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사회주의는 논쟁의 시작이어야 한다!
서영표(제주대 사회학과)
진보정당에 대한 희망을 버린 지 꽤 되었습니다. 민주노동당이 막 제 모습을 찾아가던 시절, 짧았지만 당직자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으로, 노동당으로, 그리고 정의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철새’가 되면서도 제가 속한 정당이 최소한 한국정치의 왜곡된 우편향을 교정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누구처럼 당장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념으로 존재한 목표가 실현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반대쪽으로 치달리게 되죠. 젊은 시절 혁명가를 자처하다가 극우로 돌아선 사람들 말입니다.
제가 바란 것은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불러온 시장 맹신주의가 한계를 드러내고 기존 질서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비어 있는 좌파의 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정치세력이 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소박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장자유주의자 집단인 민주당의 들러리를 서는, 그래서 스스로의 색깔을 지워버리는 그런 정당을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류의 정당들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의미 없이 사라져 갔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참담하기까지 했습니다. 저의 선택은 정의당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촛불’은 역설적인 사건이었습니다. 70년대 식 권위주의와 개발주의가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부정적 잡종인 한국사회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쌓아온 불만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촛불’은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마음과 몸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는지 깨닫게 해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는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비정상’을 시장, 경쟁, 공정이라는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정상’ 때문에 고통스러웠는데 말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지금의 기준 자체를 부정하는 몸부림과 아우성이었던 ‘촛불’의 무의식은 이미 규율화된 의식에 의해 검열된 것입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지금의 질서를 만들어낸 ‘공범’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불만과 저항을 ‘비정상’과 ‘실현불가능성’ 속에 가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의당은 좌파가 깨고 나가야 할 이런 낡은 틀 안에 기꺼이 남아 있으려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관념적’이고 ‘유토피아적’이라고 손가락질 할 겁니다. 기꺼이 그런 낙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몸과 정신 속에 체화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볼 수 없는 현실의 모순과 변화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낡은 이데올로기 안에 여전히 붙들려 있는 이들에게는 ‘관념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보일 겁니다.
저는 양경규 동지가 ‘관념적’, ‘유토피아적’이라는 낙인을 기꺼이 함께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당의 지도부가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몇 개의 의석과 지지율에 도취되어 잊고 있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견지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당장 실현될 수는 없겠지만 한발한발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방향을 제대로 설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양경규 동지가 제시한 ‘민주적 사회주의’가 매우 무겁게 다가옵니다.
시장맹신주의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유대와 연대를 회복하지만 그것이 낡은 권위주의와 연줄망에 의해 질식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보다 깊고 넓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민주주의는 상품과 화폐의 단일한 기준에 부합되는 것만을 실현가능한 것으로 수용하는 시장맹신주의를 극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유주의가 표방한 다양성의 공존은 자본주의 안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내재적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회주의는 ‘평등’이라는 단순 논리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는 ‘평등’의 이름으로 다양성과 차이를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자본축적과 이윤추구을 절대선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억누르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의 필요(needs)가 표현되고 논의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다양한 삶의 양식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은 자본주의 안에서는 결코 성취될 수 없었던 자유주의의 가치가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민주적 사회주의의 의미가 분명해질 때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의 가치를 언급하는 것이 ‘듣기 좋은 말’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적 실천과 생태주의적 운동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충족될 수 없는 필요들이 자각되고 정치적 목소리로 모아질 수 있는 계기들입니다. 지금의 질서가 자본주의라는 구조적 조건이기에 이러한 계기들은 사회주의적 가치와 공명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는 없습니다. 목표를 공유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 속에서 연대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민주적’인 것이지요. 페미니즘적 실천과 생태주의적 운동과 나란히 서 있는 입장인 사회주의는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연대의 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미 밝혔듯이 저는 정의당원이 아닙니다.
‘정의당은 더 이상 진보정당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기에 당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민주적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운동은 특정한 정당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너른 연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양경규 동지와 저의 생각이 일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버렸던 정의당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그 차이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갈 길이 멀지만 지금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양경규 동지와 제가 일치하는 것은 가야할 방향을 찾고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는 자각입니다.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는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각이 논의되고 상호 비판되는 장이어야 합니다.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이 필요한 것은 유명세를 타고 있는 스타 정치인이 아니라 당원들이 당의 방향과 현 위치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계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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