑스에 와 있었습니다. 헤르츨은 드레퓌스 사건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럽사회의 반유대주의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인 폭력과 약탈을 수반한 반유대주의 광기를 접한 헤르츨은 유대인을 위한 민족국가 건설 없이 이 반유대주의의 족쇄를 풀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파리에 머물던 이 시기에 헤르츨은 충격 속에서 <유대인 국가>라는 저서를 집필합니다. 이 책은 이후 시오니즘 운동의 교범이 되었습니다. 이 충격으로 헤르츨은 언론사를 사직하고 그 책을 들고 전 세계를 순회합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바로 시오니즘 운동이라는, 세계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인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오늘-서른 세 번 째, 갈등의 핵 유대인 팔레스티나에 이스라엘을 세우다).
또 하나는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의 지형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주의 운동 전체에 최대의 논쟁거리가 된 사건, 미예랑 입각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것입니다. 유럽사회주의 운동의 최대의 쟁점으로 프랑스와 제2인터내셔널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예랑 입각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899년 6월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 사회적 혼란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때 공화주의 좌파인 발덱-루소 내각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에 사회주의자인 미예랑이 입각합니다. 사회주의 진영은 발칵 뒤집히고 입각 찬성여부를 놓고 치열한 논쟁에 싸이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은 분열에서 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파리 꼬뮌 이후 완전히 붕괴되었던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은 1869년 쥘 게드가 프랑스 노동당을 창당하면서 부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 속에서 발전해 온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은 1890년대 후반에 5개의 사회주의 정파가 정립하는 구도로 발전합니다. 쥘 게드에 의해 주도된 블랑키주의적인 혁명적 전통을 고집하는 중앙혁명위원회, 파리꼬뮌에 참가했던 고참 사회주의자 바이양이 주도한 사회혁명당, 장 조레스가 이끌었던 개혁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주의노동자연맹, 그 외 알르망파와 독자파가 그것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세력은 이 복잡하고 다단한 사회주의 정치세력을 통합할 필요성을 느끼고 전면적인 통합작업을 추진중이었습니다(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초기역사에 대해서는 오늘-네 번째 파리꼬뮌과 오늘-열 세 번째 조봉암과 진보당, 장 조레스와 프랑스 통합사회당 참조).
독자파에 속해 있던 사회주의자 미예랑이 부르주아 정부의 내각에 입각한 것은 바로 이런 통합이 한참 무르익어 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미예랑의 입각은 사회주의 운동내부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 왔고 이는 결국 심각한 이념대립을 수반함으로써 통합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장 조레스는 입각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쥘 게드와 바이양은 사회주의자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통합테이블에서 이탈하였습니다.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다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이 완전 통합되는 프랑스 통합사회당은 결국 6년이 미루어지면서 1905년에야 결실을 보게 됩니다. 또한 이 논쟁은 마침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과 합쳐져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수 년 동안 이 주제, 즉 사회주의자는 부르주아 정부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 또 참여는 가능한가라는 이 주제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을 갈등과 분열의 구조로 몰아넣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 거의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이 논쟁에 찬반의 입장을 가지고 참여했습니다. 이 논쟁은 현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주제입니다. 더구나 최근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의 연대 혹은 연정을 바라보는데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여기서 이 문제를 모두 다룰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기회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미예랑의 입각사건은 이처럼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운동이나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과 의미를 던져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의 뿌리는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드레퓌스 사건 초기에 이 사건을 우파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 내부의 문제이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심각하게 진행되면서 사회주의 정치세력 중 일부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즉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도발하는 극우 보수주의자와 군부, 왕당파를 견제하고 민주주의와 프랑스 혁명정신, 그리고 제3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세력을 포함하는 범좌파세력의 결집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장 조레스가 이끌고 있는 사회주의노동자연맹을 비롯한 일부 사회주의 정치세력들이 적극적으로 드레퓌스 재심청구운동에 뛰어 들었습니다. 이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과 함께 인권동맹에 참여해서 활동했습니다. 바로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독자파인 미예랑의 입각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쥘 게드파와 바이양파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이런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차이는 필연적으로 미예랑의 입각에 대한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 왔고 결과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통합을 지연시키고 말았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이 처럼 단순하게 한 사람의 유무죄나 개인의 인권과 자유의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 매우 폭 넓은 역사적 반향을 이끌어 낸 사건이었습니다.
1897년 초, 드레퓌스 사건은 치열한 대결구도 속에서도 여전히 보수파가 여론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가 당시 얼마나 대중을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졸라는 결국 유죄판결을 받고 항소 중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삐까르는 감옥에 있었고 드레퓌스는 여전히 멀고 먼 남아메리카의 한 섬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상점에 대한 테러와 불매운동이 계속되었고 재심운동에 나섰던 교수들은 학교에서 쫒겨 났으며 재심지지 정치인들은 이 과정에서 치루어진 선거에서 대부분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1898년 중반까지 이런 분위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던 언론과 대중의 정서가 변화되는 계기가 찾아 왔습니다. 1898년 8월 30일, 그동안 드레퓌스의 간첩혐의를 입증하는 증거서류를 날조하고 제시하는데 중심에 있었던 참모부의 중령하나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군부와 국가권력은 궁지에 몰렸고 재심운동세력에게는 상황을 역전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이렇게 재심운동이 힘을 받을 즈음, 점차로 압박이 죄어 옴을 느끼던 에스테라지는 영국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또한 드레퓌스의 무죄를 반증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영국으로 도망간 에스테라지가 자신은 독일의 군사기밀을 빼내기 위한 이중간첩으로서 독일에 접근했던 것이고 이 모든 일은 군 지휘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밝히는 바람에 군부는 변명의 여지없는 막다른 길로 몰리고 말았습니다. 대중은 비로소 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언론은 그동안 반유대주의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던 논조를 슬며시 바꾸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재심청구운동은 날로 확대되어 나갔고 마침내 1889년 6월 3일, 법원은 재심을 결정하였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들여다보아야 할 또 하나의 지점은 언론의 문제입니다. 이 사건은 언론이 어떻게 사회와 대중을 장악할 수 있는지, 언론이 또 하나의 권력으로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례입니다. 드레퓌스 사건 내내 언론은 사회전체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근원으로서 작동하였습니다. 언론은 끊임없이 대중을 추수하며 반유대주의와 국가주의를 확대하면서 하나의 사건을 통해 특정한 세력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질서를 재편해 가고자 하였습니다. ‘신문에서 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진실이 되는 언론의 가치 중립성을 교묘하게 위장하여 진실이 어떻게 은폐되고 왜곡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언론이 어떻게 권력과 유착하며 또 어떻게 모든 권력위의 권력으로 성장하는지를 확인 시켜 주었습니다. 재판이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론을 통해 강제된다는 사실에서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가 어떻게 언론에 고개를 숙이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국가권력 또한 언론을 통해 대중을 지배하지만 또 거꾸로 어떻게 언론에 의해 통제되는지도 이 사건을 통해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주류언론에 맞서는 소수 세력이 어떻게 저항언론을 형성하고 대중과 소통하는지를 또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압도적 다수의 언론이 재심반대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속에서 재심청구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졸라는 공개장을 통해 고의적인 명예훼손을 감행함으로써 이 문제를 이슈화시켜냅니다. 졸라는 결국 기소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드레퓌스 사건을 대중과 소통하는 대중적 공간으로 끌어냅니다. 이에 보수언론은 이 대중적 공간에서의 싸움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키고자 합니다. 보수언론은 졸라에 대한 개인적인 사생활의 부도덕(졸라는 혼외정사를 통해 두 명의 자녀를 두었고 영국으로 망명시에도 그의 연인과 두 자녀를 데리고 갑니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사건의 본질인 재심문제를 비껴가면서 드레퓌스 사건과 졸라의 부도덕성을 연결시킵니다. 드레퓌스 사건 내내 언론은 사건의 본질과는 무관한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한 끊임없는 추적과 폭로를 통해 사건을 희화화하고 거짓을 정당화 해 나갑니다.
압도적 언론에 맞서는 저항언론운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집니다.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독립언론 운동이 시작됩니다. 뿐만 아니라 신문이라는 매체를 넘어서는 전단지, 소책자, 벽보, 집회와 피켓팅 등 새로운 방식의 소통방식이 끊임없이 고안되고 확대됨으로서 언론의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언론이라는 것은 결국 그 판매의 대상이 되는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정치적 기제라고 하는 것을 드레퓌스 사건은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도 하나의 상품이며 이것의 생산자인 언론은 이데올로기를 상업화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몇몇 소수 언론은 드레퓌스 사건의 진행과 함께 드레퓌스편에 서는 영업전략(?)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진실이 드러나고 더 이상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 언론의 기조 변화 또한 눈여겨 볼 지점입니다. 보수언론들은 드레퓌스의 무죄가 확실해지면서 종래의 기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드레퓌스 사건을 넘길 방책을 고민합니다. ‘그래 드레퓌스는 무죄다. 그런데 우리의 조국 프랑스는 어찌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종래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견결히 유지하며 다시 대중을 선동합니다. 그동안 저질러 온 온갖 왜곡과 위선을 단칼에 정리하는 술수를 부립니다. 대중은 다시 이 선동에 끌려들어 옵니다. 언론은 드레퓌스 사건을 하나의 팩트에 대한 실수 정도로 치환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그동안 지향해 온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를 다른 논리를 통해 강화해 나갔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언론의 역할과 임무, 그리고 그 메카니즘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나타난 언론의 여러 가지 양태는 이후 언론학자들에게 매우 관심 있는 연구주제가 되었습니다. 언론학자들은 이 사건을 현대 저널리즘의 분수령이 된 사건으로 이야기합니다. 언론의 권력화, 대중에 대한 지배, 저항언론의 양태, 언론의 상업화, 인권과 언론의 관계, 언론과 다양한 세력과의 상관관계, 언론의 의무와 역할 등 현대 저널리즘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던 드레퓌스 사건은 이처럼 저널리즘의 역사에도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889년 6월 5일, 드레퓌스는 4년 2개월 만에 재심 재판을 받기 위해 악마의 섬을 떠났습니다. 삐까르 중령은 석방되었고 졸라는 영국에서 돌아왔습니다. 진실이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사건이었지만 군부의 저항은 거셌고 언론은 여전히 마지막 안간힘을 통해 이 사건을 묻어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드레퓌스의 변호사가 백주 대낮에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랑스는 기로에 섰고 세계는 프랑스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심재판부는 드레퓌스에게 다시 간첩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징역 10년을 선고하였습니다. 재판관 7명중 5명이 유죄에 손을 들었습니다. 정상참작의 조건을 붙여 종신형에서 10년형으로 형을 축소했을 뿐 이었습니다. 졸라가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정상참작이란 말인가? 이것은 피고에 대한 정상참작이 아니라 심판관 자신들에 대한 정상참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결정은 그들이 자신들의 규율과 양심사이에서 타협했음을 고백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정의를 구현하려는 외침은 머지않아 온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내일이면 세계 각국의 국민들이 어안이 벙벙해서 물을 것이다......프랑스는 어디에 있는가?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면 휼륭한 정의의 병사들외에는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은 프랑스에 대한 비판을 쏟아 놓았습니다. 각국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는 항의 집회가 연일 계속되었고 이듬해인 1900년에 개최예정이었던 파리 세계박람회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도 나타났습니다. 프랑스 국내의 혼란도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정치권과 지식인들은 연일 항의집회를 가졌고 대중들 또한 천천히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 투쟁은 계속되었고 결국 프랑스 정부는 대통령 사면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재심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은 유죄를 인정하는 사면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다시 언론이 대중을 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언론들은 이제 더 이상은 이 일로 국론이 분열되는 것은 막아야 하고 그것이 프랑스를 구하는 길이라는 논리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해 나갔습니다. 드레퓌스와 그의 가족들은 사면을 받아 들였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왔던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드레퓌스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죠르쥬 삐까르는 드레퓌스의 유죄인정 탓에 여전히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이 낳았던 반유대주의의 광기도 치유되지 않았고 프랑스 사회의 갈등도 여전히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드레퓌스와 그 가족의 고통을 외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은 역사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진실을 위한 투쟁의 마지막 바톤을 움켜 쥔 것은 장 조레스였습니다. 끈질기게 증인을 찾아 나섰고 증거자료들을 모았습니다. 조레스는 국회에서 국방성 감사의 결의를 얻어냈고 이를 통해 최초의 거짓을 덮기 위한 날조, 이를 감추기 위한 변조 문서들을 참모부에서 찾아냈습니다. 드레퓌스는 이 증거서류들을 모아 다시 재심을 청구하였습니다. 1904년 3월, 다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1906년 7월 12일, 마침내 최종 결심에서 드레퓌스에 대한 무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유죄 증거가 없으므로 심리의 여지도 없이 드레퓌스의 과거 모든 판결을 무효화 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사건 발생 12년 만에 완전히 종결 되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개인의 인권, 국가주의, 인종적 편견, 언론의 역할과 임무,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사회주의 이념 등 수많은 사회적 과제들에 대해 세계사적 의의를 남긴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많은 혼란을 겪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 국민전체가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는 오늘날 소위 톨레랑스의 프랑스를 만들었습니다. 세계 또한 이 사건을 통해 진실이 역사발전을 담보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에 맡긴다는 말들을 합니다. 역사는 반드시 진실을 드러낸다는 이야기들을 하기도 합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투쟁이며 역사 속에서 저절로 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진실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도 아닐 수 있음을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우리는 고통스러운 투쟁만이 역사발전의 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드레퓌스 사건은 진행 중 입니다. 세계도처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으며 한반도의 남쪽 땅에서도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18년 만에 재심청구를 받아들인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검찰은 곧 바로 상고하여 대법원에 재심여부가 계류중)이 생각나고 천안함 사건이 떠오릅니다. 오늘 우리 곁에서 발생하는 드레퓌스 사건이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살아남을 것인지 아니면 역사를 퇴행시키는 올무가 될 것인지는 바로 지금, 바로 오늘, 투쟁하고 있는 우리의 몫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남은 이야기들.
드레퓌스는 무죄판결을 받은 그해 7월에 소령으로 진급하여 군에 복귀하면선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종 도뇌르를 수여 받았습니다. 전역하였다가 1차대전에 종군하였으며 자신의 수형기록을 담은 <악마의 섬 일기>를 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1935년 7월 25일, 그의 나이 76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에밀 졸라는 1902년, 62세의 나이에 타살의혹이 제기된 석탄난로 가스중독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자연주의 소설의 완성자로서 사실주의 소설로 이어지는 작품세계를 구축했던 에밀 졸라는 노동자와 하층계급의 비참한 현실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들의 절망과 고통을 생애 내내 그려 나갔습니다. 말하자면 노동소설의 한 영역을 개척해 간 그는 그의 작품이 말해주듯 사회의 정의와 진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가 소설가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1867년에 발표한 <테레즈 라캥>이었고 1877년에 루공 마카르 총서 중의 하나로 발표한 <목로주점>으로 최고작가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던 당시 에밀 졸라는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이자 대문호로서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고발한다> 이후 졸라는 말년에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대중들의 공격, 기소, 유죄판결, 망명, 레종 도뇌르 서훈 취소로 이어지는 고난의 세월을 겪었습니다. 그는 결국 드레퓌스의 무죄를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1906년 복권되었고 프랑스를 빛낸 사람들이 묻힌다는 팡테옹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서 후에 프랑스의 수상이 되는 죠르쥬 클레망소(George Clemenceau, 1841-1929)는 이렇게 조사를 읽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제왕에게 반항해 경배를 거부할 만큼 강한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다수에 저항하고 오도된 대중에 홀로 맞선 사람은 드물다. 갈기갈기 찢긴 프랑스에서 혁명이라 할 만한 정신의 평화로운 반항에 첫 신호를 보낸 영광은 졸라에게 돌려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빠삐용. 빠삐용은 실존인물입니다. 영화 빠삐용은 앙리 샤리에르라는 사람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앙리 샤리에르는 1931년 그의 나이 25세에 몽마르트의 포주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아나로 보내집니다. 11년간 8차례의 탈옥과 체포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악마의 섬에서 코코넛 자루 두 개를 이은 뗏목을 안고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1944년 39세에 베네수엘라의 정착에 성공한 후 공소시효가 만료된 1967년, 프랑스를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1968년 수기인 <빠삐용>을 출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73년 사망하였습니다.
*** 책 책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푸른나무, 1988
다들 읽으셨을 것 같아 거론하지 않으려다가, 이 글을 쓰는데도 많이 인용했기에 소개합니다. 노조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88년인가 89년인가 노조간부들과 같이 읽었던 책입니다. 지금이야 이런 류의 책이나, 역사에 대한 이런 정도의 해석을 담은 책은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래도 세계역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알려주고 세계사에 대한 열린 인식을 갖도록 했던 책입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여느 역사이야기와는 다르다는 뜻으로 제목을 ‘거꾸로 읽는 세계사’로 달았다고 유시민은 책머리에 쓰고 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시작으로 러시아 혁명, 마오의 대장정, 베트남 전쟁, 말콤 X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편안하고 쉽게 읽을 만한 책입니다.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 유기환역, 책세상, 2005
틈틈이 소개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장이 처음으로 전문번역된 책입니다. 책세상 문고 47번으로 나와 있는 책으로 <나는 고발한다> 뿐만 아니라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된 졸라의 11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부록으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경과와 관련자료, 그리고 졸라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습니다. 진실이 왜곡되는 구조 속에서 졸라가 담아냈던 많은 이야기들은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고 있는 지금의 우리가 해야할 말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목로주점1,2> 에밀 졸라, 송영자역, 밀레니엄 북스, 2008
이 소설은 그의 역작 〈루공-마카르 총서〉의 7번째 권으로, 졸라 소설의 한결같은 주인공이었던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노동자, 민중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입니다. 노동자 민중의 비참한 생활과 그 속에서 느끼는 고통을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아울러 19C 프랑스 자본주의와 프랑스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자연주의 소설답게 인물의 내면 보다는 주변환경에 대한 묘사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루공 마카르 총서>라는 말은 졸라가 1869년부터 쓰기 시작한 독립적인 연작 소설을 일컫는 말입니다. 루공 마카르가(家)의 대를 이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쓴 소설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제르베즈 이며 이어 나온 또 다른 걸작 <나나>의 주인공 나나는 제르베즈의 딸입니다. 또 클로드 베리 감독, 제라르 드 파르디유 주연의 잘 알려진 영화 제르미날은 졸라의 소설 <제르미날>을 영화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광산 노동자 에티엔느는 제르베즈의 아들입니다. 이 처럼 졸라가 한 가문의 사람들을 내세워 그 시대의 민중들이 시대를 넘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려낸 것이 루공 마카르 총서입니다. 1893년까지 20편을 썼습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면 조세희 선생님이 쓰신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 같은 것입니다. 졸라의 작품을 다 읽기 어려우시겠지만 목로주점 정도는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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