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부터인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버릇처럼 오늘은 나의 삶에 어떤 흔적이 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역사속의 오늘은 어떤 흔적이 묻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바꿀려고 했던 수많은 땀과 눈물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어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오늘은 평생을 혁명에 바친 어느 혁명가가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내일을 더 살지 못함을 한탄하며 단두대에 사라진 날입니다. 오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투쟁이 있었던 날이고 또한 오늘은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오늘의 역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혁명의 역사, 진보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누가 오늘의 또 다른 의미를 기억할까요? 박종태 동지의 죽음도 역사속의 한 날짜에 변혁을 위한 진한 눈물방울을 적셔 놓았겠지만 몇 년이 지나 얼마큼의 사람들이 그 날짜에 진하게 물든 그 동지의 피눈물을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매일 나태해지는 우리의 삶을 혁명의 역사, 투쟁의 역사, 진보의 역사속에서 다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아주 가끔씩 짧게라도 오늘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이 글은 앞으로 사회운동을 해갈 후배들을 위해 2009년부터 틈틈이 쓴 교육용 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글을 참고했고, 불가피하게 인용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총 70여편의 글 중 십여개만 추려 블로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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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매카시즘! 매카시워즘?
오늘, 1954년 12월 2일은 매카시즘과 관련하여 그냥 넘길 수 없는 날입니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뽐내며 전 미국을 공산주의의 공포로 숨죽이게 했던 바로 그 매카시즘이 오늘 미국 상원의 조지프 레이몬드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1957) 의원에 대한 견책결정과 함께 맥없이 풀이 꺾였습니다. 미국 상원은 오늘 미국 상원의원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매카시 상원의원에 대한 견책을 67대 22로 가결하였습니다. 이 결의는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이 아니라 매카시 의원 개인에 대한 견책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결의는 4년여 동안 사상검증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약 1만 명에 가까운 미국 행정부 내의 인사와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구속시키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현직에서 물러나게 했던 매카시즘에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전 미국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으며 비판적인 사회과학과 인문학 연구를 무덤으로 보내고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서 대중문화와 예술을 극도로 위축시켰던 매카시즘은 오늘 역사 뒤편으로 물러났습니다.
12월 2일 상원에서 매카시 의원에 대한 징계가 결정된 후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
“매카시즘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의 be 동사 is와 그 과거형인 was를 붙여 희화화한 말이었습니다. 실제 상원의 결의 이후 매카시의 영향력은 땅에 떨어졌고 인기도 곤두박질쳤습니다. 당연하게도 한 때 미국을 집단적인 히스테리로 몰아넣었던 매카시즘도 덩달아 그 생명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던 매카시즘, 이미 그 생명이 다했다는 매카시즘이 오늘 우리 사회에 시끌벅적한 소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어디 오늘 뿐이겠습니까? 어디 우리나라 뿐이겠습니까? 지난 수십 년 동안 그 공포의 매카시즘은 매카시의 무덤에서 일어나 전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 되었습니다.
오늘, 60여 년 전 미국사회를 공포와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고 지금도 우리 사회에 잿빛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매카시즘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선동적인 언사 하나로 미국을 광란의 마녀사냥으로 몰아넣었던 매카시즘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일개 상원의원 하나의 말과 몸짓에 모든 정치권력과 언론, 그리고 대중들이 함께 춤을 추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더구나 인간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통제받지 않는 언론으로 포장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집단적인 히스테리가 가능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늘,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세계는 2차 대전이 종전되면서 미.소 양국의 대결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위해 반파시즘연대로 손을 잡았던 미국과 소련은 전후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세계 각국에서 치열한 대결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대결장기도 했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 이면에 미.소 양국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1930년대 뉴딜정책을 통해 실업과 경제침체를 일정하게 해결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이어 터진 2차 대전은 미국 자본주의를 결정적으로 소생시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시에 경험한 전쟁특수와 사회적 통제는 자본과 보수세력에게 매우 달콤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미국의 자본들은 영구적인 전시체제의 지속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지쳐있던 미국민들은 전시동원체제의 해체와 그 기간 동안 통제되고 있던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급진적인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또한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1930년대의 대공황이라는 어려운 경제상황을 견뎌내면서 꾸준히 성장해 왔습니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에 따른 성과물이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이후 미국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유주의 세력과 급진적인 진보세력의 연대를 요구하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1930년대부터 전쟁시기까지 이런 자유주의-급진주의 연대 흐름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미국사회 전반에 걸쳐 일정한 흐름과 대중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진보적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실제로 상당한 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미국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940년대 들어 일어난 세계 2차 대전은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의 흐름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에서 미국 사회주의 운동은 반전이라는 입장을 갖고 국가권력과 대립했었지만 2차 대전에서는 미.소 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반파시즘연대라는 틀 속에서 미국 내 진보세력은 국가의 전쟁수행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사회당은 여전히 전쟁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노동조합과 대부분의 진보적인 단체, 지식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련의 영향 하에 있던 미국 공산당은 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며 미국 사회주의 운동은 하나의 보편적인 대중운동으로서 시민권을 획득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잡지와 신문은 소련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실었고 헐리우드는 소련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모스크바 밀명 Mission to Moscow, 1943> <북극성 The North Star, 1943> <러시아 노래 Song of Russia, 1944>등의 영화를 내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있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하여 자본가들과 보수세력,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지배를 놓고 소련과의 치열한 대립의 국면이 조성되고 있던 정세에서 이는 큰 장애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미국이 특별한 근거 없이 이런 흐름을 물리적으로 탄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국주의적 패권과 관련하여 아무런 입장 차이를 갖고 있지 않았던 공화, 민주의 양당세력이나 자본주의 시장의 확대를 통해 이윤의 계속적인 축적을 갈망하던 미국자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대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소련과의 세계 패권경쟁에서 승리하고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이윤축적을 위해서 국내 좌파세력에 대한 통제는 필수적인 과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대통령의 민주당 정부는 소련과의 대결구도를 확장하고 선동함으로써 소련의 위협에 따른 군사적 긴장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공화당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트루먼 정부는 2차 대전 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국의 독립국가 건설 움직임과 혁명운동은 소련의 팽창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는 머지않아 미국에 현실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대중적 선동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트루먼 정부는 이를 통해 대외적으로는 국제적인 군사개입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제국주의 전략을 유지하고 대내적으로는 군수산업의 성장동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화, 대중에 대한 통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을 밀고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이 권력의 유지와 자본의 이윤을 놓고 충분히 연대할 수 있는 조건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투루먼
1945년 종전 이후 세계 곳곳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놓고 혹은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국지적인 분쟁들은 하나하나가 이미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의 양강으로 부상한 미.소의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는 분쟁이었습니다. 유럽의 동서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 속에서 선을 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와 터키에서는 공산주의 반군과 정부군 사이에서 내전이 지속되고 있었고 양측은 각기 공산국가와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서방의 제국주의 국가들에 맞선 독립투쟁은 필연적으로 공산혁명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 싸움은 결국 서방세계와 공산주의 국가의 충돌, 미.소의 대리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런 분쟁의 양상들을 가지고 소련의 위협을 줄기차게 선동해 나갔습니다. 미국사회는 점차적으로 반공주의, 보수주의가 하나의 대중적 흐름으로 형성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정부는 트루먼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통해 대외정책에 대한 기본노선이 되는 방침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4억 달러의 군사.경제원조를 대통령이 의회에 요청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 연설은 1947년 3월 12일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무장 소수세력이나 외부의 압력이 시도하려는 예속에 대해 저항하는 자유로운 국민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세계는 두 개의 생활양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유로운 제도로 특징지어지는...... 다수의 의지에 기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와 억압..... 개인의 자유에 대한 탄압 등..... 소수의 의지에 기반한 것입니다.”
1947년 3월 12일에 발표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었습니다. 트루먼이 언급한 무장 소수세력은 터키와 그리스의 공산주의 세력이었고 외부의 압력은 소련의 개입이었습니다. 트루먼 독트린은 이후 미.소 양국의 직접적인 대결과 동서냉전이 본격화되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은 세계질서의 재편과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해 공세적인 대외정책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였습니다. 제 2차 대전을 겪은 후 독립국가의 수립을 놓고 이념적 갈등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나라에 대하여 자유 민주주의라는 깃발을 내세우며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모든 지역에 대하여 자본주의체제의 이식을 위한 무한정의 군사.경제원조가 퍼부어졌습니다.
대외적인 긴장감을 통해 국내에서의 사회적 통제를 획책하는 국내 선동도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트루먼 정부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한 지 10일 만에 대통령령 9835호를 발표하고 미국 정부내에 침투한 불순분자, 즉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공직자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고 정부기관, 학교 등에서 충성서약이 일상적이고 의무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의회는 2차 대전 전에 파시스트들을 조사하기 위해 특위로 설치하였던 하원반미활동위원회(HUAC,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를 상임위원회로 격상시킨 후 공산주의자를 소환 조사하는 일들을 대대적으로 벌여 나갔습니다. 이 위원회의 활동은 이후 점점 확대되어 갔고 미국 내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확장시키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 위원회의 활동이 어땠는지 다음의 평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47년 3월에 시작되어 1952년 12월까지 이어진 트루먼의 보안 프로그램으로 약 660만 명이 조사를 받았다. 약 500명이 ‘충성이 의심스럽다’는 모호한 이유로 해고됐지만 단 한 건의 간첩행위도 적발되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이 재판관이나 배심원도 없이, 비밀증거와 비밀스러운 정보제공자의 증언에 의존했다. 정부전복의 증거를 찾지 못했음에도 광범위하게 수행된 빨갱이 사냥은 정부에 스파이들이 침투해 있다는 관념에 대중적인 믿음을 갖게 했다. 보수적 두려움에 가득 찬 반응이 이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다. 미국인들은 기존질서의 절대적인 안정과 보존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 <1950년대>, 더글러스 밀러.매리언 노왁 공저, <미국민중사> 하워드 진, 이후, 2006년에서 재인용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통해 명확하게 공화당의 보수적 경향성과 대립되는 자유주의 정당으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던 민주당의 트루먼 정부는 전후 대외적인 팽창정책과 미소대립, 그리고 사회적통제와 반공정책을 중심으로 했던 국내정책에서 공화당과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의 트루먼 정부는 전전 혹은 전쟁 중에 형성했던 자유주의-급진주의 연대를 해체함으로써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을 통한 국민적 합의를 추진해 나갔습니다. 자유주의를 중심적인 이념으로 하고 있던 민주당은 보수적인 대외정책과 반공에 대한 공화당의 협조를 바탕으로 자유주의적인 복지, 즉 트루먼의 페어 딜(Fair Deal)을 밀고 나갔습니다. 전후 자본주의 경기의 활성화는 이런 흐름에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기묘한 동행 속에서 미국이 추구해 왔던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가치는 소멸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화되어 갔습니다. 미국은 마샬플랜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설립으로 소련과의 전면대결을 노골화하면서 서구 유럽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미국은 아시아의 일본과 한반도의 남쪽에서의 지배권을 확보해 나갔고 프랑스가 힘에 부쳐하는 인도차이나에 대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장제스에 대한 지원을 통해 중국대륙에 대한 야망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런 미국의 공세에 맞서는 소련의 대응이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세계는 바야흐로 전쟁보다 뜨거운 냉전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미국 내의 반공산주의 분위기는 더욱 높아 갔습니다.
이런 대외적인 긴장을 바탕으로 미국정부는 국내에서의 사회적 통제와 반공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를 더욱 심화시키는 일련의 사태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1948년 6월 소련의 베를린 봉쇄,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탄 실험, 1949년 10월 중국의 공산혁명정부 수립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런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국민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상기시키고 국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체제 전복의 우려를 확산시켜 나갔습니다. 미국사회는 점차 공산주의에 대한 집단적인 증오와 공포심에 춤추기 시작했고 권력과 자본은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하여 이를 더욱 부추겨 나갔습니다.
트루먼 정부에 의해 진행되고 있던 반공정책과 하원반미활동위원회(HUAC) 활동은 더욱 힘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령에 의해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는 사회단체에 대해서는 모두 탈법적인 조사와 심문, 감시가 이루어졌습니다. 문화, 예술단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검찰과 하원은 조사면제나 소환면제를 미끼로 주변의 사람들을 고발하도록 부추겼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조사대상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고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헐리우드도 이런 흐름에서 비켜 설 수는 없었습니다. 1947년 10월, HUAC은 헐리우드에서 공산주의자를 조사한다는 이유로 43명의 영화인을 소환하여 청문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위원회는 이들 소환자에 대한 조사는 물론 소환자로 하여금 헐리우드에 침투한 공산주의자의 이름을 대는 증언을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HUAC은 소환된 영화인들 중 과거 공산당원이었거나 동조자로 의심되는 19명의 영화인을 비우호적 증인으로 분류하고 따로 청문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중 11명은 끝까지 증언을 거부하면서 위원회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습니다. 시인이자 극작가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중이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 영화감독 에드워드 드미트릭,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롬보 등이었습니다. 이후 이러한 흐름은 라디오와 TV로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이들은 증언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브레히트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나머지 10명은 의회모독죄로 기소되었습니다. 헐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이들 10명에 대해 앞으로 헐리우드에서 어떤 일자리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른바 헐리우드 영화사에 등장하는 헐리우드 텐(10)이었습니다.
이후 영화계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는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동료의 이름을 대고 동료를 고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분위기가 헐리우드를 지배했습니다. 1950년 6월에는 라디오·TV 종사자 151명에 대한 리스트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른바 레드 채널 리스트(Red Channels List)였습니다. 대중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영화인과 방송인에 대한 사상검증은 매카시즘의 광풍이 지고 나서도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습니다. 바로 그 시작은 헐리우드 텐으로부터 였습니다.
이처럼 전 사회적으로 반공 분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는 간첩사건이 터졌습니다. 바로 앨저 히스 간첩사건이었습니다. 국무부의 관리였던 엘저 히스가 간첩이라는 증언이 하원반미활동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1936년부터 국무부에서 근무하며 루즈벨트의 최측근으로서 얄타회담에도 동행했던 앨저 히스가 소련의 스파이였고 미국의 모든 외교전략이 그를 통해 소련에게 전달되었다는 증언은 미국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후에 대통령이 되는 리처드 닉슨은 하원반미활동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가장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러나 앨저 히스의 완강한 부인과 애치슨 국무장관의 적극적인 옹호로 간첩혐의는 결국 입증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무부에 소련의 스파이가 있었다는 증언만으로도 미국민들의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커져만 갔습니다. 미국사회는 점차 집단적인 히스테리의 증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지프 레이몬드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1957)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여기 바로, 내 손에! 205명의 공산당원의 명단이 있습니다.....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국무장관에게 알려졌음에도 계속 국무부에서 일하면서 국무부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의 명단 말입니다.”
- 조셉 레이몬드 매카시, 공화당 여성클럽 연설, 1950년 2월
앨저 히스가 법원에서 간첩혐의를 벗은 지 1개월 후, 미국사회가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집단적인 히스테리의 증후를 보이기 시작하던 1950년 2월,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주의 휠링에서 공화당 여성클럽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누구나 명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서류를 손에 움켜 쥔 채 충격적인 연설을 했습니다. 국무부에 공산주의자가 205명이나 일하고 있다니...... 모든 언론은 이 연설을 대서특필했고 미국민들은 다시 한 번 혼란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바로 다음날 매카시는 솔트레이크시티 연설에서 다시 미 국무부에 현재 57명의 공산당원이 암약하고 있다며 그 명단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매카시는 일약 뉴스의 중심으로 등장했습니다. 모든 언론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했고 국민들은 매카시의 발언의 사실여부는 안중에도 없었고 그가 말한 내용만을 쫓았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합리적 사유나 객관적 판단이 끼어 들 틈도 없었습니다.
몇 일후 매카시는 다시 의회 상원회의장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들고 나타나 의정단상에 섰습니다. 그가 손에 든 서류는 국무부의 충성심사 서류철에서 복사한 자료였습니다. 그가 복사한 서류들은 이미 국무부가 대통령령에 근거하여 3년 전에 조사한 후 국무부 근무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대부분 해고한 사람들의 서류였습니다. 매카시는 이 서류를 손에 든 채 마치 그것이 현재 미국 국무부에 소련의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듯이 과장해서 연설하였습니다. 그는 서류에 나와 있던 ‘자유주의적 행동’을 ‘공산주의에 경도된’으로, ‘적극적인 동조자’라는 표현을 ‘적극적인 공산당원’으로 왜곡해서 읽었습니다. 매카시의 이런 행보는 이후 거침이 없었습니다. 매카시는 이제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카시의 발언 하나하나는 미국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습니다. 매카시의 행동은 공산주의자의 체제전복에 맞서는 애국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고 언론과 미국민들은 매카시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휠링에서 매카시가 언급한 205명은 국무부의 직무평가 결과 재임용 추천을 받지 못했던 284명 중 해고를 면하고 국무부에서 계속 근무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재임용 추천을 받지 못한 사유가 그들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매카시는 이들이 대통령령에 의한 조사와 평가에서 추천을 받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공산주의자였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판단하고 284명 중 여전히 근무하고 있는 205명은 공산주의자라고 왜곡 선동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매카시는 호기롭게 측근들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아니라 세탁물을 찾아가라는 독촉장이었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물론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조지프 레이몬드 매카시는 위스콘신 출신의 상원의원이었습니다. 처음 민주당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태평양 전쟁 참전 이후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꾸면서 그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갖는 정치인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1946년 공화당으로서 처음 상원의원에 당선될 때 그는 자신의 해병대 참전을 최대의 무기로 사용하며 자신의 전공과 군경력을 과장 날조하는 극우적인 애국주의 홍보를 통해 당선되었습니다. 상대후보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 색깔론 등이 그의 주요한 선거 전략이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아무리 근거 없는 선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대중적 파급력을 체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론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근거 없는 신뢰를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말로가 아니라 언론을 인용하고 서류를 인용하는 홍보전술을 채택했습니다. 그는 또한 어떤 거짓말에도 통계를 동원하였고 숫자를 제시하면 대중이 신뢰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휠링에서 말한 205명,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말한 57명 등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상원의원의 지위를 갖고 있었지만 매카시는 여전히 워싱톤 정가에서 영향력이 미미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조건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미소대립의 냉전체제와 그 속에서 반공이라는 집단적인 히스테리에 갇혀 허둥대는 미국사회였습니다. 매카시는 자신이 갖고 있던 정치적 기술, 센세이셔널리즘, 과장, 증오와 복수의 언술을 여기에 얹었습니다. 그는 가장 탁월한 선동꾼으로 미국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1947년 HUAC이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점차 확산되어 온 미국사회의 반공분위기는 이런 매카시의 행동에 대해 어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지성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절차와 증거, 증언, 사법적인 판단이라는 틀을 유지하고 있던 HUAC의 활동은 매카시의 등장과 함께 마녀재판 식의 빨갱이 사냥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매카시의 활동이 미국 언론과 미국사회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할 때 터진 한국전쟁은 매카시의 행동을 하나의 이즘, 즉 매카시즘으로 뒤덮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에 실려 전국을 공산주의의 공포로 뒤덮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다 1950년 여름 그 유명한 로젠버그 부부(Julius and Ethel Rosenberg) 간첩사건이 터졌습니다.
사건의 개요는 이랬습니다. 줄리어스 로젠버그의 처남인 데이비드 그린글래스가 자신의 매형과 누나를 간첩혐의로 고발했고 검찰은 로젠버그 부부를 기소했습니다. 검찰이 이들을 기소할 수 있었던 유일한 증거는 그린글래스의 증언뿐이었습니다. 맨하탄 프로젝트에 의한 원자탄 개발연구소의 기계공이었던 그린글래스는 로젠버그가 소련을 위해 원자탄 실험과 관련된 그림을 스케치해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그린글래스는 관련실험에 대한 스케치를 작성했고 매형의 요청에 의해 해리 골드라는 소련 간첩에게 이를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른 간첩죄로 3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해리 골드가 증인으로 호출되었습니다. 해리 골드는 그린글래스로부터 원자탄 실험에 관한 스케치를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어떤 증거도 없었지만 증언만큼은 명확했습니다.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우선 세밀한 부분에서 두 사람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또 두 사람 다 이미 간첩죄로 기소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들의 증언이 믿을 만한가라는 신뢰성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린글래스가 전달했다는 스케치가 실제 존재했는지, 또 과학자도 아닌 일개 기계공으로 대학 재학시 여섯 과목 중 다섯 과목을 낙제한 사람이 그린 스케치가 과연 정보라고 할 수 있는지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진술이 엇갈리자 사법당국은 골드와 그린글래스를 같은 교도소의 같은 층에 수감시켰습니다. 당연히 증언을 짜맞추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미 복역 중인 사람이 증언을 대가로 감형을 약속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미 30년 형을 선고받았던 골드는 15년 만에 석방되었고 그린글래스는 후에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기의 절반만을 복역한 뒤 석방되었습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증언만으로 이루어진 재판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기소된 지 8개월만인 1951년 3월, 로젠버그 부부는 전기의자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당시 재판장이었던 어빙 카우프만 판사의 판결 주문은 확실히 이 사건이 매카시즘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의 훌륭한 과학자들이 소련이 원자탄을 완성할 것으로 예상한 시기보다 수년 앞서 소련인들의 손에 원자탄을 쥐어준 피고인들의 행동이, 이미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유발해 5만 명이 넘는 미국인 사상자를 낳았다고 본인은 믿고 있으며 앞으로도 수백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고인들의 반역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집행을 두고 국내외의 지식인들이 항의서한과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맨하탄 프로젝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형 집행에 대한 중단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으며 장 폴 사르트르, 파블로 피카소, 바톨로미오 반제티의 누이도 같은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돌리며 로젠버그 부부는 1953년 6월 19일에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은 한국전쟁과 이 전쟁에 의해 더욱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매카시즘의 결과였습니다. 트루먼 정부의 반공정책과 HUAC의 활동은 매카시 의원의 등장을 불러왔고 매카시는 다시 그 천부적인 선동능력을 통해 HUAC 활동에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HUAC은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면, 혹은 친지 중에 과거 공산당원이나 진보적인 인사가 하나라도 있으면, 또 그것도 아니면 미국체제에 대해 반미적인 언사를 했다는 신고만 있으면 사람들을 소환하고 조사했습니다. 모든 문화.예술 작품에 대한 검열이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불순하다고 판단되면 어떤 책도, 어떤 공연예술도, 어떤 영화도 금지되었습니다. HUAC은 공산주의에 대한 대국민홍보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알아야 할 100가지-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 볼 수 있는가? 모든 곳에서>와 같은 소책자를 수백만 부 인쇄하여 국민들에게 배포하였습니다. 미국정부의 법무부 장관이란 사람은 하원반미위원회 활동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미국민들의 공포심을 부추겼습니다.
“지금 미국에는 수많은 공산당원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 공장과 사무실, 정육점, 길모퉁이, 개인사업체 등 어디에나 말입니다 - 그들 각각의 몸에는 우리 사회의 죽음을 야기하는 병균이 득실거립니다.”
마침내 1950년 가을, 미 의회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국가보안법 제정에 나섭니다. 그동안 스미스법이라고 일컬어진 외국인등록법에 의해 전전과 전쟁 중에는 독일스파이와 외국인에 대한 규제를, 전후에는 정부를 전복하려는 국내의 공산주의자를 처벌해 왔던 것을 더욱 강화한 법이었습니다. 맥카렌 의원의 제안으로 제정되어 맥카렌법(McCarran Act)으로도 불리는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은 공산주의 단체의 의무등록을 규정한 법이었습니다. 이 법은 또한 이 단체의 회원들은 우편물과 글에 반드시 공산주의자임을 밝히도록 하였고 연방정부나 방위산업체에 근무할 수 없도록 하였고 외국여행을 금지하였습니다. 또한 이 법은 이 단체에 속한 외국인이나 영주권자에 대한 강체추방, 전시나 국가비상사태시에는 법원의 영장 없이 공산주의자들을 강제수용할 수 있도록 한 법이었습니다.
미국사회 전체가 실로 집단적인 광기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매카시의 근거 없는 선동은 계속되었습니다. HUAC의 활동은 점점 그 수위가 높아져 갔습니다. 미국민들은 한편으로는 공포에 떨면서 또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눈이 충혈되고 있었습니다. 지식인들은 행여 비판적인 의견을 낼 경우 공산주의자로 몰릴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도 없이 입에 올렸던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침묵하거나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오히려 이런 흐름에 편승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사회전반에, 그리고 문화예술과 언론까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시쳇말로 알아서 기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은 솔선수범하여 매카시를 애국자로 칭송하고 온갖 특집기사를 통해 반공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습니다. <공산당원들은 어떻게 세력을 확대할까?>, <공산당원들이 당신의 아이들을 노리고 있다> 등의 기사와 과거 공산당원이었던 사람들의 수기가 신문과 잡지를 도배했습니다. 헐리우드와 TV는 반공드라마와 영화제작을 통해 자신들은 공산주의와는 관계가 없으며 미국의 안보를 위해 일하는 애국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매카시의 활약은 눈부시게 진행되었습니다. 매카시는 전국민의 지지를 받는 애국적인 의원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의 선동은 하루를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고 이제 모든 ‘빨갱이 사냥’은 매카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미연방수사국(FBI)과 매카시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정보를 주고 받으며 자신들의 입지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1952년, 매카시는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하였고 공화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그 공적을 인정받아 상원 정부감사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설 조사소위의 위원장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직위를 이용한 매카시의 반공선동은 더욱 힘을 얻어갔습니다. 점차 그 범위도 공산주의자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자유주의자들, 더 나아가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거나 보수적인 미국사회를 건드리는 어떤 사상이나 의견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매카시에게 걸리면 모두가 공산주의자였습니다.
미국사회는 매카시의 공포에 주눅들기 시작했습니다. 언론도, 정치인도, 군인도, 평범한 일반 국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이젠하워 정부의 국무장관이던 존 포스터 덜레스도 매카시의 위력 앞에는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매카시는 이제 아이젠하워 대통령조차도 어찌 손대 볼 수 없는 대중권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매카시가 지목한 사람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공직이든 일반 직장이든 떠나야 했고 사회적으로는 매장되어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이러한 매카시의 선동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이 매카시즘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지만 미국사회는 여전히 매카시의 발아래 있었습니다. 1954년 1월 갤럽여론조사에 의하면 매카시의 국민적 지지는 51%였고 반대는 겨우 29%에 불과했습니다.
미국사회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집단적인 흥분과 광기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여러 차례의 청문회는 이런 미국민들의 심리상태를 더욱 자극하였습니다. 전후 유럽부흥계획을 통해 소련의 유럽진출을 막고 미국의 유럽지배를 가능하게 했던 마샬플랜의 조지 마샬, 원자탄 개발계획이었던 맨하탄 프로젝트의 상징 로버트 오펜하이머까지 청문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해외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고 미국 전역의 초등학교 학생들은 소련의 미국공습에 대비하는 대피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책상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그대로 느껴야만 했습니다. 불안과 의심의 문화가 사회 구석구석에 젖어 들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스스로 자부하던 미국은 그야말로 동토의 땅이 되어갔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미국의 보수세력과 자본은 자신들의 정치권력과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갔습니다. 매카시즘의 문제가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고 있는 조건에서 이들은 매카시즘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매카시의 철옹성과 같은 권력은 이처럼 부정하고 부패한 권력과 자본의 온실에서 키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부는 군비예산을 확장하며 제국주의 전략을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었고 자본은 이러한 정책아래서 배를 불리고 있었습니다. 1950년 초에 총 정부 예산 400억 달러 중 120억 달러였던 군사비는 1955년에는 620억 달러 중 400억에 달했습니다. 자본은 그만큼의 잇속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대중에 대한 선동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확장되지 않으면 그 허구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매카시는 자신의 입지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매카시는 자신의 발언이 과격할수록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져간다는 사실에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매카시는 자신에 대한 관심이 줄지 않도록 또 다른 과녁이 필요했습니다. 마침내 매카시즘의 화살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겨눠졌습니다. 매카시는 아이젠하워가 임명한 고위관리들이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며 행정부 여기저기에서 역모의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실로 놀라운 주장이었습니다. 1953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아이제하워도 공화당 의원들도 이제 매카시가 단순히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될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침묵하고 있던 자유주의자들과 언론, 그리고 민주당은 매카시즘이 언젠가 자신들의 목을 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반공의 광풍을 견디며 대항하다가 죽거나 아니면 앉은 채로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거나 할 판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급진적인 흐름을 차단하며 전후 미국사회의 주도권을 잡는데 반공주의를 최대한 활용했던 자유주의 세력은 제동장치가 고장난 것 같은 매카시의 폭주를 잡아야 했습니다. 문제는 누가 먼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였습니다. 후에 미국 방송사에 전설적인 방송인으로 기록되는 에드워드 머로와 프레드 프렌들리가 용감하게 그 총대를 멨습니다. 이들은 정치, 사회, 연예 등 주요 토픽을 다루는 CBS-TV의 See it Now(지금 봅시다 아니면 자 한 번 들여다봅시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네요. 우리로 말하면 2580이나 추적 60분쯤...)의 진행자와 프로듀서였습니다.
1953년 10월, 두 사람에게 미 공군의 장교하나가 아버지의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미 공군으로부터 고발당했고 결국 강제퇴역 당했다는 디트로이트발 단신이 접수되었습니다. 머로와 프렌들리는 이 단신기사를 심층취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취재 결과 공군 중위 마일로 라둘로비치가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 사상이 위험한 자로 공군당국에 신고되었고 공군당국은 그에게 아버지와 누나를 고발할 것을 요청했으나 라둘로비치가 이를 거절하자 공군사법당국에 고발한 후 강제퇴역 조치를 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판도, 증인도 없었고, 증거도 없었고 심지어는 고발의 내용과 고발자의 신원도 확인 되지 않았습니다. 머로와 프렌들리는 이를 보도하기로 했습니다. 회사는 이런 프로그램에 대해 큰 부담을 느꼈고 중단을 종용했습니다. 더욱이 광고주는 군수산업체였고 이를 방송하게 될 경우 광고중단 또한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공군은 지속적인 압력을 넣으며 협박했습니다. 머로와 프렌들리는 광고중단이 되면 그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의사까지 피력하며 방송을 강행했습니다.
전국을 휩쓸며 전국민을 마비시키고 있었던 매카시즘에 대한 최초의 저항이었습니다. 라둘로비치 중위는 인터뷰에서 이런 일은 묵과될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경우 이는 연좌제의 부활과 다름 아니며 또한 자신의 자식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아버지를 변명할 수 있겠냐며 호소합니다. 머로는 프로그램을 마치며 마지막 멘트를 이렇게 던집니다.
“미 정부와 국민 개개인 사이에 발생하는 이런 일들은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는 결코 말렌코프나 마오쩌뚱에게 화살을 돌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굿나잇 앤 굿럭.”
매카시즘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매카시즘에 대한 분명한 공격이었습니다. 이 방송은 대다수의 언론인들에게 자성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언론들은 매카시즘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민주당도 매카시즘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애들라이 스티븐슨은 전국에 중계된 TV 연설에서 아이젠하워가 매카시즘에 굴복했으며 공화당은 정치적 성공의 공식으로 매카시즘을 채택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공화당 안에서도 매카시가 이제 행정부에 대한 비판을 넘어 미 육군에 대해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버몬트 주 공화당 상원의원 플랜더스는 상원연설에서 매카시가 매카시즘이라고 하는 ‘1인 정당’을 세우려 한다며 매카시즘에 대한 강력한 우려를 표명하였습니다.
천천히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의 공세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조금씩 비판의 수위가 높아지자 매카시는 더욱 격렬한 언사와 선동을 통해 대중에게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대중은 매카시의 편이었습니다. 매카시는 어떤 위협과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미국을 지켜나가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응답했습니다. 아직도 그의 지지율은 50%를 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머로는 첫 방송 이후 작심을 하고 준비했던 프로그램을 방송합니다. 역시 See it Now였습니다.
그것은 미국 방송사에 획을 긋는 대 사건이었습니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조지프 매카시에 관한 보고, Report on Senator Joseph R. McCarthy>였습니다. 매카시와 매카시즘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담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방송사 안팎으로 엄청난 압력과 협박이 진행되었습니다. See it Now 제작팀원들에 대한 전면적인 신원조사가 행해졌고 사장은 방송사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전전긍긍하였습니다. 머로와 프레드는 꿋꿋하게 버텨 나갔습니다. 그들은 이 방송을 위해 사비를 털어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실으며 방송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방송은 1954년 3월 9일에 있었습니다. CBS가 매카시 의원에게 반론할 기회를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머로는 첫 멘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머로는 그동안 매카시 의원이 해왔던 말과 행동에 대하여 하나하나 그 허위를 짚어 나갔습니다. 머로는 매카시가 얼마나 근거 없는 말을 해왔으며 그가 제시한 증거들이 실제로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혀나갔습니다. 머로는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매카시의 문제는 바로 우리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아무도 조사위원회의 유용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사와 모함사이에는 분명히 선이 있는데도 매카시 의원은 매번 이 선을 넘었습니다. 이견과 배신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고발이 곧 증거가 아니며 유죄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미국인 조상들은 용기있게 쓰고 믿고 말하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카시 의원의 마녀사냥을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자유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 정작 여기 우리 땅에서는 자유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매카시 의원의 행동은 세계의 우방들을 경악시키고 적국에게는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만의 잘못일까요? 그는 우리의 광적인 공포심을 성공적으로 이용했을 뿐입니다. 잘못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굿나잇 앤 굿럭.”
이 방송은 매카시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습니다. 국민들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들도 머로의 용기에 대해 경의를 표했습니다. 어떤 언론도 매카시와 매카시즘을 정면에서 공격하고 국민에게 이 허무맹랑한 광기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적이 없었던 상황에서 이 방송이 미국민에게 던져준 의미는 대단히 컸습니다. 매카시가 자신에게 주어진 반론권을 이용하여 4월 6일 머로에게 도전했으나 이미 매카시즘의 광풍은 한 고비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 들어 급속히 늘어난 TV를 이용해서 급부상했던 매카시는 이번에는 그 TV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TV는 다시 한 번 매카시를 결정적으로 코너로 몰아넣게 됩니다. 바로 매카시와 육군이 첨예한 대결을 벌였던 매카시대 육군 청문회였습니다. 전국민에게 생중계되었던 이 청문회는 매카시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삶이자 자부심이었던 육군을, 국가안보의 가장 중요한 토대인 육군을, 자신과 함께 전선을 넘나 들었던 동료들을 건드리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우려와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육군청문회가 매카시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을 경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보고 적극 대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매카시가 권력을 이용하여 육군을 상대로 부정한 청탁을 했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하였습니다. 매카시의 선동을 자신들의 권력 기반으로 생각하여 매카시의 행동을 묵인 방조했던 그동안의 태도를 180도 바꾼 것입니다. 매카시는 육군이 공산당 침투에 대한 조사를 방해하고 책임을 면하려는 술수라고 반박했지만 매카시의 부정한 청탁은 언론에 의해 핫 이슈가 되었습니다. 육군과 매카시의 대결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상원은 매카시대 육군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매카시는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조사소위원회의 조사를 받는 기묘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1954년 4월 22일 시작하여 36일간 진행된 이 청문회는 매카시의 완전한 패배로 귀결되었습니다. 육군측 변호사였던 조지프 웰치와의 설전은 매카시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매카시는 일방적인 선동에는 능했지만 청문회라는 형식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설명하는 데는 무력했습니다. 매카시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말에 대해 명확하게 근거를 대지도 못하고 시종 흥분하며 스스로를 파탄으로 몰고 갔습니다. 36일간의 생중계에서 매카시는 내용의 문제를 떠나 질이 낮은 인간으로 보여졌습니다. 이는 매카시에 대한 신뢰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매카시즘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TV토론이 갖는 특징이었습니다.
청문회에서의 패배로 매카시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언론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그동안에 여야를 막론하고 그가 무서워 감히 어쩌지 못했던 동료의원들도 매카시를 경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원은 매카시가 상원의원으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매카시에 대한 징계결의안을 발의했습니다. 이는 매카시즘 자체를 문제로 삼을 경우 자신들 전체의 정당성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매카시에 대한 징계안 상정 그 자체는 바로 매카시즘에 대한 우회적인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1954년 12월 2일 오늘, 상원은 매카시에 대한 견책을 67대 22로 결의했습니다. 단순한 견책 정도의 결의였지만 이 결의는 매카시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 놓은 일이었고 매카시즘으로부터 미국사회가 비로소 놓여나는 계기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카시즘은 아이젠하워의 말대로 매카시워즘으로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극단적인 반공분위기는 일정하게 수그러들었지만 그 이후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조사와 심문은 일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후에 미국정치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리처드 닉슨이나 배리 골드워터 등은 이런 분위기를 업고 성장한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인들이었습니다. 대전 직전까지도 보수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대선후보를 출마시킬 정도로 일정하게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미국의 좌파운동은 이후 사실상 그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매카시즘은 미국의 좌파운동이 자유주의적 가치를 앞세운 자유주의 좌파운동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대외적인 외교에 있어서 공화.민주 양당이 사실상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국내문제에 관한 한 진보적 가치를 놓고 일정한 차이를 빗고 있는 것도 매카시즘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매카시즘에 대하여 그 시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는 미국 매카시즘의 경과를 통해 매카시즘이 근거 없이 누군가를 혹은 어떤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고 이를 대중적으로 선동하는 경향임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서 매카시즘은 단순히 공산주의에 대한 사상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이념적 낙인과 공격으로 확장되어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매카시즘의 정의에서 매카시즘이 갖고 있는 몇 가지 본질적인 특성이나 그 구성요건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카시즘에 대한 몇 가지 소회를 이야기할까 합니다.
그 첫째는 공산주의, 혹은 어떤 이념을 기본적으로 반사회적인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상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과 이념, 사상이 자유로운 사회에서 매카시즘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카시즘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어떤 사실의 진실여부를 두고, 혹은 어떤 주장에 대한 근거를 중심으로 접근한다면 이는 매카시즘에 대한 발본적인 성찰을 막는 일이 될 것입니다. 머로가 매카시에게 접근했던 방식은 공산주의라는 사상에 대한 자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머로는 공산주의는 분명히 반사회적이고 미국을 위협하는 사상이지만 매카시가 제시한 증거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매카시즘에 대해 이런 방식의 접근은 그 과도함을 억제할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매카시즘을 막는 데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도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그 사회가 보장하는 이념적 틀에서만 가능하다면 이는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를 지난 수십 년 동안 괴롭혔던 매카시즘이 지금도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인 속성이 언제나 매카시즘을 키운다는 사실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언제나 침해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를 내세우며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체제에 대한 개혁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근간한 사회질서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복지나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개입 등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일정한 연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사회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급진적인 변혁으로 나아가는 것을 통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매카시즘은 자유주의의 이런 지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듭니다. 미국에서 벌어진 매카시즘은 바로 이런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초 미국에서의 반공주의는 자유주의를 내세운 민주당 정부가 들고 나온 정책이었습니다. 후에 공화당의 집권으로 매카시즘이 일어났을 때 민주당과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그 화살이 날라 오기 전까지는 침묵하거나 이에 편승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는 한국사회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던 매카시즘에 대해서 정치적 자유주의, 혹은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개혁적인 자유주의자, 민주화운동가들이 보였던 태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일입니다.
셋째는 매카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대중적 선동의 문제입니다. 이는 곧 선동이 가능한 공간인 언론의 문제입니다. 현대사회는 전통적인 매체인 신문이나 TV를 넘어 SNS라는 새로운 언론을 갖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쪽의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불과 수분 내에 전 세계인에게 공유되는 오늘의 시대에서 매카시즘은 훨씬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매카시즘은 전적으로 TV와 신문의 위력에서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매카시는 언론의 상업주의, 선정주의를 철저하게 이용했습니다. 여기에 광고라는 미끼에 굴복하며 자본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언론의 기회주의와 무력함도 한몫했습니다. 매카시의 대중적 선동을 언론은 무차별적으로 수용했고 매카시는 대중에게 가장 애국적인 미국인으로 포장되었습니다. 이는 매카시즘이 탐욕스러운 자본과 그 자본에 기생하는 언론과 결탁할 때 어떤 위력을 갖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입니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 공정한 언론이라는 구조가 없는 곳에서 매카시즘의 싹은 언제나 움틀 수 있습니다.
넷째 현대의 매카시즘은 이미 매카시가 일으킨 매카시즘의 의미보다는 훨씬 확장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사용되는 매카시즘은 아주 광의적으로는 수구적이고 현실고착적인 현상을 주장하는 사람들, 즉 우파가 현실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는 좌파를 비판할 때 좌파들이 우파를 비판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담배회사가 금연운동을 매카시즘이라고 비판하질 않나, <플레이보이>가 포르노에 관한 미즈위원회의 활동을 섹스 매카시즘이라고 비판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매카시즘이라는 말이 아주 어렵게 사용되는 용법도 늘고 있다. 에이즈에 관한 책을 펴낸 어떤 저자는 에이즈가 공중건강분야의 매카시즘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미국의학저널>의 편집자는 소변검사를 화학적 매카시즘 이라고 불렀다.”
- <미국사 산책8> 강준만, 인물과 사상, 2010
이러다 보니 우파들은 매카시즘이 좌파의 마지막 피난처냐고 힐난하는 실정입니다. 역사적으로 아주 부정적인 이름을 얻은 매카시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좌파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좌파의 비상구든 아니든 어쨌든 매카시즘이라는 말은 이제 상대방을 특정한 카테고리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용어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매카시워즘?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매카시즘의 연원과 그 경과, 그리고 현대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매카시즘과 관련하여 조금 남은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조지프 레이몬드 매카시는 견책 결정 이후 사실상 정치생명이 마감되었습니다. 상원의원의 임기는 남아 있었지만 이후 변화된 주변의 조건 변화, 언론의 무관심과 동료의원들의 경원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원래가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과 더욱 가까워졌고 마침내 간염이 악화되어 1957년 5월 2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48세였습니다.
매카시는 오랫동안 미국사회에서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매카시에 대한 평가를 새로 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미국의 반공단체인 존버치협회의 회원들은 지금도 매카시를 추모하며 매카시를 미국을 지켜낸 사람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매카시가 다시 한 번 미국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린 것은 1995년 미국 국가안보국이 소련의 암호교선을 도청했던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를 공개했을 때였습니다. 공화당의 일부 의원들과 반공단체 회원들은 이 자료를 근거로 앨저 히스와 로젠버그 부부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며 매카시에 대한 불명예가 씻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개된 자료에 나온 몇 개의 암호가 로젠버그 부부와 앨저 히스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유추해석을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 대해 정작 국가안보국은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반공단체들은 이 자료를 근거로 매카시를 옹호하며 그가 거론한 사실들이 결코 허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곧장 우리나라의 수구, 보수단체에 수입되어 매카시의 주장이 사실이었듯이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수많은 간첩들이 존재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황장엽의 5만 간첩 주장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매카시를 옹호하는 다른 한 견해는 매카시의 반공주의는 사실은 미국정가와 미국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상류층과 그들의 지배체제를 겨냥한 것이었고 이는 미국정치의 개혁을 위해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는 주장입니다. 리차드 닉슨이 매카시즘을 옹호하고 공산주의에 대해 철저했던 것도 사실은 이와 통하는 일이라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매카시의 활동을 단순하게 선동을 통한 빨갱이 사냥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케네디는 매카시가 한참 이름을 날리던 당시, 초선의 민주당 상원의원이었습니다. 그는 매카시즘의 공포가 지배하던 그 시기 내내 침묵했고 매카시에 대한 징계결의안 투표에서 기권한 3명 중 1명(매카시를 빼면 2명 중 1명)이었습니다. 나중에 뉴 프런티어를 들고 나오며 젊고 개혁적인 정치인의 이미지로 변신하지만 초기에 케네디는 매우 보수적인 정치인이었습니다. 매카시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계이자 가톨릭이었던 케네디는 이 투표에서의 기권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고 루즈벨트의 부인이었던 엘레노어 루즈벨트로부터는 비겁한 사람이라는 비판도 들었습니다. 케네디는 후에 시대의 조류를 쫓아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변신했습니다. 정치철학의 변화인지 시대와의 영합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매카시즘과 관련한 헐리우드 이야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매카시즘이 헐리우드를 휩쓸고 있을 때 철저하게 반공주의 입장에 섰던 영화인들은 존 웨인, 로널드 레이건, 게리 쿠퍼, 로버트 테일러, 월트 디즈니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원래가 보수적이고 반공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매카시즘의 바람 아래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기있게 나선 배우들이 있었습니다. 잘못 나서면 영원히 영화계에서 추방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헐리우드 텐에 대한 영구적인 축출이 있고나서 그레고리 펙, 험프리 보가트, 로렌 바콜, 진 켈리, 존 휴스턴 등 일단의 영화인들이 나섰습니다. 이들은 HUAC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수정헌법 1조에 의한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며 영화인들에 대한 부당한 빨갱이 사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분위기로는 결코 쉽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헐리우드의 매카시즘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사람은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Elia Kazan, 1909~2003)입니다. 1949년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연극부문의 최고상인 토니상 감독상을 수상했고 1951년에는 영화 <욕망이라는 전차>의 감독을 맡았던 전도가 양양한 감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아 카잔은 젊은 시절 공산당에 몸을 담았던 사실이 알려져 청문회에 불려나왔고 이 자리에서 그는 동료 영화인 중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을 죄다 불면서 살아남게 됩니다. 엘리아 카잔은 한 술 더 떠 뉴욕타임스에 공산주의자의 척결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엘리아 카잔은 배신자의 대명사로 남았습니다. 이후 헐리우드의 영화감독으로 ‘죽기 전에 보아야 될 영화’ 목록에 오르는 <워터 프론트>, <에덴의 동쪽> 등을 연출했지만 엘리아 카잔은 동료 영화인을 고발했다는 오명을 씻지 못했습니다. 명성에 비해서는 훨씬 늦은 그의 나이 90살이던 1999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지만 시상식에 참여한 상당수의 배우들이 박수도 치지 않은 채 외면하는 풍경이 벌어졌습니다. 매카시즘에 대한 헐리우드의 상처는 그만큼 깊었습니다.
마릴린 몬로는 1956년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했습니다.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아서 밀러 또한 젊은 시절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HUAC 청문회에 소환되었습니다. 마릴린 몬로와 아서 밀러가 연애하고 결혼했던 1956년이었습니다(매카시가 상원에서 견책을 받은 이후에도 공산주의자에 대한 조사.심문은 계속되었습니다). 아서 밀러는 끝까지 동료 영화인에 대해 함구했습니다. 청문회를 드나드는 공산주의자 아서 밀러와 결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마릴린 몬로는 아서 밀러의 곁을 지켰습니다. FBI는 마릴린 몬로 또한 FBI의 위험한 인물 파일에 올렸습니다. 한 번쯤 스치듯이 들었을 마릴린 몬로에 대한 FBI의 감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HUAC은 1969년 국내치안위원회(Internal Security Committee)라고 개칭하였다가 1975년 국내치안을 위한 조사활동이 국민의 사상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기 쉽다는 비판이 대두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이쯤 하지요.
책! 책! 책!
일전에 소개한 <미국 민중사>와 <미국사 산책>을 보시면 더 많은 이야기와 의미들을 찾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에 여기 글에 소개되었던 매카시와 에드워드 머로의 대결을 다룬 영화 한 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굿나잇 앤 굿럭> 조지 클루니 감독, 2006
영화배우로 더 잘 알려진 조지 클루니가 감독한 영화입니다. 에드워드 머로역은 데이비드 스트래턴이라는 배우가 맡았습니다. 영화는 1958년에 열린 에드워드 머로에 대한 방송인들의 헌정식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머로는 이 자리에서 언론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입장을 말하고 날로 상업주의에 물들고 있는 언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합니다. 이 첫 장면은 이 영화에서 머로가 왜, 어떻게 매카시라는 골리앗과 싸웠는지를 압축해 주는 장면입니다. 이 영화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어떻게 미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볼 수 있고 사이사이에 집어넣은 매카시의 모습과 청문회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언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잔잔하면서도 긴장감있게 그려 나간 영화입니다. 제목 굿나잇 굿럭은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머로가 하는 하는 멘트입니다. 매카시즘과 결부하면 그야말로 밤새 별일 없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곰TV로 무료시청이 가능합니다. 길게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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